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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이야기

 

 

 

주요 연표

왕조사 연표

고대 페르시아 왕조(B.C. 559-330)

사산 왕조(A.D. 226-651)

아랍의 지배(651-1258)

몽고의 지배(1256-1349)

티무르 왕조(1369-1500)

사파비 왕조(1501-1736)

아프샤르 왕조(1736-1749)

카자르 왕조(1796-1925)

팔레비 왕조(1925-1979)

이란 이슬람공화국(1979-)

 

근대정치사 연표

1906년 입헌군주국 수립, 샤 통치 종식

1919년 페르시아조약 -영국 보호령이 됨

1921년 레자 칸의 쿠데타

1925년 카자르 왕조 멸망, 팔레비 왕조 건국

1935이란(Iran)으로 국호 변경

1941년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 즉위(9)

1951년 모사데크 Mosaddiq 정권 수립

1953년 모사데크 실각

1962년 백색혁명 시작(1)

1963년 호메이니 망명(6)

1977년 재미 유학생 반정부시위(11)

1978년 반정부 시위 전국 확산(3)

1979년 팔레비 망명, 호메이니 귀국(2/1), 이슬람공화국 선포(4), 미대사관 인질사건(11)

1980년 바니 사드르 대통령 당선(1/25), 이란-이라크전쟁 발발(9/21)

1986년 미국 관리 비밀 방문(이란-콘트라 스캔들)

1988년 이라크와 휴전협정 체결(8/20)

1989년 호메이니 사망(6/3)

1993년 라프산자니 제6대 대통령 취임(8/4)

1997년 하타미 대통령 당선(5)

2001년 하타미 대통령 재선(6)

 

 

고대 페르시아 제국

이란 고원에 인류가 정착한 것은 아주 오랜 일이다. 페르시아라는 이름 또한 오래된 이름이다. 이란인의 직접적인 조상은 인도-유럽어족의 한 갈래인 아리아인이다. 이들이 고원에 들어온 것은 기원전 2500년 쯤으로 추정된다. 중앙아시아 초원에 살던 아리아인들은 기원전 4000~3000년 무렵에 이동해서 일부는 유럽에 들어가 게르만, 슬라브, 라틴의 원조가 되었고 일부는 남쪽의 고원에 정착해 이란이 됐다고 한다. 더 밑으로, 더 남쪽으로 내려간 사람들은 인도에 진출해 원주민이던 드라비다인들을 제치고 현재의 인도인들의 조상이 됐다.

아리아인은 이합집산을 거치는데 스키타이족, 메디아족, 이란(페르샤인들) 등이 모두 이 갈래다. 이란-이라크 전쟁1980에 일어났지만 실은 이미 인류의 초창기에서부터 오늘날 이라크에 살던 사람들과 이란의 아리아인들은 대립을 했었다. 초창기 이란의 아리아인, 이란족들은 당시 그 땅을 정복했던 메소포타미아수메르바빌로니아에 맞서 싸우는 용병 노릇을 했다. 아리아인들은 곧 원주민들을 제치고 고원을 장악해 '이란'(아리아인의 땅)을 만들어버린다. 기원전 7세기 쯤, 이란인들의 일파인 메디아인들이 아시리아에서 독립해 남부 이란소아시아에 걸쳐 메디아 왕국(B.C. 708 - B.C.550)을 세웠다. 메디아는 이란인이 세운 최초의 왕조였지만 영토가 넓었던 대신 중앙 집권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부족 연합체에 그쳤다고 한다.

아리아인이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한 것은 기원전 621년 메디아 왕국의 아스티아게스 왕 때다. 아스티아게스는 바빌론과 연합해 아시리아를 무너뜨리고 메소포타미아 북부지역을 차지했다. 메디아는 티그리스-유프라테스 연안의 '비옥한 초승달', 즉 오늘날의 이라크 땅을 차지하기 위해 바빌론에 맞섰으나 싸움은 패배로 끝났다. 바빌론의 나보니두스 왕이란 남부 아케메네스 왕조(Achaemenes, 기원전 550-기원전 330) 와 동맹을 맺어 메디아를 정벌해버렸다. 아케메네스는 아스티아게스의 외손자인 키루스 2(Cyrus the Great)가 연 왕조다. 아스티아게스는 아시리아를 무너뜨리기 위해 바빌론과 손잡았다가 훗날 바빌론에 망했고, 키루스는 바빌론과 연합해 메디아를 무너뜨리더니 급기야는 바빌론에 칼을 돌렸다. 키루스는 주변 부족국가들을 통합해 동으로는 소아시아아르메니아, 서로는 힌두쿠시까지 세력을 확장했고 기원전 539바빌로니아를 정벌한다. 한때의 동맹이던 나보니두스는 폐위됐다.

키루스 2세는 아주 관대한 정책을 펼쳐 피정복민의 관습과 신앙을 지켜줬다. 오히려 피압박 민족들에게 '해방자'로 추앙됐다고 하는데, 바로 성경에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바빌로니아에 노예로 잡혀 있던 유태인('바빌론 유수')을 해방시켜준 것이 바로 이 왕이다. 구약 에스라이사야에는 '고레스 왕'으로 표기돼 있다. 키루스는 이란들에게는 아주 위대한 왕, 너그럽고 지략이 뛰어난 왕으로 각인되어 있다고 한다. 키루스 2세는 이집트마저 정복하길 원했지만 당대에는 꿈을 이루지 못했다. 아버지의 소망을 이뤄준 것은 아들 캄비세스 2였다. 캄비세스 2세는 이집트를 정복하고 스스로 이집트 27왕조파라오가 되었으나 왕이 이집트에 가 있는 동안 정작 이란에서는 쿠데타 기도와 혼란이 벌어졌고, 캄비세스 2세는 에티오피아 원정이 실패한 뒤 자살했다.

위대한 황제들의 시대

캄비세스 2세 사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즉위한 다리우스 1인도 북부에서 오늘날의 불가리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헬레네스(그리스인)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페르시아 제국'의 시대가 온 것이다. 지중해홍해를 잇는 운하를 최초로 건설했다 하니, 수에즈 운하의 원형이 그 옛날에 만들어졌던 셈이다. 그리스인들은 이 거대 제국을 페르시아라고 불렀는데, 파르시어를 쓰는 사람들의 땅이란 얘기다. 이란를 파르시라고 한다. 그러니 '이란 제국'이 맞는 말이지만 지금은 '페르시아'가 일반화된 용어로 자리를 잡았다. 메디아를 필두로 줄줄이 이어진 왕국들을 모두 '페르시아'라 하고, 메디아 왕조, 아케메나스 왕조 식으로 '왕조'를 붙여 구분하니 뿌리는 다 똑같다. 페르시아에 정복된 그리스 식민도시들은 밀레투스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아테네가 여기 끼어들어서 전쟁이 난다. 다리우스 1가 쳐들어와 3차에 걸친 전쟁이 벌어진다. 다리우스의 1차 원정은 폭풍으로 실패했고, 2차 원정에서는 유명한 '마라톤 전투'로 퇴각한다. 헤로도투스는 마라톤 전투를 대서특필했지만 페르시아에서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도 않았던 전투였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학자들은 헤로도투스의 기록이 당시 병력규모로 미뤄 과장되어 있을 소지가 높다고 지적한다.

다리우스 1세는 3차 원정을 준비하던 중에 숨졌다. 뒤를 이은 인물은 전임자 만큼이나 명성을 떨쳤던 크세르크세스 1이다. 그러나 크세르크세스의 원정대도 살라미스 해협에서 아테네 해군에게 궤멸됨으로써 10여년에 걸친 원정을 실패한다. 전쟁의 패배, 결말은 '국력 쇠퇴'. 피정복민들이 크세르크세스 사후 줄지어 반란을 일으키고 지배층은 분열됐다.

아케메네스 왕조메디아 왕조와 달리 중앙 집권 체제와 사회·경제적 토대를 갖춘 명실상부한 제국을 만들었다. 당시의 행정과 치안, 세금 제도 등을 담은 상세한 기록들이 전해온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촘촘한 도로망과 국가가 운영하는 역마 제도이다. 전국 어느 곳에건 보름 이내에 중앙 정부의 뜻이 전달될 수 있었다고 한다. 제국의 수도인 수사에서 지금의 터키 북쪽 리디아 속주까지 고속도로가 연결되어 있었고, 이 네트워크는 속주들의 반란을 막는 안보 시스템이기도 했다.

아케메네스 왕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멸망한다. 알렉산더가 바빌론 땅에서 후계자 없이 사망한 뒤 광대한 영토는 휘하 장군 4명이 나눠 가졌다. 그들 중 이란을 지배했던 것은 셀레우코스(Seleucus) 장군이었다. 셀레우쿠스와 그 후손들이 이끈 왕조를 셀레우코스 왕조(기원전 312 - 기원전 247)라고 부른다. 그러나 셀레우쿠스 왕조는 지배구조를 만들기도 전에 반란에 시달렸다. 현재의 타지키스탄 지역인 파르스(Fars) 지방(Farsi, 즉 페르시아어의 어원이 됐던)에서는 반() 유목민파르티아족(이란스키타이족의 혼혈)셀레우키드 왕조를 무너뜨리고 파르티아 왕조(기원전 247 -기원후 224) 를 세웠다. 반란 지도자 아르사케스(Arsaces)의 이름을 따서 "아르사키드 왕조"(Arsacid)라고도 한다.

파르티아와 사산조 페르시아

파르티아 왕조미트라다테스 2(Mithradates II, 기원전 123-기원전 87) 치세 때 세력을 확장해 인도아르메니아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장악, 로마 제국과 상대했다. 실크로드를 따라 이란의 직물(페르시아 카펫)이 동서양을 오갔다. 지배층은 조로아스터교를 숭배했지만 대중들에게까지 퍼지지는 못했다고 한다. 파르티아는 주변국들에 비하면 신분 이동의 통로가 열려있는 비교적 개방된 사회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파르티아족의 출신지인 파르타브(Parthav) 지방의 언어인 파흘라비어(Pahlavi)가 공용어로 사용됐는데, 1979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으로 붕괴된 파흘라비 왕조(팔레비 왕조)는 여기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파르티아가 500년 가까이 존속됐음에도 불구하고 뒤이은 사산 왕조(Sassan, 224-652)가 조직적으로 전대의 유산을 파괴했기 때문에 역사 복원이 잘 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사산이란의 전설적인 영웅이다. 파르티아를 무너뜨린 아르다쉬르는 스스로를 사산의 후계자라고 칭했기 때문에 그의 왕조에 '사산조'라는 이름이 붙었다. 아르다쉬르는 집권 뒤 파르티아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지방 귀족들을 통제, 전국을 12개 주로 나눈 중앙 집권 체제를 만든다. 조로아스터 신관의 아들이었던 그는 조로아스터 교를 국교로 지정했고 정교 일치의 강력한 집권 체제를 추구했다. 그러나 아들 샤푸르 1(Shapur I)는 종교에 지나치게 심취해 승려들에게 정치를 맡기는 우를 범한다. 폭군 아자르 나르시의 시대를 지나 사산조의 10대 왕인 샤푸르 2가 즉위한다. '샤푸르 대왕'이라고 불리는 이 왕은 어머니의 뱃속에서 즉위, 상당기간 섭정을 거쳤다. 70년 동안 재위하면서 주변국들을 복속시키고 승려들의 특권을 없애 왕권을 강화했다. 샤푸르 2세에서부터 바흐란 5, 카바드 1 등으로 이어지는 기간은 사산조의 전성기였다. 페르시아는 정치사회적, 경제적으로 크게 부흥해, 뒷날 아랍인들에게 멸망하기까지 '르네상스'를 맞는다.

사산조의 역사로마 제국과의 싸움을 빼놓을 수 없다. 로마와 갈등했던 이유는 아르메니아 지배권 문제였다고 하는데, 아르메니아는 지금도 이슬람권에 둘러싸인 기독교 국가로 남아 있다. 소비에트 연방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들 중에서 유일하게 제법 자본주의적인 변신을 했는가 하면, 유대인에 버금가는 '로비 능력'으로 미국 내에서도 말빨 센 이민 사회를 형성하고 있다. 로버트 카플란은 밉살스런 저작 '타타르로 가는 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의 '이란 공포증'에 대해 설을 풀었는데, 양국의 역사가 오랜 만큼 적대심도 깊다. 아르메니아근대에 들어와 터키(오스만 투르크)에서도 숱하게 학살됐으니 슬픈 역사를 가진 민족이다. 하지만 사산조파르티아에 대면 신분 이동이 제한되어 있었지만 기독교도가 특별히 박해받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르메니아를 둘러싼 사산조와 로마 제국의 싸움은 역시나 '양대 제국의 패권 싸움'으로 봐야 할 것이다.

사산조의 수도는 바그다드 근처에 있는 크테시폰인데, 당시에 이미 200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던 대도시였다. 크테시폰은 바그다드의 건립자 아부 자파르 알 만수르(압바스 왕조 2칼리프)에 의해 파괴됐고 크테시폰의 건축물들은 바그다드의 건축 자재로 이용됐다고 한다.

아랍족의 융성과 중세 이란

아랍족은 이란인들보다 문화적으로 뒤쳐져 있던 사막의 유목민족이었다. 그런 아랍족이 '大페르샤'를 제치고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등장 이후였다. 보통 이란을 아랍국으로들 알고 있지만 아랍과 이란은 뿌리도 언어도 다르다. 비슷한 점이라면 같은 이슬람을 믿는다는 점,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점 정도다. 이란이란이고 아랍은 아랍이다. 실제 아랍국들은 이란을 경외시 혹은 백안시한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때 미국은 물론이고 사우디 같은 아랍국들도 모두 아랍 형제인 이라크를 지원했었다.

무함마드가 아라비아반도를 장악한 뒤 이슬람군대가 가장 먼저 전쟁을 건 대상도 바로 이란(페르샤)이었다. 무함마드 사후 초대 칼리프로 취임한 아부 바크르 Abu Bakr는 서쪽으로는 비잔틴, 동쪽으로는 사산조를 향해 정벌의 칼날을 돌린다. 650년 아랍군은 크테시폰을 점령하고, 이듬해에는 사산군을 대파하면서 이란 전역을 장악했다. 정통 칼리프朝(650-661)가 멸망한 뒤 이란에는 우마이야드 Umayyad 왕조(661-750)와 압바스 왕조(750-821)가 대를 이어받았다. 사산조의 후예인 다부예흐 Dabooyeh가 망국의 유민들을 모아서 작은 나라를 세우긴 했지만 페르샤의 후계자로 보기엔 미약하다(다만 이들은 이슬람 개종 후에도 독자적인 국가를 유지, 950년간이나 지속됐다고 한다). 압바스 왕조 말기, 이란 땅에서는 반란이 줄을 잇는다. Saffarids, Samanids, Ghaznavids, Buyids 등 자잘한 왕조들이 명멸했던 시기(821-1055) Iranian Intermezzo라 부르기도 한다.

이슬람교 포교 과정에서 무슬림들이 보여준 관용은 잘 알려져 있다. 이란에서는 주로 도시거주민을 중심으로 개종이 급속히 진행됐다. 이란인의 개종이 빨랐던 것은, 지역적 역사적 종교적 속성 상 조로아스터교가 이슬람교와 유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유사했다기보다는 이슬람이 조로아스터의 여러 요인들을 흡수해 만들어졌다고 해야겠다). 몽골인들이 한족의 문화를 배운 것처럼, 이란을 정복한 아랍인들은 페르샤의 제도와 문화를 물려받았다. 특히 '제국'의 운영체제를 많이 배웠다. 버나드 루이스같은 서방 이슬람학자는 '이란은 처음부터 제국이었다'고 말하곤 한다. 고대 페르샤 시절부터 이란 '제국'을 이끌어왔고, 전제군주에 익숙해 있다는 말이다. 루이스가 이런 얘기를 한 것은 호메이니 혁명 이후 이란을 헐뜯기 위해서였지만. 아무튼 이란의 군주인 샤 Shah (루이스에 따르면) 이집트의 파라오, 중국의 황제와 비견되는 절대 군주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일례로 페르도시 Ferdowsi(935- ?)의 유명한 서사시 '샤나메' 영역본은 Shah King을 구분하고 있다. 우리말로 옮기면 '황제' '군왕' 쯤 될 터인데, 이란의 샤를 '왕중의 왕'이라 하는 것을 보면 당대 페르샤인들의 자부심이 중화사상 못지않았음을 볼 수 있다.

아랍 지배 뒤에도 이란인들이 관료로 많이 등용됐고 교육, 철학, 문학, 법학, 의학 등 학문 발달에도 크게 기여했다. 아랍어가 공식언어가 됐지만 이란의 민중들은 페르샤어(파르시)를 지켰다. 특히 샤나메를 비롯한 페르샤의 서사시는 유명하다. 파르시에서 파생된 말들은 인도는 물론이고 아프간을 비롯해 '-스탄'으로 끝나는 대부분 나라들에서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다.

이방에서 온 점령 왕조들

압바스 왕조는 9세기 무렵부터 투르크 전사들을 용병으로 불러모았다. 왕조가 쇠하자 칼리프는 상징적인 종교지도자로 전락하고, 투르크 전사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된다. 그중 돋보이는 것은 셀주크 투르크(1037-1220). 이들은 오늘날의 아프간 지역, 이란의 동쪽에서 출발해 서쪽으로 이란을 장악했다. 이스파한을 중심으로 밑으로는 인도, 서쪽으로는 이라크와 시리아에 이르는 땅이 아랍족에 이어 다시 투르크족의 지배를 받게 됐다. 당시 셀주크에 저항했던 이들이, 테란 근교 알무트에 근거지를 뒀던 '이스마일 암살단'이다. 이들은 알무트 일대를 장악하고 셀주크 왕조의 주요 인사들을 암살했는데, 이들이 해시시를 흡입했다는 데에서 영어 단어 '암살 assassin'이란 말이 나왔다고 한다. 훗날 이들의 존재는 시아파 무슬림, 이란인들의 폭력성을 강조하는 사례로 악용되기도 한다.

셀주크 투르크는 1219년 몽골족에게 무너진다. 칸의 후예들은 페르샤 전역을 황폐화했다. 후세 입장에서 보자면 대규모 학살보다 더 안타까운 것이 문화유산의 파괴다. 칭기즈의 손자 훌라구 칸은 이란 땅에 일한국을 세웠는데, 가잔 Ghazan 칸 치세(1295-1304) 에 다시 역내 부흥이 이뤄진다. 그러나 1335년 아부 사이드 Abu Said 왕이 숨진 뒤 한국은 결국 사분오열한다.

이란 북동부에서 칭기즈의 후예들 중 강성했던 티무르가 제국 건설에 나선다. 티무르는 1381이란을 침공하고 북인도, 서역, 소아시아에 이르는 제국을 세웠다. 페르샤 천년 고도 시라즈와 이스파한은 다시 초토화됐다. 티무르 제국은 1405년 티무르 사후 급속히 쇠퇴했고, 1501년까지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티무르 치하의 이란 북서부에는 사피 알 딘이라는 이슬람 셰이크(이슬람에는 원래 성직자 혹은 사제 개념이 없기 때문에 정확히 옮기기 힘들다)가 추종집단을 거느리고 살고 있었다. 당시 이단으로 배척받던 쉬아파들인 이들은 순니파의 탄압을 피해 은둔생활을 해왔다. 1499년 이 집단의 지배권을 장악한 이스마일이 정복전쟁을 일으킨다. 이스마일은 곧 이란 전역을 통일하고, 1501년 타브리즈 Tabriz 를 수도로 사파비 왕조 Safavid(1501-1736)를 수립한다. 이로써 이란 652년 아랍족 침입 이후 1,000년 만에 이민족의 지배를 벗어난다. 오랜 이민족 통치로 이란인들은 반외세 심리와 이방인에 대한 환대라는 상반되는 의식구조를 갖게 됐다는 분석도 있고, 또 오랜 전제군주정과 외세 통치로 인해 절대권력에 굴종하는 공포심리가 체질화됐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적어도 이란은 지리적인 틀에서 이란고원이라는 땅 안에 언제나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슬람학자들은 이란이 외세의 지배를 받기는 했지만 '결코 땅과 나라이름을 잃은 적은 없었다'고 말한다.

 

 

 

이슬람 쉬아파와 사파비 왕조

이스마일은 쉬아 이슬람을 국교로 정하고 순니파들을 강제 개종시켰다. 쉬아 이슬람이 국교가 된 것은 이민족의 천년 지배를 끝낸 것보다도 현대 이란역사에 더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 됐다. 사파비 왕조는 초기 신정체제를 구축했다. 이스마일이 모든 권력을 갖고, 성직자와 관료, 군이 3대 권력집단으로 샤를 에워싸는 체제였다. 어쨌건 쉬아는 비주류(이슬람에는 기독교의 '이단'에 해당하는 개념은 없다)였다. 오스만 투르크(영어로는 오토만 제국, 오늘날의 터키)가 이단을 처벌한다며 1524이란을 침공해 타브리즈를 함락시킨다. 아마도 투르크는 유럽의 십자군 전쟁에서 이단 전쟁의 논리를 배운 듯 -_- 이란군이 반격에 나서긴 했지만 사파비 왕조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오스만은 1533년 이라크를 점령해버리고, 아제르바이잔과 코카서스 지배권을 놓고 사파비 왕조를 두고두고 위협한다.

사파비 왕조의 전성기는 샤 압바스 Shah Abbas의 치세(1587-1629) 때였다. 이란 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존경받는 인물인 압바스는 이스마일의 증손자다. 선대 왕인 이스마일 2세는 자기 아버지한테 10년간 유배됐다가 탈출해서 정권을 장악했는데, 왕이 된 뒤에 형인 무하마드 호다반데 Mohammad Khodabande만 남기고 친족은 물론 아비의 신하들까지 모두 도륙해버린다. 공포정치에 질린 근위대가 호다반데를 옹립하는 쿠데타를 일으키려다 발각됐고, 압바스의 형 헤이다르마저 반란군을 이끌다 전사한다. 압바스는 10살 어린 나이에 반란군 지도자로 추대된다. 작은아버지에 맞서 왕위를 차지하기까지 압바스의 드라마는 '용의 눈물' 같은 영웅신화 겸 전쟁이야기다. '타고난 군사전략가'인 압바스는 일단 '적의 적'인 오스만과 강화를 맺어 국경분쟁을 일단락 지은뒤 동쪽 우즈벡을 격퇴시킨다. 그리고는- 오스만과의 전쟁이다. 이라크, 그루지야, 코카서스를 탈환해 버린다. 정치적으로는 개혁가였다. 사제들과 귀족들의 사병(私兵)을 혁파하고 관료제를 강화하여 중앙집권제를 공고히 했다- 마치 왕건의 행로처럼, 그는 왕조의 창시자처럼 개혁을 강행한다. 그 덕에 정교 분리가 이뤄지기 시작했고, 종교에 독립적인 위계질서가 만들어졌다. 이란은 다시 동서양 교역중심지로 발달하기 시작한다. 전국 도시를 잇는 도로망과 숙박시설을 만들어 안전을 보장하고 비단 무역을 독점, 국가재정을 확충한다. 압바스는 바레인과 호르무즈 해협 섬들을 점령하고 인도양의 포르투갈 세력을 격퇴한다.

'전성기'를 얘기하려면 문화가 빠질 수는 없다. 압바스는 심지어 '계몽군주'였다고 한다. 예술을 장려해 건축과 회화 등 페르시아 예술과 문화를 부흥시켰다. 이스파한을 새 수도로 정하고 사원과 궁전, 학교, 다리 등을 지어 세상의 절반(Nesf-e Jahan)이라 불릴 정도였다. 이란인들은 이스파한을 '이란의 심장'이라 하고, 수도인 테란은 '이란의 영혼' 즉 머리라고 한다. 몇해전 지진으로 폐허가 된 밤 Bam을 가리켜서 외신들이 페르샤의 보석이니 에메랄드이니 했는데 사실 이란에서 밤은 대표적인 유적지는 아니다. 이란에서 가장 유명한 곳들(그러니까 관광지들)이라고 한다면 테란, 이스파한, 쉬라즈, 파브리즈다.

압바스 2(1642-1666) 통치기 뒤로 사파비 왕조는 내리막을 걷는다. 어떤 이는 압바스 2세를 영조에 비유한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굶겨죽인 것처럼, 압바스 2세는 아들이 역모를 꾀했다고 의심해서 처형해버린다. 손자 사피 1세가 뒤를 잇지만, 아비의 죽음으로 비뚤어진 이 왕은 공포정치로 살육전을 일삼는다(이건 정조와 다르다). 나라가 부실해진 틈을 타서 아프간이 쳐들어온다. 1722년 아프간의 부족장 마흐무드 Mahmud가 이스파한을 함락하고 마흐무드 1세로 즉위한다. 폐위된 술탄 후세인 왕의 아들이 신흥군벌 나데르의 힘을 빌어 왕위를 되찾긴 했지만, 이번에는 나데르가 반역을 일으켜 스스로 왕이 되어버린다. 사파비 왕조의 종말이다. 나데르는 초반 피치를 올리다 1747년 암살됐다. 이후 아프샤르, 잔드, 카자르 등 여러 왕조가 부침하는 혼란기가 이어진다.

카자르 왕조와 근대 이란

근대 이란은 카자르 Qajars 왕조 (1795-1925) 시기부터라고 볼 수 있다. 아그하 모하마드 칸 Agha Mohammad Khan은 케르만 지방(이번에 지진 참사가 일어났던 곳)에서 잔드 Zand 왕조를 끝내고 카자르 왕조를 연 뒤 테란으로 천도했다. 하지만 성격이 극악무도해서 시종에게 살해되고 말았다고. 아들도 애비못지 않았는지, 사치에 탐닉해 국고를 탕진하고 아제르바이잔을 러시아에게 빼앗기는 바보짓을 했다. 아제르바이잔은 이란 문화권인데 옛 소련 시절을 거치면서 나라가 완전히 비틀어졌고, 독립한 뒤에는 아수라장 꼴이 났다. 19세기 중엽부터 러시아와 영국이 이란을 침략하기 시작. 문제의 저 아들네미는 러시아와 두 번 싸워서 지고 끝내 코카서스를 빼앗겼고, 또 그 아들놈은 1857년 파리조약으로 헤라트와 아프간땅을 영국에 내줬다. 헤라트는 아프간 서쪽, 즉 현재의 이란에 가까운 쪽인데 '페르샤 양탄자'의 본고장이다. 뒤에 영국은 아프간을 장악하려다 엄청 데이고 학을 뗐는데, 그 짓을 소련이 80년대 반복하고 지금 미국이 또 하고 있으니. 아무튼 아제르-이란-아프간 지역의 오늘날 국경선 윤곽이 저 바부팅이 왕 시절에 만들어진 셈이다.

낫세르 앗딘 샤 Naser ad Din Shah (1848-1896) 시절에 미르자 타키 칸 아미르 Mirza Taqi Khan Amir 라는 재상이 있었다. 어느 제국이나 그렇지만 이슬람권은 관료제가 발달해 얘기 속에 '재상'이 자주 등장한다. 이 재상은 스러져 가는 국가를 살리기 위해 과감한 개혁정책을 시도하였으나 관료들의 저항과 국왕의 견제로 결국 내쳐진 뒤 죽임을 당한다... 망조 든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스토리다. 보통 아미르 카비르 Amir Kabir 라고 불리는 이 재상은 이란에서 크게 존경받는 인물인데, 지금도 많은 이란인들이 그의 개혁이 중단됐던 것을 아쉬워한다고. 1871년 또다른 재상이 다시 개혁을 추진했다가 역시 실패. 이란의 근대화는 결국 일그러질대로 일그러졌고, 자발적인 근대화가 이뤄지지 못했다. 영국의 경제침탈이 본격화되면서 민중의 반외세 운동도 거세졌다. 1890년에는 영국이 담배독점권을 가져가자 이슬람 지도자가 금연령을 포고, 결국 독점권을 되찾은 일도 있었다.

 

팔레비 왕조와 레자 샤의 개혁

왕실은 썩어서 국가재산을 서구에 팔아치웠다. 상인과 학생, 지식인을 중심으로 왕권 제한 움직임이 분출되기 시작. 1906 8월 무자파르 알딘 샤 Muzaffar al Din Shah는 제헌을 약속했고 12월에 근대적 헌법이 제정됐다. 되는 일이 없으려니, 이 왕이 닷새만에 죽었다. 뒤를 이은 모하마드 알리 샤 Mohammad Ali Shah는 입을 씻고 헌법을 파기한다. 그리고는 러시아 장교가 지휘하는 군대(코사크 병단)를 시켜 의회를 폭파해버린다. 봉기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제헌 혁명'이라 부르는 이 봉기를 이끈 제헌파들은 1909 7월에 테란에 입성해 샤를 몰아내고 헌정을 세운다. 1907년부터 러시아와 영국은 이란을 양분해 수탈을 하고 있었다. 1차대전 중 이란은 영국, 러시아, 터키군의 전쟁터가 되어 짓밟혔다. 러시아가 1917 볼셰비키 혁명을 거치면서 내정에 정신 팔린 사이, 영국은 1919년 사실상 이란을 보호령으로 만드는 조약을 강요해 식민화한다. 이란인의 反英감정은 극도로 고조됐다. 이를 기반으로 떠오른 인물이 코사크 부대 사령관인 레자 칸 Reza Khan 이었다.

레자 칸은 1926 '레자 샤 파흘라비'로 등극, 팔레비(파흘라비) 왕조(1926-1979)를 열어젖힌다. 레자 샤는 과감하고 체계적인 서구화에 들어간다. 부족 중심의 형태로 운영되던 군대를 혁신, 상비군으로 만들어 왕정의 권력을 강화했고, 관료제를 뜯어고쳤다. 전국을 포괄하는 교육제도를 도입하고 근대적인 대학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세속국가'를 지향했던 레자 샤의 원대한 야심을 알려준다. 옛날 우리나라에서 유학자들이 서당에 앉아 아이들을 가르친 것처럼 이슬람권에서는 이슬람학자들이 교육을 맡았었다. 이슬람권에는 오래전, 10세기부터 대학이 발달했는데 아프간에서 테러리스트 온상이 되고 있다고 (미국이) 지탄했던 '마드라사'가 이런 교육기관들을 가르킨다. 이집트 카이로의 알 아즈하르 성원(聖院)에 있는 대학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대학 중 하나로 꼽힌다.

레자 샤는 이슬람 학자들에게서 교육권을 빼앗아 종교적, 전근대적 사고방식 대신 세속적, 서구적, 합리적, 근대적 국민의식을 고양시키려 했다고 보면 되겠다. 그의 개혁으로 근대적 교육을 받은 관리들이 생겨나고 경제가 회복되고 중산층이 형성됐다. 교육 뿐만 아니라 사법권도 이슬람학자들에게서 근대적 사법기구로 넘어오게 됐다. 역시 이슬람의 독특한 측면인데, 이슬람은 종교라기보다는 종교-문화-사상-사회-정치체계의 통일체다. 꾸란의 말씀은 경전인 동시에 법전에 해당되고, 신과 인간 사이를 매개하는 '성직자' 개념이 없는 대신 이슬람 학자 겸 율법학자들이 무슬림을 지도한다. 권위있는 율법학자들(다른 종교권에서는 '성직자'로 부르는)이 법률적 판단을 해서 발표하는 것을 파트와 fatwa 라고 하는데, 무슬림들에게는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서구 법체계의 '판례'에 해당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레자 샤는 근대적 사법체계를 도입해서 성직자들의 자의적인 판결 관행을 중지시키고, 1936년에는 여성들의 차도르를 없앴다. 하지만 개혁을 밀어붙이기 위해 반대세력과 언론을 강도 높게 탄압했다. 봉건적 특권을 박탈당한 이슬람 세력은 결국 왕조의 적이 되고만다. 왕가와 성직자(편의상 이렇게 부른다면)의 대립은 1979년 이슬람 혁명을 이해하는 주요한 열쇠다. 근본적으로 레자 샤의 근대화 정책은 봉건적 토지소유제도를 혁파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토대 없는 윗줄만의 개혁으로 그쳤고, 더욱이 개혁에 드는 비용도 농민 세금에 의존했기 때문에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레자 샤는 소련과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독일과의 경제관계를 강화했다. 열받은 소련과 영국은 1941이란을 침공해 레자 샤를 압박하기 시작했고, 위기감을 느낀 그는 결국 아들 무하마드 팔레비에게 왕위를 넘겨준다. 레자 샤는 영국군에 체포돼서 영국과 모리셔스 등지를 전전하다 1944년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에서 외롭게 죽어갔다.

팔레비 왕조는 친미 부패왕조의 이미지가 워낙 강하긴 하지만, 적어도 레자 샤는 카자르 왕조 말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개혁을 추진, 이란인에 의한 근대화를 추진하고 제국주의에 맞서려 했던 정치가로 평가해야 한다...고 오늘날의 사가(史家)들은 말하고 있다 -_- 잘 모르긴 하지만, 그의 개혁이 성공했었다면 터키의 케말 아타튀르크(터키의 아버지)처럼 '이란의 아버지'가 되었을 터인데. (역사에서 '만약'을 가정해보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가능성들을 점검해보고 점쳐보고 실패의 원인을 찾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또 재미삼아 '만약에~' 해보는 것만 해도 아주 좋다. 왜 그걸 나쁘다 하는지 모르겠다) 레자 샤의 개혁이 케말 파샤의 개혁과 다른 점이 있었다면? 케말은 공화정을 택했는데 왜 레자 샤는 왕정을 택했을까? 더 재미난 것은, 터키와 이란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터키는 서방에서 '서구화해서 성공한 케이스'라고 떠들어대고 있고 (실제로는 터키를 미워하면서) 이란은 서방에서 '악마의 나라'로 몰아붙이고 있는데, 과연 그럴까.

아들 팔레비(보통 '팔레비 국왕'으로 불리는) 즉위 뒤인 1941년 소련과 영국은 이란을 침공한다. 이란은 연합국의 병참기지가 되었고, 영국과 소련의 경제적 침탈도 심해졌다. 소련군은 2차대전 종전후에도 가장 늦게까지 이란에 주둔했으며 이를 배경으로 이란 공산당인 투데당 Tudeh party이 세력을 불렸다.

모사데크의 민족주의 정권과 팔레비 왕조의 부활

반외세 민족주의를 내세운 모하마드 모사데크 Mohammad Mossadeq가 이끄는 국민전선이 약진을 보이자 1951년 팔레비 국왕은 등떼밀려 그를 총리에 임명한다. 모사데크 총리는 취임과 동시에 유전 국유화를 단행했다. 이란 유전을 꿰차고 있던 영국은 이란의 돈줄을 차단하기 시작했다. 더욱이 모사데크가 투데당과 협력할 움직임을 보이자,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까지 나서 군부 쿠데타를 사주한다. 모사데크는 반역 혐의로 체포된뒤 3년간 복역하고 고향에 가택연금됐으며 1967년 사망했다. 후진국에 태어난 민족주의 정치인의 운명은, 대개 이런 시나리오로 진행된다.

모사데크를 쫓아낸 팔레비는 친미, 친영 노선을 노골화하고 비밀경찰(SAVAK)을 동원해 반대파를 탄압했다. BP, 더치 셸 같은 서방 석유회사들이 이란의 유전을 장악했다. 1955년에는 바그다드조약이 성립된다. 바그다드조약기구(중동조약기구 METO)는 터키·이라크·이란·파키스탄·영국으로 구성된 상호방위동맹으로, '가맹국의 안전을 위한 협력'을 목적으로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소련의 중동진출을 막기 위해 결성된 것이었다. 회원국이 아닌 옵서버 자격으로 참가한 미국이 이 기구를 좌지우지했다. 1958년 이라크가 바트당 혁명 뒤 탈퇴하면서 이 기구는 해체되고 소련에 맞선 군사조약기구인 중앙조약기구(CENTO)가 만들어진다.

METO에 반강제적으로 가입한데 이어 팔레비 국왕은 1959년 미국과 방위조약을 체결, 미군 주둔을 허용한다. 1963년 팔레비는 6개항의 개혁조치를 국민투표에 부쳐 이른바 '백색혁명'을 시작했다. 주내용은 토지개혁, 근로자에 회사 이윤 분배, 삼림과 목초지 국유화, 국영사업장 매각, 노동자 농민에 유리하게 선거법 개정, 문맹퇴치 지원 등이었으며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부여했다. 특히 역점을 두어 추진하였던 토지개혁은 아버지 레자 샤 시절 무산됐던 것으로, 팔레비 국왕이 솔선해서 왕실 토지를 농민들에게 분배하기도 했다. 하지만 토지소유자와 겹치는 이슬람 성직자층은 이 조치에 크게 반발한다. 이들은 아야툴라 루홀라 호메이니의 지도 아래 반()백색혁명 운동을 벌였다. 호메이니는 가택연금 됐다가 이듬해 터키(뒤에는 이라크)로 망명했다. 성직자들의 반대 속에서도 토지개혁은 진행됐고, 경제도 나아졌다. 국정에 자신감이 생긴 팔레비는 1967 10월 오랫동안 미루어 왔던 대관식을 거행하고 1971년에는 페르샤 제국 창건 2,500주년 기념식을 페르세폴리스에서 성대히 거행하기도 했다. 내정이 안정되자 팔레비는 중동의 경찰 역을 자임하고 군비 강화에 나섰다. 내용은 실상 미제 무기 수입이었다. 국민들은 이런 친미노선에 굴욕감을 느꼈고, 이슬람 전통을 무시한 서구화 정책에 반감을 가졌다. 1979년 이슬람혁명 이전에 노엄 촘스키가 쓴 글을 보면, 이란이 당시 중동에서 지금의 이스라엘과 같은 역할, '미국의 경비견 노릇'(이건 내 말이 아니라 이스라엘 어느 총리의 표현이다)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모사데크 국민전선의 한 분파인 이란자유운동, 호메이니가 이끄는이슬람세력, 페다인(특공대 혹은 민병대)과 무자헤딘(이슬람 전사) 등 무장단체들이 모두 반 팔레비 전선에 나서기 시작했다. 반왕정 운동은 점차 조직화되어갔다.

팔레비 왕조의 붕괴와 이슬람 혁명

과시성 사업과 군비 강화에 예산을 낭비한 결과, 이란 경제는 1976 후반부터 눈에 띄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왕정의 무능과 부패 속에 빈부격차는 오히려 커졌다. 1977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지미 카터는 그간 묵인해왔던 왕정의 인권탄압에 우려를 표하고 개선을 요구한다. 그러던 차에 1978 왕정은 호메이니를 음해하는 기사를 친정부지에 게재, 국민을 자극하고 쿰 시에서 열린 신학생 데모를 유혈진압한다. 이스파한의 바자르가 항의표시로 철시하고 시위에 나서자 다시 무자비하게 해산하는 등 78년 벽두부터 시위와 유혈진압의 악순환이 시작됐다. 8월 아바단에서 시위군중이 경찰을 피해 들어간 렉스 시네마에 불이 나서 400여명이 숨지는데, 훗날 조사에서는 광신도의 방화로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누구나 비밀경찰의 소행으로 믿었다. 9월 성난 군중이 테란 잘레흐 광장에 운집하자 경찰이 무차별 발포, 유혈극이 벌어졌다.

이라크이란의 압력에 따라 호메이니를 추방했으며 호메이니는 프랑스 파리망명해간다. 그의 프랑스 망명은 오히려 이란 반정부운동이 국제적 주목을 받게 하는 계기가 됐다. 12팔레비 국왕은 온건파인 국민전선 지도자 바크티아르 Bakhtiar와 협상, 바크티아르에게 총리직을 맡기고 출국하기로 결정한다. 이듬해 1월 팔레비는 이란을 떠났다. 그러나 1979 출범한 바크티아르 정부에 대해 호메이니는 '불법'임을 선언하고 타도령을 내린다. 21일 호메이니 귀국. 군부마저 호메이니 지지로 돌아서자 바크티아르마저 망명해버리고 212일 왕정은 완전히 종식됐다. 이것이 이란 이슬람혁명이다. 1979. 2. 5. 호메이니는 메흐디 바르자간 Mehdi Bazargan을 임시정부 수반으로 지명한다. 하지만 이슬람최고혁명위원회가 사실상의 정부였고, 정규군과 별도로 이슬람혁명수비대가 만들어져 무력으로 뒷받침했다. 12월에는 이슬람공화국을 표방한 새로운 헌법이 채택됐다.

테란 주재 미대사관 인질사건(11. 4.)이 없었더라도 미국이란을 그냥 두지 않았을 것이다. 왈러스틴헌팅턴의 책을 읽으면서,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미국이 느낀 '체제 충격'이 어마어마하게 컸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었다. 아무튼 인질사건으로 바자르간은 사임했다. 1980 1바니 사드르 Bani Sadr가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됐지만 혁명세력을 누르지 못했다. 사드르는 1년만에 실각해하고, 무자헤딘(MKO) 지도자 마수드 라자비 Masoud Rajabi와 함께 81 7월 파리로 망명했다. 사드르는 파리에서 호메이니 축출 운동을 전개했지만 이란의 권력투쟁은 승패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성직자 계급의 승리 이후 이란은 교조주의로 치닫는 동시에, 정정불안과 암살이 횡행한다. 사드르 실각 뒤 취임한 알리 라자이 대통령과 자베드 바호나르 총리가 나란히 암살됐다. 혁명위원회는 분쟁을 잠재우기 위해 저항조직을 해체하고 3000여명을 처형했다. 1981혁명은 초기의 불안단계를 극복하고 제도적으로 완성되었다.

여기서 사담 후세인이 등장한다. 이라크는 인구의 65%시아파이고, 시아파의 종주국은 이란이다. 이슬람국가들 중에서 시아파 인구가 많은 나라는 이 둘 뿐이다. 후세인이란 혁명의 파고가 넘어올까 두려워 선제공격을 해버린다. 주변 아랍국가들의 명시적, 암묵적인 지지 속에 1980 7이란-이라크 전쟁이 시작됐다. 표면적인 이유는 Shatt al-Arab 수로영유권 다툼이었다. 개전후부터 1982 여름까지는 이라크가 공격의 주도권을 잡았으나 1982말부터 이란이 초기의 열세를 극복하고 반격에 나서면서 지리한 소모전에 돌입한다. 미국 무기로 무장하고서도 미국의 이라크 지원사격으로 고립지경에 빠진 이란은 국민들의 '혁명 수호 의지'로 패전을 면할 수 있었지만 인명피해는 이란 쪽이 훨씬 컸다. 그러나 외적의 침입으로 오히려 이란 내에서는 혁명 분위기가 공고해지는 효과가 있었다. 전쟁이 1989 9UN중재 끝에 종료되고 호메이니도 사망한 후(1989 6)에야 이란은 정상적인 국가로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지금은 호메이니의 뒤를 이은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최고종교지도자로 군림하고 있다.

세계역사이야기

 

 

호주 원주민들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인 애버리진은 현재로부터 약 5만 년 전, 마지막 빙하기 때 바다가 얕아진 사이에 동남아로부터 배를 타고 호주로 도착하였다. 그 후 2~4만 년간 간빙기가 오면서 다른 대륙들과 완전히 동떨어진 자신만의 문화를 구축하게 된다.

처음 유럽인들이 호주를 발견했을 때 약 100만 명의 원주민들이 300여 개의 부족국가를 형성하고, 적어도 250개의 언어 및 700여 개의 방언을 쓰며 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 부족들은 각자 고유한 토템을 갖고 있었으나, 드림타임에 대한 전승은 대개 공통으로 가지고 있다.

유럽인들의 발견

17세기에 네덜란드의 모험가들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하자 연안 탐험을 실시하여 ‘신 네덜란드’라 명명했다. 오스트레일리아가 이들에게 발견될 당시 약 100만명의 애버리진과 300여개의 부족국가가 있었고 이들 사이에서 적어도 250개의 언어 및 700여개의 방언이 사용되었다고 전해진다.

네덜란드인의 탐험활동은 동인도 회사의 사업의 일환으로서 실시되었는데 경비가 가중되고 이익이 오르지 않았기 때문에 중단되었다. 1699년 영국의 해적 윌리엄 댐피어가 신네덜란드의 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보고는 비관적인 것이어서 그 후 탐험열이 냉각되었다. 트레스 등의 탐험가가 그 일부를 바라본 데에 그치기도 하였다. 1769년 태평양에서의 금성 관측에 참가했던 제임스 쿡에 의해서 타히티, 뉴질랜드를 거쳐, 오스트레일리아 동해안의 탐험이 실시되어, 그곳의 일대를 ‘국왕의 이름과 국왕의 깃발 아래’ 점령하고, 뉴사우스웨일스(영국 웨일스에서 연유)라고 명명했다. 쿡은 그 보고서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농업 개발에 관해 적절한 판단을 내리고 있다. 이 때부터 이 땅이 하나의 대륙으로서 인정되기 시작하였다. 뉴사우스웨일스는 얼마 뒤 그리스의 철학자가 생각했던 남쪽대륙(테라아우스트라리스)에서 오스트레일리아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주

영국의 죄수 폭증과 미국 독립혁명(1776년)으로 뉴사우스웨일즈주에 새로운 유형(流刑) 식민지를 건설하기로 하였다. 1788년 1월 26일, 아서 필립이 이끈 11척의 배에 1500명의 인원이 탑승한 첫 함대가 시드니 항구에 도착하고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의 건설을 시작하였다. 식량의 자급 태세를 갖추는 일이 당초의 급선무였으나, 미지의 풍토에서 농업 경험자가 적었던 관계로 개발은 진척되지 않았다. [2] 마지막 죄수 호송인 1868년까지 약 16만 명에 달하는 죄수들이 오스트레일리아로 호송되었. 당시 영국의 왕은 조지 3세였다.

이와는 별개로, 1790년대부터 세계 각지에서 자유 정착민들이 이주해오기 시작하였다.

골드 러시

어느 정도 개발이 진척되자, 시드니 서쪽에 급사면을 맞대고 솟아 있는 동부 고지의 일부를 이루는 산들이 식민지의 전면적인 발전을 저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뒤 이 산들을 넘어가는 길이 발견되고, 산지 서쪽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농목의 적지에 개발의 손이 뻗쳤다. 즉 1850년대골드 러시의 시대가 됐다. 배더스트(Bathurst) 밴디고, 밸러랫 등에서 발견된 금을 찾아서 사람들이 쇄도하였다. 빅토리아주뉴사우스웨일즈주에서 시작된 금광시대는 중국부터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1850년의 40만 인구는 10년 후엔 115만, 30년 후에는 223만으로까지 증가하였다. 직접 금을 찾는 사람 이외에 기술자·장사꾼도 모여들어 이 대륙의 경제 활동이 활발해지자, 이 대륙 내에 성립되고 있던 6식민지간의 물자 교류 및 본국과의 교역도 왕성해졌다.

 

영국 식민지 총독은 가혹한 세금 및 결정을 내리고, 결국 1854년 유레카 감옥에서 유혈 투쟁이 일어난다. 이를 유레카 혁명 이라고 한다. 현재 멜버른에 있는 유레카 타워는 이 유레카 혁명을 기념한 것이다. 1880년대 시드니와 멜버른의 세련된 현재적인 모습은 이 금광시대로부터 일어난 것이다.

 

유레카혁명=유레카 방책 봉기라고 불리운다

 

호주 역사를 통틀어 유일한 무장 폭동인 이 봉기의 배경은 골드 러시. 1851년 대규모 금광이 발견된 빅토리아주에 몰려든 채굴업자와 광부들에 대한 영국의 가혹한 압제가 반발을 불렀다. 광부들의 요구는 크게 네 가지. ▦과도한 탐사허가세 인하 ▦경찰의 폭력적 징세절차 철폐 ▦국왕 소유지에 대한 탐사금지조치 해제 ▦선거권과 피선거권 허용 등을 담은 청원서를 줄기차게 제출했으나 답을 못 얻었다.

쌓여가던 불만은 한 채굴업자가 피살되고 살인용의자인 식민관리들이 무죄 석방된 그 해 10월 터져나왔다. 장례식에 운집한 1만5,000여명의 광부들은 ‘개혁동맹’을 결성하고 유레카 금광 근처에 방책을 쌓았다.

남반구에서만 볼 수 있는 별인 남십자성을 그린 깃발을 내걸고 농성에 들어간 광부 1,400여명과 진압 군경 276명은 12월3일 총격전을 벌였다. 15분 만에 끝난 교전 결과는 정부군의 압승. 광부 22명과 군경 6명이 죽고 114명의 광부가 감옥으로 끌려갔다.

봉기 이후 영국은 광부들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줬다. 식민지 전역이 들썩거렸기 때문이다. 봉기가 확산돼 호주가 미국처럼 독립할 경우 거대한 금광을 상실할 수 있다고 판단한 영국은 서둘러 유화책을 내놓았다. 연행된 광부들도 전원 무죄로 풀려났다.

광부들의 분노가 없었다면 호주의 자치와 민주화는 더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경제적 불만에 대한 광부들의 피가 호주의 기반을 닦은 셈이다.

 

 

 

새로운 국가로 독립

1901년 1월 1일뉴질랜드를 제외한 6개의 식민지 연합으로 구성된 연방 국가로 독립하였다. 이와 같은 배경 아래 1900년, 20세기의 첫날을 기하여 각 식민지는 각 주로 재출발함으로써, 이 땅에 영연방(英聯邦) 내의 자치령으로서 오스트레일리아 연방을 결성하였다.

세계대전 참전

제1차 세계대전제2차 세계대전에 오스트레일리아 및 뉴질랜드 국민들 약 40만 명 정도가 참전하였고 그 중 약 6만 명이 전사했다고 알려진다. 현재도 안작(ANZAC)은 중요한 오스트레일리아의 역사 중 하나이다. 이 나라는 제1차 세계대전(61,928명 전사), 제2차 세계대전(39,400명 전사), 한국 전쟁(339명 전사), 베트남 전쟁(520명 전사)에 참전하였다. 그 때문에 ANZAC (Australia & New Zealand Army Corps)은 아주 중요한 날이기도 하다. 웬만한 동네에는 Anzac Hill이 있을 정도로 일상에 파고 들기도 한다. 매년 4월 25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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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이 나라는 영연방 소속국가들의 정치적 자율성을 보장한 1942년 웨스트민스터 법(Statute of Westminster Adoption Act 1942)에 따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국가원수이며, 오스트레일리아 총리의 추천을 받아 그가 임명한 총독이 다스리는 입헌 군주제를 명목상 채택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 헌법1986년 3월 3일에 제정되었다. 영국식 의회제도를 채택하여 상하 양원으로 구성되는 연방의회가 있다. 도시의 산업가 층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당, 지방의 농목업자를 기반으로 하는 국민당,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하는 노동당이 3대 정당을 이룬다. 세계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정당이 최초로 내각을 조직한 일도 있다. 1996년 3월 총선에서는 야당인 자유·국민당연합이 압승했다. 현재 실권자는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줄리아 길라드 제27대 연방총리로서, 2007년 11월 24일에 치러진 총선거에서 존 하워드가 이끌던 오스트레일리아 보수연립에 승리하여 2007년 12월 3일에 부총리로 취임하였고 2010년 6월 24일 총리로 정식으로 취임하였다.

주 정부에 한정된 권한은 교육제도의 예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상당히 크지만, 연방 전체에 관여하는 외교·국방·무역·금융 등은 연방정부의 권한에 속한다. 외교·군사면에서 전반적으로 모국인 영국의 영향이 후퇴하고 미국과의 유대가 강화되고 있다. 동남아시아조약기구(SEATO)에 가맹했고, 베트남에 파병한 바도 있다.[9] 미국·뉴질랜드와의 사이에 공동 방위체제를 갖는 앤저스(ANZUS)조약을 맺고 있다. 현재 통용되고 있는 국가(國歌)인 Advance Australia Fair(오스트레일리아여, 힘차게 전진하라!)는 1984년에 제정되었다.

국가체제 전환 논의

1999년, 폴 키팅 전 총리를 중심으로 한 영연방 완전독립 지지자들의 요청으로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이 나라의 군주제 폐지 및 체제 전환이 논의되었으나, 과반수(약 54%)가 전환에 반대하였다. "영국과의 우호" 및 (독립시 도입할)정치체제간 갈등이 그 원인이었다. 그러나 2007년 1월의 여론조사(Newspoll 조사)에서는 45% 대 36%(19%는 무응답)로 공화국 전환에 찬성, 전세가 역전되었다.

연방상원

호주연방상원(The Australian Senate)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상위입법기관으로, 정식으로 연방에 가입한 6개 주에 12명씩, 그리고 준주지역에 2명씩 대표의석을 할당하는데, 각 주를 선거구로 놓고 경쟁하는 대선거구제 방식을 취하며, 정당득표수에 비례하여 의석을 배분하므로 군소정당에 다소 유리하다. 2007년 현재의 총의석수는 76명이다. 임기는 6년이며, 매 총선거마다 과반수(2004년 36석, 2007년 40석)가량의 의석을 교체한다. 현재 구성(정당별, 2011년까지 임기 기준)은 다음과 같다.

연방하원

호주연방하원(The Australian House of Representatives)은 오스트레일리아의 하위입법기관이다. 그러나, 상원보다 더 강력한 권한을 갖고 있으며, 영국과 마찬가지로 이곳의 다수당 지도자, 즉 연방총리가 국가를 실질적으로 통치한다. 연방하원의 소수당 지도자는 '범야권의 지도자'(Leader of the opposition)로서 총리와 상호간 정책토론을 하며 주로 대립각을 세우나, 간혹 중요 국가적 정책사안에서는 긴밀히 협력한다.

전체 의석수(2007년 현재 150석, 정부구성을 위한 과반수는 76석)를 각 지역별 인구에 비례하여 배분한다. 영국과 유사한 소선거구제이나,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에 1번, 그 후 차선으로 지지하는 후보들에 번호(등급)을 매겨 모든 후보들에게 기표하는 '선호투표(제)'에서, 최초투표에서 과반이 넘는 지지를 획득했거나, 과반 이상 득표자가 없을 경우 최다득표를 기록한 '최후의 2인' 중 가장 많은 지지(1차투표에서 과반이상 득표-하면 그대로 당선-자가 없으면 2차선호, 3차선호 등을 거쳐 가장 많은 선호를 차지하는 경우)를 얻은 후보가 당선된다. 양당제 정치문화의 발전과 전체 유권자들의 의사를 반영한다는 점에서는 유리하지만, 군소정당들에게는 매우 불리하다.

200711월 24일에 열린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11년간의 야당생활을 끝내고 케빈 러드가 이끄는 노동당이 집권(정권교체)에 성공하였다. 새 연방하원의회는 2008년 2월 12일에 업무를 공식 개시하였다.(그 최종 구성은 2007년 오스트레일리아 국회의원 총선거를 참조할것)

 

사회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은 석기시대와 똑같은 수렵생활을 영위한 데 지나지 않았으며, 식민지 당국은 그 노력을 이용할 수는 없었다. 원주민 인구는 크게 감소하여 순혈종의 원주민 약 4만 명이 특별보호구에서 보호 생활을 보내고 있다. 따라서 이 나라의 주민 구성을 생각할 때 원주민은 현실적으로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 결과 이 나라의 주민은 모두 최초의 선대 이래 도래한 사람들이며, 현재 총인구 약 1,973만 중 96%가 유럽계 백인으로 구성되어 명실공히 ‘백인의 천하’라 해도 좋겠다. 그 중 영국계가 압도적으로 많아 90%를 차지한다. 오랫동안 이민에 의한 인구 증가를 꾀해 왔는데,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급속한 자원 개발, 경제 성장을 목표로 하고, 또한 1930년대의 낮은 출생률에 기인하는 인구 구성의 틈을 메우기 위해서 이민 수용정책이 채용되었다. 이탈리아·그리스·네덜란드·독일 등지로부터의 이민이 많다. 한편 골드러시 때의 중국인 채광부와의 사이에 일어난 노동력의 덤핑·생활 정도의 저하 등의 문제가 얽혀서 발생한 호주 정책이 최근까지 채용되고 있었다. 그러나 최근 세계 여론과 아시아로 눈길을 돌린 이 나라의 입장 등으로 호주 정책이 파기되었다. 국어는 영어이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사회보장제도가 잘 발달된 복지사회이다. 사회보장제도는 고령자·신체장애자 등에 대한 연금과, 실업자·병약자·자녀가 있는 가정에 대한 수당 등이 있다. 그 밖에 교회나 복지단체에 대해서도 많은 지원을 하고 있다. 또 주택정책이 잘 되어 있어 2008년 현재 호주의 주택 보급률은 70%를 조금 웃돌아 세대의 약 25%의 정도는 임대주택에 거주하고 있다. [19]교외주택의 정원에는 스위밍풀이 사파이어처럼 반짝이고 있고, 요트들이 항만을 가로질러 미끌어져가고 있으며, 도로는 자동차로 붐빈다. 영국계 주민이 많고, 영연방의 하나인 탓에 생활양식이 영국과 비슷한 점이 많다.

오전과 오후에 반드시 차를 마시는 시간이 있으며, 크리켓·론 볼링·럭비 등의 스포츠가 활발하다. 이 외에도 골프나 경마, 수상 스포츠, 캠핑을 즐기고, 일요일 오후에는 지역적으로 있는 ‘아르보(오후라는 뜻)’라는 정원 맥주파티에서 서로 어울린다.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흔히 예고없이 친구와 친척집을 ‘잡담하러’ 방문하는 관습이 있고, 시골에서는 남녀가 따로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느긋한 옥외생활의 분위기는 먹는 일과 그 사회생활에도 영향을 미쳐, 이곳 사람들은 오스트레일리아식 바비큐라는 요리를 항시 즐기게 되었다. 많은 공원이나 해변가에서는, 점심때나 저녁식사시간이면 불에 굽는 스테이크와 갈비 소시지의 냄새가 환담소리와 맥주 깡통 비우는 소리와 어울려 은은히 새어 나온다. 야외식사의 풍습은 ··바닷가재, ‘야비’라고 하는 민물가재 등을 파는 거리의 노점에서도 성행되고 있다. 섹스숍, 도색영화, 도색잡지가 즐비하고 성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노골적인 TV 광고를 방영하기도 한다. 도박도 널리 행해져 대규모 사교클럽이 인기가 있고, 행락을 위하여 해외여행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노동조건을 몇 가지 갖고 있다. 그들은 일년에 4∼5주의 휴가와 연중 여기저기 산재해 있는 다수의 공휴일을 확보하고 있다. 또, 크리스마스부활절 외에,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은 농업전시회, 여왕의 생일, 그리고 멜버른 사람인 경우에는 이 나라 최대의 경마행사인 ‘멜버른 컵’ 경기 때도 근무를 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일찍 근무를 시작하여 오후 4시면 끝마침으로써, 몰려오는 파도 옆의 백사장에서 본격적으로 일광욕을 하는 등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만들고 있다. 오늘날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풍경의 하나는, 태양에 바랜 머리카락과 푸른 눈을 가진 십대의 젊은이들이 풍요와 넘치는 영양, 그리고 야외생활로 다져진 건강한 피부빛의 육체들을 가지고 서프보드와 윈드서핑 장비가 꽂힌 캠프용 자동차 주위에 모여 있는 모습이다. [20]

민족

애버리진이 사용하는 도구

원주민 탄압

영국계가 주류이지만 다양한 민족이 존재하며, 원주민 보호 구역에는 예전부터 거주하던 어보리진도 분포한다. 태즈메이니아지역의 애버리진은 호주영국식민지가 되면서 백인들의 '인간사냥'으로 전멸당하고 말았으며, 호주의 애버리진들도 193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약 40년간의 호주정부의 원주민 말살정책으로 부모로부터 강제로 분리되어 백인 가정으로 입양당하거나 강제수용당했다. 원주민들의 인권을 짓밟은 호주정부의 원주민 탄압정책은 《리더스 다이제스트한국어판에 강제수용당한 원주민 소년이 탈출하여 고향에 돌아온 이야기가 실릴 만큼 지식인들의 지탄을 받았으며, 애버리진들도 불행한 자신들의 과거를 '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또는 '도둑맞은 아이들'(Stolen Children)이라고 부를 만큼 큰 상처를 받았다. 강제 입양이나 수용당한 원주민 어린이들은 최소 1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우울증등의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데, 일부는 법정투쟁을 하여, 2007년 9월 1일 호주 역사상 최초로 보상결정이 내려졌다.[21]

캐빈 러드 정부의 사죄

2007년까지 재임한 존 하워드 정권에서는 호주정부의 민족말살정책이 이전정권의 일이었다는 이유로 애버리진에 대한 사과나 보상에 소극적 태도를 보였으나, 2007년 12월에 집권한 케빈 러드 행정부2008년 2월 13일, 범정부차원의 첫 번째 공식사과문을 발표하고 이를 연방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등, 적극적인 사죄활동을 시작했다.[22] 이는 호주정부가 "잃어버린 세대"로 불리는 정부주도의 토착민 가정및 사회 파괴행위에 대해 사죄의 뜻을 밝힘으로써 과거사 청산의 의지를 보였다는 의미가 있다.

호주의의 폐지

또한 1973년까지 호주를 고수하여 흑인의 이민을 제한하였으나, 노동력 부족 등의 문제가 나타나자 1973년에 백호주의를 전면 폐지하였고, 그 뒤로 인종 차별은 줄어들었다.

세계역사이야기

 

 

 

 

인도역사.

 

1526년 성립된 무굴제국은 1857년 세포이반란을 계기로 멸망하고 인도 전역이 영국의 직할식민지로 편입된다. 1920년대 초 인도의 지도자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국가의회당(Indian National Congerss Party)을 영국 식민정치에 대항하는 대중적운동으로 전환하였다. 1947년 8월 15일 인도영국연방 중에서 총리 네루 아래 주권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힌두교인과 이슬람교인의 반목이 영국으로 하여금 인도를 분열하게 하여 이슬람교인이 대부분인 동서파키스탄이 탄생하였다.

인도는 1950년 1월 26일 새로운 헌법을 공포한 후에
영국연방 안에서 공화국이 되었다. 독립 이후 간디와 네루의 의회당은 네루의 영향력 아래 인도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후에는 네루의 딸과 손자가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인도를 통치하였다. 총리인 네루는 그가 사망한 1964년까지 인도를 통치하였다. 이후 샤스트리(Shastri)에게 권력이 넘어갔다가 1966년 네루의 딸인 인디라 간디에게 이양되었다.

인디라 간디는 1966년부터 1977년까지 인도를 통치하였다. 1975년 심각한 정치적 경제적 문제들에 둘러싸이게 된 간디 여사는 국가의 위기 상황을 선포하고 국민들의 자유를 제한하였다. 그녀의 정책을 국민들이 따라주기 바라며 1977년 선거를 실시하였으나 데자이(Desai)가 이끄는 5개
야당의 혼합인 자나타당 (Janata Party)이 승리하였다. 1979년 데자이 정부는 붕괴하였다. 이후 싱(Singh)이 임시정부를 형성하였으나 권력은 다시 1980년 1월 간디 여사에게 이양되었다. 1984년 10월 간디 여사는 암살되었으며 그녀의 아들 라지브 간디가 국민의회당에 의해 그녀의 자리를 계승받았다. 그의 정부는 1989년 부패혐의에 의해 붕괴되었으며 셰크하르(Shekhar)에게 정권이 이양되었다.

1989년
야당의 연합인 자나타달(Janata Dal)은 라지브 간디의 의회당을 물리쳤다. 1991년 5월27일 라지브 간디는 타밀라두 지역에서 선거운동을 하다가 암살당하였는데 이는 스리랑카의 타밀 극렬주의자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선거에서 승리한 의회당이 213석의 의석을 차지하였으며 라오(Rao)의 지도력 아래 다시 권력을 잡았다. 라우는 30년만에 간디나 네루 가계의 출신이 아닌 첫번째 의회당 출신 총리가 되었다. 라우의 정부는 5년의 임기를 모두 채웠다.

이 시기는 인도가 경제적으로 점차 자유화되고 개혁하는 과정이었으며 세계로 인도의 경제를 개방하는 시기였다. 인도의 국내정치는 새로운 형태를 띠게 되었는데 각 계급, 종교, 민족 단체들의 지역적, 정치적인 소규모 정당들이 난립하였다. 라우가 이끄는 정부의 임기 마지막해인 1996년 봄 몇 가지 정치적 부패 스캔들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로 역사상 의회당에 의해 치러진 최악의 선거가 되었다.

 

印度史

history of India

현재의 인도공화국과 1947년에 각각 분리·독립한 파키스탄 및 방글라데시 공화국도 포함하는 인도아대륙(인도반도)의 역사.

개요

남쪽으로는 드넓은 대양이 감싸고 있고, 북쪽으로는 거대한 히말라야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북극의 찬바람과 중앙 아시아의 건조한 기류를 차단시켜준다. 이와 같은 지형적 영향으로 인도아대륙은 최북단에 해당하는 잠무와 카슈미르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아열대성 기후대를 이룬다. 육로로 접근이 용이한 곳은 북서쪽과 북동쪽뿐인데, 외부세계와의 접촉은 대부분 이 지역을 통해 이루어졌다. 서쪽으로는 구릉들과 산들로 이루어진 인도-이란 국경이 있고, 동쪽으로는 인도-미얀마 국경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히말라야 산맥이 가로놓여 있다. 인도아대륙은 대체로 북부지역의 인더스·갠지스 강 유역과 남부지역의 인도반도로 구분된다. 인더스와 갠지스 강 유역은 광막한 충적평야가 펼쳐진 곳으로 위대한 두 도시문화, 즉 BC 3000년경의 인더스 강 유역 문명과 BC 1000년경의 갠지스 강 유역 문명을 낳은 중심지였다. 남쪽으로 이 지역을 반도와 분리시키는 구릉들과 산림지대에는 오늘날까지도 원주민이 살고 있다. 이 지대를 가로질러 서쪽으로 나르마다 강이 흐른다. 이 강은 오랫동안 북인도와 남인도의 상징적인 경계선이 되었다.

북부인도는 고유문화와 인종을 가진 여러 지역들로 구성되어 있다. 서부의 발루치스탄 고지대는 강우량이 낮은 지역으로, 주로 밀과 보리를 생산하는 곳인데, 인구밀도는 낮은 편이다. 이곳의 원주민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란계의 이웃 종족들과 매우 유사하다. 인접해 있는 인도 평원도 강우량이 극히 적은 지역이지만, 해마다 범람하던 인더스 강과 근래에 들어서는 운하에 의한 관개수로에 힘입어 상대적으로 높은 농업생산성을 기록하고 있는 곳이다. 이와 상응하여 발루치스탄 지역보다 인구밀도도 높다. 인더스 강 유역은 북쪽의 펀자브 지역과 중앙의 신드 평원, 남쪽의 인더스 삼각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 이 삼각지대의 동쪽은 타르 사막지역이며, 이곳은 다시 반도의 최북단인 아라발리 구릉지대와 접해 있다. 이 지역들을 벗어나면 라자스탄 구릉지대와 말와 고원이 펼쳐진다. 그 남쪽은 카티아와르 반도인데, 이 지역은 지형적·문화적으로 라자스탄의 연장선상 위에 놓여 있는 곳이다. 이 지역들은 앞서 언급한 지역들보다 상대적으로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다. 그러나 지형적인 이유들 때문에 다소 고립되어 있는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북부인도의 펀자브와 라자스탄 동쪽은 대개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여러 강줄기들과 북쪽의 히말라야 산 기슭을 따라 펼쳐져 있다. 그 남부지대는 언덕과 수많은 단층애로 길이 끊긴 산림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빈디아 산맥을 포함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에는 반드레르·레와·카이무르 평원 등이 속해 있다. 중앙 인도의 구릉지대와 히말라야 산맥 사이에 갠지스 강 본류가 흐르고 있는데, 이 지역은 높은 인구밀도와 적당한 강우량 및 고도의 농업생산성을 특징으로 하는 곳이다 .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BC 1000년경부터 쌀이 이 지역의 주식으로서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비록 서쪽지방으로부터 받은 영향만큼 뚜렷하지는 않지만, 고대의 인도는 이 북동부 지방으로부터 받은 영향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 최근 들어 밝혀지고 있다.

인도사의 발아기(BC 1750년 이전)에 관한 사실들은 오로지 고고학적 증거들과 그것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우리는 고고학적 자료에 대한 객관적 평가와 그것의 종합적 검토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는 선사시대(BC 2300 이전)와 인더스 문명시대(BC 2300~1750)로 나누어 기술하는 것이 통례이다.

선사시대의 인도문명

초기 선사시대

인도아대륙에서 인류가 살았던 흔적은 멀리 신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날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여러 가지 고고학적 증거들로 미루어볼 때 이 시기의 수렵인들은 오랫동안 인도대륙에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후대의 정착농경사회와도 밀접한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신석기시대의 유적들은 인도아대륙의 거의 전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서부의 발루치스탄에서 동부의 벵골에 이르는 지역 및 북부의 서북 국경지대에서 남부의 스리랑카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여기서 발굴되는 유물들은 아직 과학적으로 완전하게 규명된 것은 아니지만, 인도문명의 기원에 대한 연구에 새로운 차원의 지식을 제공해주고 있음에 틀림없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시기의 공동체의 삶은 주로 사냥과 채집에 의존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후기에 이르러서는 소·양·물소 등의 가축을 길렀던 흔적도 보인다. 당시의 수렵인들이 사용했던 도구는 활과 화살이 대부분인데, 날카로운 돌조각을 이용한 작살이나 도끼 등도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사냥뿐만 아니라 원시적인 단계의 어로도 병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볼 때 인도아대륙에서는 정착농경사회가 형성되기 이전에도 수렵과 채집생활을 하던 인류의 조상들이 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적지들로서는 케랄라 동쪽 산기슭의 마라이유르, 구자라트의 랑나지, 라자스탄의 바고르, 마디아프라데시 인근의 모샹가바드 등이 특히 유명하다.

인더스 문명


인더스 문명의 주요도시들
수렵과 채집생활의 신석기 단계를 거친 인도아대륙은 점차 인더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정착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이른바 도시문명이 움트게 되는 것이다. 인더스 문명이라고 불리는 이 시기의 도시문화는 세계 4대 문명발상지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 인더스 문명은 BC 4000년경 발루치스탄 고원지대에서 발달하기 시작한 농경문화가 BC 3000년경 인더스 강 유역의 범람지로 확대·발전되면서 본격적으로 꽃피기 시작한 문화이다. 인더스 강 문화는 1922년 영국의 고고학자 마셜 경과 그의 동료학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영국의 지배하에 있던 인도아대륙에서 가장 큰 규모로 시행된 유적발굴조사 결과 이 문명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처음에는 이들 발굴자들도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어떤 문명일 것이라고 막연히 추정했었다. 그러나 얼마 뒤 그런 가정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이 두 문명은 서로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물론 이 문명의 발달과정에서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받은 영향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 문명 자체의 성격은 본질적으로 고유한 것이었음이 고고학적 조사결과 입증되었다.

인더스 문명의 가장 큰 특징은 정연한 도시계획에 있다 . 건물들 사이는 일정한 간격을 둔 바둑판 모양의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골목길 상하 좌우로는 벽돌의 높낮이를 조절하여 사방으로 연결되는 수로를 판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하수도 시설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북방향으로는 성채가 다른 지역보다 다소 높게 건설되었고, 그 아래로는 시가지가 격자 모양으로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칼리방가 지역을 예로 들면 거리의 너비와 모양이 규칙적일 뿐만 아니라 주요도로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금방 알아볼 수 있다. 한편 작은 골목길들은 서로 분기점을 이루면서 각각 크고 작은 블록을 형성하고 있었다. 도시의 기능과 효율성을 이미 고려하고 있었던 것인데, 새삼 이들의 도시계획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시기의 가장 일반적인 건축재료는 벽돌이었다. 구운 벽돌과 진흙 벽돌을 건축물의 사용목적에 따라 각각 구별해서 썼다. 예를 들어 제방이나 대중집회소에는 진흙벽돌을 사용했고, 목욕탕·성벽·수로 등에는 구운 벽돌을 사용했다. 이때 벽돌을 쌓는 방법은 벽돌의 가로면과 세로면을 1번씩 겹치게 하는 이른바 영국식 쌓기를 주로 이용했다. 이 벽돌 외에도 필요에 따라 목재를 사용한 흔적도 발견되고 있다.

당시의 유적지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은 모헨조다로와 하라파이다. 특히 모헨조다로에서는 대중 목욕탕이 발견되어 이 문명의 질적 수준과 함께 당시사람들의 일상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이 목욕탕은 성채의 북쪽 중간지점에서 잘 보존된 형태로 발견되었는데, 약 83㎡ 크기의 벽돌 구조물이었다. 그 내부는 높낮이가 다른 2단의 바닥으로 설계되어 있어, 1단 높은 곳은 옷을 갈아입었던 탈의장으로 추정된다. 한편 목욕탕의 북쪽과 동쪽으로는 일단의 방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서쪽으로는 벽돌로 만든 약 1.5m 높이의 연단들이 보인다. 이러한 구조로 보아 아마도 당시의 지배자였던 정치권력자나 제사자들이 어떤 특수한 목적을 위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즉 이곳은 경건한 종교의식을 행하기 직전에 공동으로 몸을 닦는 일종의 성소(聖所)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

모헨조다로의 북서쪽 12km 지점에 위치한 하라파 지역 역시 모헨조다로와 거의 대동소이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하라파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모헨조다로에서 발견된 유물들과 거의 같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모신상(母神像)·동물상·장의(葬儀)의 풍습이 약간씩 다를 뿐이다. 특히 하라파의 유적 가운데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장례와 죽음에 관한 종교적 사색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일정한 구역에 시신을 그대로 방치하여 들짐승이나 날짐승들의 먹이가 되게 한 다음, 유골만을 다시 추려 항아리 같은 용기에 담아 땅속에 매장했다 . 이른바 조장(鳥葬)의 풍습이다. 여기서 어렴풋이나마 생명의 환생에 대한 하라파인들의 기대심리를 엿볼 수 있다. 즉 그들은 시신을 다른 짐승들의 먹이로 베푸는 보시를 통해 영계(靈界)로의 여행을 돕는 음조(陰助)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인도인들의 종교 성향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으로 꼽고 있는 윤회설의 원시적 형태로도 볼 수 있다. 이 두 지역 외에도 인더스 문명의 유적지로는 칼리방가·로탈 등이 있다.

인더스 문명은 대개 BC 1750년 무렵을 전후하여 파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연대추정이 가능하게 된 것은 최근 과학의 발달로 방사성동위원소를 이용한 연대측정법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이 방법에 따르면 인더스 문명은 BC 2300경~1750년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갑작스러운 멸망의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홍수에 의한 자연재해설, 인구폭발에 따른 식량부족설, 외부의 공격에 의한 파괴설 등 여러 가지 학설이 가정 수준에서 논의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 멸망의 원인이 어디에 있든 이 인더스 문명이 그후의 인도문명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견해를 같이하고 있다.

인도문명의 전개(BC 1750~AD 1200)

아리아인의 침입과 카스트의 정착

모헨조다로와 하라파로 대표되던 인더스 강 유역의 문명이 몰락하면서 인도문명의 중심지는 갠지스 강 유역과 남인도의 해안지방으로 옮겨지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형태의 도시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이 문화의 형성시기를 전후한 인도역사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아리아인의 민족이동과 인도 정착이다. 원래 아리아인은 시베리아 남북부와 투르키스탄 등지에 살던 유목민이었다. 이들은 BC 18, 17세기경부터 서아시아와 중앙 아시아 열대를 가로지르면서 목초지를 따라 민족대이동을 시작했다. 점차 하나의 세력집단을 이루게 된 아리아인들이 인도아대륙에 이른 것은 대략 BC 15~13세기경이었다.

인도에 침입한 아리아인들은 처음에는 펀자브 지역에 정착했으나, 서서히 활동무대를 갠지스 강 유역으로 옮겼다.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농경을 주업으로 하는 정착생활을 영위하게 된 것이다. 당시 인도에는 여러 부족의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드라비다인 등 몇몇 종족만이 확인될 뿐이다. 오늘날의 인도인들은 이 드라비다인과 아리아인의 혼혈이다. 침략자 아리아인들은 원주민과의 전쟁에서 비교적 쉽게 승리했다. 그 이유로는 첫째, 그들이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전쟁에 능했다는 점, 둘째, 문명발달 단계에 있어서 원주민들이 청동기문명 단계에 머물고 있었던 데 비해 이들은 이미 철기문명에 접어들었다는 점, 셋째, 월등한 체격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전쟁에서 이긴 정복민족으로서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아리아인들은 원주민을 노예화했다. 그 우월의식의 사회화가 바로 카스트 제도이다. 카스트 제도란 승려·사제 계급인 브라만(Brahman), 귀족·지배 계급인 크샤트리아(Kshatriya), 평민계급인 바이샤(Vaiya), 노예계급(원주민)인 수드라(Sdra)로 분류되는 신분계급이다. 이들 가운데 브라만과 크샤트리아 이외에는 거의 인격적 대우를 받을 수 없는 철저한 계급사회를 확립시켰다. 특히 수드라의 경우에는 사고팔거나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사회통념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신분제도는 마누 법전에 명기된 이래 인도의 전통적 관습으로 굳어져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도의 근대화를 가로막는 악습이 되고 있다. 브라만은 카스트의 최상위 계급으로서, 신에게 제사드리는 의식을 담당하던 사제 그룹이다. 이는 제정일치를 이상으로 삼던 고대사회에 있어서의 공통된 관습이기도 하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신의 세계를 상정하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그 신의 권능에 의지하려는 습속은 아리아인들의 기본 종교관이었다. 그 신을 찬양하고 경건하게 예배드리는 법식을 집대성한 성전이 바로 〈리그베다 Rigveda〉이다.

아리아인들이 바로 오늘날 유럽 인종의 조상이다. 게르만, 앵글로색슨, 나아가 슬라브에 이르기까지 유럽을 활동무대로 삼고 있는 서양인들의 선조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고 정형화시킨 사람은 비교종교학자인 막스 뮐러였다. 그는 고대의 인도언어인 산스크리트와 근대 영어를 언어학적으로 비교·분석하여 마침내 이와 같은 결론을 도출해냈다. 오늘날 이 학설은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고대 도시국가의 성립


인도(BC 500경)(왼쪽)와 번영기의 아소카 제국(BC 250경)(오른쪽)
펀자브 지역에서 갠지스 강 중류유역으로 진출한 아리아인들은 서서히 도시국가의 형태를 갖추어가기 시작했다. BC 7세기 무렵에는 이미 상당한 세력을 가진 국가들이 나타났다. 이 시기의 국가형태는 정치학적으로 볼 때 부족연맹과 전제왕권의 중간적 성격을 띤 것이었다. 명목상 부족을 대표하는 왕이 있는 나라도 있었으나, 실권은 부족장회의에 있었으며, 왕은 거의 상징적 존재에 불과했다. 이때 번성한 나라들은 주로 갠지스 강의 동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특히 코살라 등이 잘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마가다국은 5만여 부락을 지배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가장 번성했던 나라로 추측된다. 또한 중부인도에 위치해 있던 비데하도 상당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특히 자나카 왕의 통치기에는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한편 카시 왕국은 BC 7세기까지 북부인도의 강자로 군림했으나, 그후 코살라국에 합병되었다. 따라서 북부에는 코살라, 중부에는 마가다, 남부에는 비데하 등이 BC 7세기를 전후한 인도역사의 주인공들이었다.

도시국가의 출현은 필연적으로 상호간의 정복전쟁을 야기시켰다. 이 약육강식의 쟁탈전은 BC 4세기경까지 이어진다. 이런 정복전쟁의 와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마가다 왕국의 왕 빔비사라(BC 582~554 재위)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부족장들을 누르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해나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확장정책을 추구했다. 그는 내치의 공고화와 주변 소왕국들의 합병을 병행하면서 대제국 건설의 기반을 닦아놓았다. 이즈음 훗날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 된 고타마 싯달타에 의해 불교가 일어난다. 빔비사라의 아들 아자타사트루(BC 554~527 재위)는 부왕의 뒤를 이어 계속되는 정복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카시·코살라·비데하 등을 차례로 정복하여 명실공히 인도아대륙의 최강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전성기의 마가다국은 서쪽으로는 야무나 강에서, 동남쪽으로는 칼링가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지배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입(BC 327~326) 때에는 난다 왕조와 더불어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이었다.

마우리아 제국

알렉산드로스의 인도 침입은 인도의 정치·종교·문화·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우선 특기할 만한 사실은 동서문화와 사상이 서로 교류·융합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른바 간다라 예술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조각 양식과 〈밀린다팡하 Milinda-pañha〉 같은 불전이 당시의 대표적 교류 흔적들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알렉산드로스의 침입이 인도 국민의 자각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즉 외부의 침입에 무력했던 인도인들이 이를 계기로 새삼 민족의식에 눈뜨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민족정신의 고양에 힘입어 인도를 통일하게 된 왕이 바로 마우리아 제국의 찬드라 굽타(BC 327~297경 재위)이다. 우선 그는 마가다 지역의 난다 왕조를 무너뜨리고, 알렉산드로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혼란에 빠진 서북인도를 평정했다. 계속하여 그는 인더스 강 유역에서 그리스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결과적으로 그는 오늘날의 카르나타가 남부지역과 아프가니스탄의 일부를 제외한 인도의 전지역을 통일한 셈이다. 이 통일은 인도 최초의 강대국으로서 오랫동안 부를 축적해온 마가다의 경제적 기반이 큰 역할을 했다. 한편 사이슈나가 왕조 이래의 마가다국의 팽창정책이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는 평가도 가능할 것이다. 찬드라굽타의 인도통일은 인도인의 손에 의한 최초의 통일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마우리아 왕조는 이 찬드라굽타로부터 시작된다.

마우리아 왕조는 찬드라굽타의 손자인 제3대 아소카왕(BC 273~232 재위) 때 번영의 절정기를 맞는다. 그는 데칸 동부의 칼링가를 정복하는 등 남인도의 키스트나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시켰으며, 또 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동부까지, 북쪽으로는 카슈미르 및 네팔까지도 자기 영역으로 편입시켰다. 결과적으로 인도반도의 남단부인 타밀 지역을 제외한 전인도가 그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이 광대한 영역은 중앙의 직할지를 비롯해 지방 총독이 관할하는 4구역으로 분할·통치되었다. 각각의 행정부처를 담당하는 다수의 관리가 임명·배치되었으며, 지방관리를 감독·통제하는 순회감사관 제도도 시행되었다. 그 최정점에 있는 왕의 권력은 실로 엄청났다. 이 아소카 왕대에 비로소 제국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즉 완비된 행정조직과 잘 정비된 도로망을 통해 중앙과 지방을 효과적으로 관리·통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아소카 왕은 불교의 보호와 전파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살륙이 빚어질 수밖에 없는 무력전쟁에 회의를 느끼고, 스스로 불법에 귀의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의 가르침을 국가 통치의 기본이념으로 삼았다. 살생금지·비폭력이라는 불교정신에 기초하여 국가를 자비로 다스리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불교의 해외전파에도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들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당시의 비문 또는 석주(石柱)에도 잘 나타나 있다. 불교에서는 그를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추앙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번성하던 마우리아 제국도 아소카 왕의 사후에는 분열과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특히 여러 왕자들이 각자의 영역을 분할 통치함으로써 중앙집권체제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던 점, 그리고 지방마다 서로 다른 화폐와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사회적·경제적으로도 통일제국의 기능을 원활하게 발휘하지 못했던 점 등을 몰락의 원인으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은 유능하고 강력한 군주였던 아소카 왕의 재임시에는 그런 대로 잠재되어 있었으나, 그의 죽음을 계기로 표면화될 수밖에 없었고, 그 여파가 제국의 몰락에까지 이르게 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마우리아 왕조의 분열과 쇠퇴로 인도대륙은 다시 수많은 군소왕국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굽타 왕조


굽타 제국(4세기말)
마우리아 왕조의 인도 지배가 사실상 종언을 고한 뒤에도, 통일제국을 꿈꾸는 군소 왕국들의 부침(浮沈)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마우리아와 같은 대제국을 건설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의 역사가들은 북인도에서 일어난 굽타 왕조(320~540)를 가리켜 불완전하나마 제국의 형태를 갖추었던 나라로 평가하고 있다. 왜냐하면 제국의 기본 골격인 중앙집권체제가 비록 완전하지 못했으나, 그 세력권이 인도 전역에 광범위하게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식에서가 아니라 내용면에서 굽타 왕조는 인도아대륙의 실질적 강자 노릇을 했던 것이다.

굽타 왕조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마가다 지방의 부유한 지주 가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어떤 세력가 집안이 점차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하면서 서서히 왕조 형태를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왕조는 제3대 왕인 찬드라 굽타 1세의 등극을 계기로 비로소 인도역사의 전면에 나설 수 있었다. 사실 그동안은 한낱 지방 공국에 불과했다.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는 한 방편으로 그는 바이살리의 명문 귀족 리차비가(家)의 공주 쿠마라데비와의 결혼을 추진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의미부여를 할 수 있는 사건이다. 왜냐하면 정통적 왕가인 리차비 왕가를 혼인동맹의 상대로 삼음으로써 상대적으로 미미한 가문이었던 굽타 왕조가 그 계급적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찬드라굽타 1세의 등극시기가 320년경이기 때문에 굽타 왕조는 사실상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마가다와 우타르프라데시의 동부지역을 지배했다. 찬드라굽타 1세는 330년에 왕권을 그의 아들 사무드라 굽타에게 넘겨주었다. 다행스럽게도 당시의 상황은 오늘날 알하바드 지역에 해당하는 프라야가에 세워졌던 석주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사무드라 굽타는 델리 주변과 우타르프라데시 서쪽에 있던 4개의 소왕국을 정복했으며, 동인도와 남인도의 군소 왕국들로부터도 충성을 맹세받았다고 한다. 이는 그의 영역이 현재의 마드라스 지역인 칸치푸람의 동해안까지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갠지스 강 서쪽 유역인 아리아바르타 지역의 8명의 왕도 무력으로 평정했다. 결국 그는 북인도의 전역을 합병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합병하지 못한 지역들로부터는 조공을 받아냄으로써 인도아대륙의 실질적인 강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세력이 명실상부하게 인도 전역에 미쳤는지는 의문이다. 비록 세력이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쿠샨 왕조를 비롯한 일부 도서지방은 그들 나름의 일정한 세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 찬드라 굽타 2세는 할아버지인 찬드라굽타 1세의 이름을 딴 군주로 굽타 왕조의 역대 왕들 중에서도 가장 용맹스럽고 영명한 군주였다. 그의 재위 기간은 375~415년의 약 40년 동안이었다. 이 기간 동안 찬드라굽타 2세의 주된 적대세력은 샤카족이었다. 이들간의 세력다툼은 388년 이후 간헐적으로 벌어졌으나, 409년을 고비로 결국 샤카족은 굽타 왕조에 병합되었다. 이것은 서북인도가 완전히 굽타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 서북 지방의 항구도시들은 일찍부터 상업의 중심지로서 지중해 연안의 알렉산드리아와 활발한 무역을 통해 번영을 누리고 있었으므로, 이후 굽타 왕조는 서아시아와 지중해 연안의 여러 나라들과도 문화적 교류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각 지역의 군소왕국들과 혼인동맹을 맺음으로써 그 지배력을 강화시켰다. 한편 찬드라굽타 2세는 문학과 예술의 후원자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중국의 구법승 법현(法顯)이 405~411년에 인도를 여행하고 남긴 〈불국기 佛國記〉에 의하면 당시의 굽타 제국은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문화수준을 간직하고 있었던 나라로 묘사되고 있다. 한 예로 찬드라굽타 2세는 산스크리트 극작가인 칼리다사를 궁정시인으로 둘 정도로 예술을 사랑하고 아꼈다. 이러한 그의 면모는 비크라마디티아(Vikramditya:'용맹의 태양')라는 칭호로 불리던 그의 또다른 모습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렇듯 번영을 누리던 굽타 왕조도 제6대 왕인 쿠마라 굽타(415~454) 때부터, 서북 변경지대를 무대로 활동하던 헤프탈족 등의 잦은 침입으로 서서히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쿠마라굽타는 이들 이민족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켰으나, 그의 뒤를 이은 역대의 왕들은 더이상 이들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의 왕국을 제대로 수호하지 못했다. 더욱이 이런 혼란을 틈타 지역 영주들이 이탈하기 시작했고, 경제적 위기도 가중되어 마침내 굽타 왕조는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후 인도아대륙은 또 다시 대규모의 민족적 이동과 정치적 혼란을 거듭하면서 여러 군소왕국들이 난립하는 시기로 접어든다. 이 때 일어난 나라들이 마우카리·푸시아부티·마이트라카 등이다. 이들간의 각축장에서 푸시아부티가(家) 하르샤 왕이 일정 기간 인도대륙의 지배권을 확보하기도 했다. 한편 남부 인도에서는 900년경 촐라 왕조가 주도권을 잡게 되어 그후 300여 년 동안 이 지역의 강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주변 소왕국들의 압박으로 그 세력은 상대적으로 불안정했다.

굽타 왕조는 인도 고전문화의 부흥기로 불릴만큼 문학과 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 많은 공헌을 했다. 특히 산스크리트로 씌어진 시와 산문이 왕실의 후원에 힘입어 활발하게 저술되었다. 이때 활약했던 칼리다사 등은 오늘날에도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당대의 최고 극작가였다. 뿐만 아니라 조각과 건축물 등의 조형물에서도 최고도의 수준에 달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나, 불행히도 당시의 건축물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다만 불교의 승원(僧院 vihara)과 예배소(chaitya) 등이 전해져 내려올 뿐이다. 그 이유는 8세기에 인도를 침입한 이슬람 세력의 철저한 파괴행위 때문이다. 불교와 힌두교도 이 시기에 널리 장려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힌두교는 그 세력을 점차 인도 전역으로 확대시켜 나가지만, 불교는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슬람 시대(1200~1680)

델리 술탄국

10세기말에 접어들면서 인도대륙은 투르크와 아랍계 이민족들의 잦은 침입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때 인도를 침입하여 유린한 대표적 세력이 가즈나의 마흐무드와 그의 사후 혼란기를 틈타 가즈나를 타도, 지배하게 된 구르 왕조의 무하마드 등이다. 이들은 인도를 공격하여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탈취하는 데만 관심을 두었다기보다는 인도대륙 전체를 그들의 지배하에 놓으려는 원대한 야망을 품었다. 이의 한 방편으로 투르크와 아랍계 아프가니스탄인들은 델리에 그들의 왕국을 건설하고, 인도인들을 그 지배하에 두었다. 델리는 갠지스 강 유역과 중부·서부 인도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아프가니스탄으로 통하는 길목이기도 했다. 이때문에 투르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여러 세력들은 번갈아가면서 델리에 왕국을 세우고 술탄(sultan:이슬람의 왕)임을 자처했는데, 이들 왕조를 델리 술탄국이라고 부른다. 이 왕조는 13세기부터 16세기 무굴제국이 들어서기까지 북인도역사를 주도했다.

쿠트브 웃 딘 아이바크는 이슬람교도 지배자로서는 최초로 델리에 웅대한 궁전과 모스크(이슬람 사원) 및 거대한 탑(minar)을 세웠다. 그는 북인도를 더이상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확장으로 보지 않고 델리를 수도로 하여 인도에 본격적인 이슬람 정권을 세웠다. 이 왕조는 그 후계자들이 쿠트브 웃 딘과 마찬가지로 투르크계 궁정 노예 출신이거나 그 직계 자손들이므로 노예왕조(1206~90)라고도 불린다. 그의 아들 일투트미시는 술탄의 위치를 더욱 강화하고 불만세력이던 투르크계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켰다. 대외적으로는 1220년에 인더스 강 유역의 북부 변경지방을 병합하고, 그 지역의 귀족들로부터 충성을 서약받았다. 나아가 그는 1225년에는 벵골을, 1228년에는 신드 지방을 각각 점령했으며, 1229년에는 마침내 바그다드의 칼리프로부터 정식으로 술탄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러나 이 왕조는 1229년부터 몽골군의 침입에 시달리다가 1241년 서부 펀자브 지방을 잃게 되자 그 위세가 꺾였다.

노예왕조에 이어 1290년경부터 인도역사에 등장하는 또다른 투르크계 세력집단이 할지 왕조이다. 이 왕조는 알라 웃 딘 치세에 이르러 세력팽창의 절정기를 맞았다. 그는 동인도와 데칸을 성공적으로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1292년에는 야다바가 지배하고 있던 데바기리까지 공략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그는 남인도까지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품었다. 1306년 국내문제로 몽골 세력이 북인도에서 물러나자 구자라트와 말와를 수중에 넣었다. 나아가 그는 1310년 마침내 남인도를 원정하여 여러 지역을 성공리에 공략했다. 이제 알라 웃 딘의 영향력은 지배영역에 있어서나 그 세력에 있어서 어느 술탄국 지배자들보다도 강력했다. 그러나 알라 웃 딘의 야망은 북인도의 반란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북인도의 구자라트·치투르·데바기리 등이 술탄국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을 선포했는데, 그도 1316년 죽음을 맞게 되었다. 알라 웃 딘의 사후 몇 년 동안은 계속 왕이 바뀌어 할지 왕조는 혼란에 휩싸였다. 그때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기야스 웃 딘 투글루크이다. 그는 1320년 술탄의 자리에 올라 투글루크 왕조를 열었다. 이 왕조도 역대 왕조들과 마찬가지로 통일제국을 꿈꾸었으나, 1398년 중앙 아시아의 몽골군이 티무르의 지휘하에 인도를 다시 침입하기 시작하자 그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후 인도에서는 티무르의 위임을 받은 사이이드 왕조와 그 뒤를 이은 로디 왕조 등이 명멸을 거듭하게 되고, 각 지역의 군소왕국들이 술탄국의 세력 약화를 틈타 난립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바마니 왕조와 비자야나가르 왕조

한편 남인도에서는 그들을 정복하려는 술탄국의 원정을 여러 차례에 걸쳐 성공적으로 격퇴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세력기반을 갖춘 왕조들이 나타났다. 우선 13세기말 후부터 200여 년 동안 북부 데칸을 지배한 바마니(1347~1527) 왕조가 있다. 또한 이 바마니 왕조보다 10여 년 먼저 한때 호이살라가 지배했던 남부데칸의 인도 남부에서는 비자야나가르(1336~1646) 왕국이 독립했다. 비자야나가르는 힌두 왕국으로, 1565년 1월 이슬람 연합군에게 패할 때까지 남인도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바마니와 비자야나가르의 경계선은 크리슈나 강이었다. 거의 전통이 되다시피 한 데칸과 남인도의 상호 정복전쟁은 14세기에 재개되었다. 이 영토쟁탈전은 비옥하고 광물자원이 풍부한 라이추르도아브 지역을 서로 차지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필연적인 결과였다. 거기에다 골콘다의 다이아몬드 광산도 서로 탐내는 지역이었다. 14~16세기초에 남인도 역사는 실로 이러한 투쟁과 여러 군소왕국들의 정치적 변화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고려해볼 때 비자야나가르와 바마니 사이의 대립과 반목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1358년부터 시작된 라이추르도아브 쟁탈전은 그후 양국의 세력 판도에 따라 정복함으로써 남부 변경지역을 평정했으나, 동쪽의 해안국들과 오리사·와랑갈 등에 대한 지배력은 전보다 약화되었다. 나아가 비자야나가르가 고아 지방을 정복한 것은 무역을 통한 이익증대를 떠나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끝내 동부 해안지역을 장악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이 지역의 절대 강자로 부상하지는 못했다. 이유는 급변하는 남인도의 정세와 바마니의 적극적인 개입 때문이었다.

반면 바마니 왕국은 15세기 후반부터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국내외적 정치상황에 대처했다.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이 총리 마흐무드 가반이다. 그는 우선 구자라트의 도움을 받아 북부 변경지대에서 말와 세력을 축출했다. 이를 바탕으로 가반은 비자야나가르로부터 고아를 재탈환함으로써 무역활동을 통한 세입을 더욱 늘릴 수 있었다. 그러나 가반이 반대파의 암살로 제거되면서, 왕국의 힘은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바마니의 국력은 비자야나가르의 잦은 침입으로 더욱 약화되었다. 1538년 바마니 왕국은 마침내 비자푸르·골콘다·아메드나가르·비다르·베라르 등의 5개 나라로 분열되었다. 가반의 죽음을 계기로 바마니 왕국이 쇠잔해져 갈 즈음 비자야나가르는 상대적으로 남인도에서의 지배력이 강화되었다. 특히 크리슈나 데바 라야(1509~30)의 재위시에는 그 위력이 대단했다. 그러나 이 비자야나가르도 1565년 탈리코타 전투에서 북부 데칸의 이슬람 연합군에게 패함으로써 종말을 고했다. 이후 남인도의 힌두 왕국들은 끝내 세력을 회복하지 못한 채, 남인도를 침식해 들어온 이슬람 왕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슬람교도 세력이 제국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 바로 무굴 제국이다. 이 기간 동안 인도아대륙에서는 이슬람 문화와 힌두 문화가 서로 융합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탄생과 결혼, 그리고 죽음에 관련되는 여러 종교의식이 서로 혼합된 것은 그 한 예이다.

무굴 제국(1526~1761)

무굴 제국의 성립과 악바르 대제


무굴 제국의 발전
무굴 제국의 기원은 1398년 인도를 침입한 티무르까지 그 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왜냐하면 그의 후예 바부르(1483~1530)가 훗날 무굴 제국의 시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티무르가 그때부터 이미 인도아대륙을 지배하려는 어떤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는 사이이드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 인도아대륙에 그의 영향력을 심어 놓았을 따름이다. 무굴 제국은 이 티무르의 5대손인 바부르가 여러 해 동안의 시련과 도전을 거친 끝에 비로소 그 기틀을 마련하게 된(1526) 왕조이다.

무굴 혹은 투르크계 몽골 족장인 바부르가 인도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517년 무렵이다. 그러나 바부르는 어릴 때부터 한때 그의 선조들의 땅이었던 북부인도를 회복하려는 집념에 불타기 시작했다. 그의 이런 야망은 사마르칸트 지역을 되찾으려는 노력들로 나타난다. 하지만 1491, 1503년 2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모두 패함으로써 그의 꿈은 실패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러던 그가 다시 영토회복에 자신을 갖게 된 것은 1504년 아프가니스탄의 중심지 카불과 간다라를 점령하고 나서부터이다. 이를 계기로 그는 산을 가로지르는 이들 두 지역과 바다흐샨을 연결하는 지역을 그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그는 이 지역의 확보를 그 옛날 티무르의 영토였던 사마르칸트를 회복한 것에 비유할 만큼 영광스러운 일로 여겼다.

한편 바부르는 1526년 4월 로디의 마지막 술탄이었던 이브라힘과 델리 근교의 파니파트에서 접전을 벌여 수적으로 훨씬 우세했던 이브라힘의 군대를 격파하고, 이들 세력을 그 지역으로부터 몰아냈다 . 바부르는 이 승리를 발판으로 델리에서 아그라로 곧바로 진격, 스스로 인도의 파드샤(역대 무굴 왕들의 칭호)임을 내외에 선포했다. 그러나 오랜 전투와 무더위에 지친 병사들은 그들의 고향 아프가니스탄으로 되돌아 가기를 원했다. 이때가 바부르에게는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특유의 호소력으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었을 뿐만 아니라, 무굴에의 충성을 간절히 설득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지도력으로 이 위기의 순간을 무사히 넘겼다. 그러자 이번에는 메와르의 라나 상가가 라지푸트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 이때도 그는 군사력에 있어서의 열세를 결연한 의지로 극복하고, 라지푸트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의 종족분열과 무굴 기병대의 신속한 전술이 승리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후 바부르는 파트나 근교의 고굴 지역에서 아프가니스탄군을 패퇴시키고 비하르 지방을 직할령으로 삼았다. 또한 벵골의 이슬람 술탄으로부터도 충성을 확인받았다. 이제 그는 서쪽의 야무나 강으로부터 바다흐샨과 카불을 거쳐 동쪽은 벵골, 남쪽은 나르마다 강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는 대제국 무굴의 초석을 닦은 동시에 그 시조가 되었다.

무굴 제국의 발판을 마련한 사람이 바부르였다면 이 왕조를 명실상부한 대제국의 위치로 끌어올린 사람은 악바르(1542~1605)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뛰어난 군사 책략가였다. 악바르는 자신에게 주의를 집중시키는 인간적 흡인력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략을 수립하고 결정하는 상황판단이 뛰어났으며, 나폴레옹에 버금가는 신속한 기동력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의 이런 지도력에 힘입어 무굴 제국은 1605년 그가 죽을 때까지 북인도의 전지역을 지배하게 됨으로써 데칸과 벵골 만 및 아라비아 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한편 그는 현명하게도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제국의 백성들을 위협하여 복종하게 하기보다는 결혼정책이나 종족간의 타협을 통해 힌두의 여러 세력들을 무굴 제국의 실질적 동반자로 흡수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점에서 악바르는 무굴 제국의 전성기를 연 위대한 황제이자 힌두 문화와 이슬람 문화의 실질적 융합에도 공헌한 훌륭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무굴제국의 쇠퇴


인도 무굴 제국 쇠퇴기의 루피 은화, 지름 30㎜, ...
악바르 대제가 주변 세력들을 적절히 제어하고 제국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국제정치 역학상 일종의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예로 페르시아 세력은 중앙 아시아로부터 들어오는 유목민의 침입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주었으므로 무굴이 남인도를 제압하는데 안정적 기반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무굴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프가니스탄 세력을 견제함으로써 페르시아가 서쪽의 오스만 투르크와 접촉하는 데 있어서의 불안요소를 상당부분 해소했다.

그러나 악바르의 사후, 무굴 제국은 자한기르(1605~27)·샤자한(1628~58)·아우랑제브(1658~1707) 등의 치세를 거치는 동안 대외적으로는 힘의 균형이 깨졌고, 대내적으로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반목이 재연되면서 분열의 조짐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특히 마라타족의 흥기는 무굴에게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이들은 마하라슈트라 지방을 본거지로 활동하던 강인한 전사(戰士) 집단이었다.

마라타인들은 매우 지적이고 배타적인 소수의 브라만과 다수의 농노 계층인 수드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마라타인들은 그들의 영웅 시바지(1627~80)를 중심으로 일치 단결하여 무굴로부터 독립을 쟁취했을 뿐만 아니라 세력을 고츠 산맥을 따라 서서히 남북으로 확대하기 시작했다. 이후 더욱 세력을 키운 마라타족은 1738년 드디어 무굴 제국의 심장부인 델리 근교를 공격하기에 이르렀고, 말와 지방을 점령했다. 이로써 마라타 세력은 인도대륙의 한 부족국가의 위치에서 벗어나 전인도 대륙을 넘볼 수 있는 위치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렇듯 강성해진 마라타도 1761년 7월 파니파트 대평원에서 마주친 아프가니스탄 군대에 대패함으로써 더이상의 세력 확장에 제동이 걸렸다 . 이후 북인도는 아프가니스탄과 마라타 및 쇠퇴일로를 걷고 있던 무굴 제국 등이 일종의 힘의 공백기를 맞으면서 혼란과 분열을 거듭했다. 이 혼란의 와중에서 인도대륙을 넘보기 시작한 세력이 유럽 열강들이었다.

유럽의 팽창과 인도(1500~1858)

유럽 제국의 인도 진출(1498~1760경)

유럽은 인도에 대해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유럽이 필요로 하는 향료와 직물 및 그외의 진기한 동양상품들이 인도에서 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즉 상업적 이익 때문에 인도는 유럽의 주요 관심대상이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향료는 특히 중요한 상품이었다. 향료는 고기의 부패를 막아주는 작용이 있어, 육류를 즐기는 유럽인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생활필수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도와 유럽 간의 무역은 중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2가지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몽골과 투르크의 침입으로 인도와 유럽을 연결하고 있던 육로가 차단되었고, 나아가 이집트를 통과하는 해로까지 위협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당시의 국제적 긴장관계는 이슬람 세력의 타도를 위한 십자군의 원정과 향료를 독점하려는 상업적 열망을 더욱 부채질했고, 마침내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 포르투갈인들은 월등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곧 아랍 상인들을 제압하고 향료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다.

그후 포르투갈의 천재적 영웅 아포노 알부케르케는 비자푸르의 술탄으로부터 인도의 서안지방인 고아를 탈취하여(1510) 이곳을 동방 포르투갈령의 수도로 삼았다. 결과적으로 인도대륙에 최초로 발을 들여 놓은 유럽 세력은 포르투갈인 셈이다. 하지만 얼마 뒤 포르투갈은 1세기 동안이나 대립관계에 있던 스페인에게 점령당함으로써(1580) 스페인이 포르투갈에 이어 인도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의 유럽 열강들이 차례로 인도에 들어와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무역독점 경쟁에 나섰다. 특히 세계무역을 지배하려는 영국과 프랑스 간의 각축전은 치열했다. 그러나 7년전쟁에서의 패배에 이어 카르나티크 전쟁(1744~48, 1750~54, 1758~63) 및 플라시 전쟁(1757)에서도 프랑스가 영국군에게 대패함으로써 제국간의 식민지쟁탈전에서 약자의 위치로 전락했다.

식민지 지배의 확대

카르나티크와 벵골의 지배권 확보에 성공한 영국은 이를 발판으로 점차 인도아대륙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각 지역 세력집단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그중에서도 남부인도의 마이소르는 인도의 장래에 미칠 영국의 위협을 누구보다도 일찍이 감지하고, 이에 대비한 여러 가지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와의 동맹을 꾀하는 한편, 국내외의 여러 나라와 연락을 취해 우방 확보에도 힘을 쏟았다. 동시에 대내적으로는 군대의 근대화와 함께 내정개혁도 단행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당시의 어수선한 인도 정치상황을 고려해볼 때 극히 이례적인 참신한 개혁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이소르의 노력도 주변 국가들의 외면과 영국군의 침입(1799)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영국은 하이데라바드와 마라타와의 동맹관계로 인해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던 마이소르를 간단하게 격파해버렸던 것이다 . 이때 그들의 영웅 티푸(1782~99 재위)도 세링가파탐 전투에서 진두 지휘를 하다가 전사했다. 전쟁 후 마이소르의 옛 영토는 대부분 영국과 하이데라바드 및 마라타에 분할 병합되었다. 이 보다 앞서 1798년에는 마라타의 성장에 위기감을 느낀 하이데라바드도 영국과 군사보호조약을 맺음으로써 이 나라 또한 실질적으로는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있었다.

한편 북인도에서는 마라타 동맹과 시크 세력이 영국에 대항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당시 영국의 인도 총독이었던 워런 헤이스팅스는 마라타의 위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우선 그는 오우드를 강화하는 정책을 펴 비대해진 마라타 세력을 견제하려고 했다. 그의 이런 정책이 가시화된 것이 이른바 로힐라 전쟁(1774)이다. 1774년 영국군의 원조하에 오우드군은 로힐칸드를 무력 침공하여 이를 병합했다. 이를 계기로 오우드는 마라타와 영국 세력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담당하면서 동시에 영국의 세력하에 놓였다.

영국이 오우드를 강화함과 동시에 이를 속국화하려 하고 있을 때, 마라타 동맹은 내부적으로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1772년 이후의 페슈와(Peshwa:총리) 계승문제를 둘러싼 내분은 매우 심각한 양상으로 비화되었고, 마침내 영국과 프랑스 등 외부세력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른바 제1차 마라타 전쟁(1775~82)이 시작된 것이다. 이 전쟁은 그 성격상 유럽 열강과 토착세력 간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시작되고 있던 마라타 동맹의 내분에 외국세력이 가세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호시탐탐 인도 국내문제에 개입할 빌미를 찾고 있던 영국측으로서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전쟁에 참여한 대가로 영국은 전략 요충지 살세트 섬을 얻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라타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보다 확고히 할 수 있었다. 그후에도 마라타 동맹은 페슈와 후계 문제를 둘러싼 각 세력집단간의 갈등으로 또다시 영국의 개입을 불러들였고(제2차 마라타 전쟁:1802~05), 마침내 1818년 마지막 남은 홀카르가도 영국과의 군사보호조약을 받아들임으로써 마라타 동맹은 사실상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편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인더스 강 유역의 카슈미르·펀자브·신드 등도 19세기 전반에 이르러 모두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신드 병합(1843. 8)이 이루어질 때까지만 해도 유일한 독립국의 체면을 유지하고 있던 시크 왕국도 란지트 싱의 죽음을 계기로 야기된 후계자 다툼의 와중에서 영국의 재물이 되었다. 1·2차 시크 전쟁(1845~46, 1848~49)에서 내부 분열 끝에 영국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인도의 거의 전지역이 영국령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18세기 중반부터 100년이 채 안 되는 시기에 영국은 거대한 인도대륙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영국의 지배와 인도사회(1858~1920)

폭동과 반란(1857~59)

영국의 인도 지배가 점차 확대되어가면서 그들에 대한 반감이나 분노도 이와 비례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 우선 종래의 기득권을 상실하게 된 왕가(王家)나 지방 세력가들의 불만이 조직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영국식 합리주의의 도입은 인도의 전통적인 관습이나 생활양식을 전근대적인 것으로 몰아붙여 인도인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이 인도 사회 전반에 스며든 반영(反英) 분위기는 자연 발생적으로 다양한 성격의 폭동이나 반란을 야기하는 결과를 빚었다. 그동안 크고 작은 반란이 끊이지 않았으나 1850년대에 들어와서는 그 횟수가 더욱 빈번해지기 시작했고, 무엇인가 커다란 파국을 예고하는 듯했다. 이런 긴장된 분위기에 드디어 불을 당기는 사건이 일어났다. 용병 세포이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들은 평소 민족적 자존심이 강했을 뿐만 아니라 대우 문제 등을 둘러싸고 영국인과 충돌이 잦았었다. 1857년 5월 마침내 메루트의 세포이가 폭동을 일으켜 이 지역의 영국 세력을 몰아내고 델리로 진격했다. 델리에서는 성 안의 세포이와 시민이 성문을 열고 이들을 맞이함으로써 순식간에 반란군은 이 도시를 점령해버렸다. 그들은 명목뿐이던 무굴 황제를 다시 옹립하고 그의 통치 부활을 안팎에 선언했으며, 그의 이름으로 전국 각지에 반란 동참을 호소했다. 이렇게 하여 델리에서 독립의 횃불이 솟아오르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반란은 인도의 전지역으로 확산되어갔다. 이제 반란은 단순한 세포이의 폭동 수준을 훨씬 넘어서서 농민과 일반 시민 등 전사회계층이 참여하는 형태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특히 오우드의 러크나우와 칸푸르가 그 중심지였는데, 불과 몇 개월 사이에 반란은 북부·중부 인도뿐만 아니라 그밖의 여러 지역으로 비화되어, 영국의 인도 지배는 바야흐로 붕괴에 직면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반란군측에도 많은 약점이 있었다. 우선 반란군은 뚜렷한 구심점이 없었고, 효과적인 전략이나 지휘체계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단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각자의 불만과 분노 때문에 모여든 감정적 집단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그들을 하나의 목표 아래 결속시킬 만한 지도력이나 서로간의 유대감도 희박했었다. 이에 반해 영국측은 1857년 여름에 접어들면서 초기의 낭패감에서 벗어나 전력을 재정비하고, 이들을 진압할 구체적 행동에 들어갔다. 상대적으로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반란군은 곧 전투의 주도권을 영국군에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고, 9월에 들어 델리를 다시 빼앗겼다. 이때 자행된 영국군의 파괴와 학살 행위는 그 참혹함으로 유명하다. 델리에 이어 영국군은 칸푸르를 함락시켰고, 얼마 동안의 소강상태를 이용해 네팔 왕조에 원군을 요청했다. 반면 반란군측은 차츰 내부 분열에 휩싸여 내적 통일성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마침내 반란군은 1858년 3월 캠벨이 지휘하는 7만명의 영국·네팔 연합군에 속수무책으로 격파되었다. 이렇게 하여 반란군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러크나우마저 함락되었다.

이 반란은 식민지 지배에 의해 초래된 많은 문제점들이 이른바 연쇄반응적으로 폭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궁극적으로는 방향을 상실했고, 시대착오적인 왕정복고를 꿈꾼 측면도 없지 않았으나, 적어도 식민지 지배에 대항할 민족주의적 반항의 씨앗이 여기서부터 싹트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만 보더라도 이 사건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녔다. 이 반란이 수습된 후 이른바 ' 인도 통치법'(1858. 8)이 발효되었다. 일종의 유화정책을 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법의 시행에 따라 인도인들도 관공서의 주요직책을 맡을 수 있는 길이 열렸고, 또한 인도의 전통적인 제도나 관습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정치적으로는 그간 악명을 떨치던 동인도회사가 문을 닫았고, 영국 국왕에 의한 직접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를 위해 내각에는 인도 담당 국무장관이 새로 임명되었고, 그 하부기관으로 15명으로 이루어진 인도 참사회가 구성되었다.

민족주의 운동의 대두

영국인들의 지배가 확대되고 견고해질수록, 다른 한편으로 인도인들의 민족의식도 깨어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인도인들의 국정 참여 범위를 확대시켜달라는 정도의 소박한 요구에 지나지 않았으나, 점차 종교와 사회 전반의 개혁운동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최초의 종교·사회 개혁 운동은 벵골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브라마 사마지(Brahmo Samaj)이다. 일종의 종교적 결사체인 이 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람모한 로이이다. 그는 벵골의 비슈누파 브라만가에서 태어난 정통 힌두교도였으나 이슬람 및 서구 사상도 공부했다. 특히 그는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아 힌두교에 일신교적 색채를 부여한 흔적이 보인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힌두교도의 전통적 관습 및 종교의례 등에 대해서도 일대 개혁을 시도했다. 유아혼(幼兒婚)의 폐지와 교육의 기회 균등, 이혼의 자유, 과부의 지위 개선 등 불합리한 사회제도 및 관습 전반에 대해 비판하고 나아가 철폐를 요구했다. 이와 함께 그는 카스트 제도의 철폐도 강력하게 주장했다. 브라마 사마지는 이후 데벤드라나트 타고르(1817~1905)와 케샤브 찬드라 센(1838~84) 등을 지도자로 받아들여 교육의 기회 개방, 병원 등 후생시설의 건립 및 그밖의 사회봉사 사업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그 활동은 오늘날까지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을 정도이다. 이와 유사한 사회 개혁단체로 구자라트 출신의 다야난다 사라스바티(1824~83)가 주도한 아리아 사마지(Arya Samaj)가 있다. 그는 브라마 사마지가 그리스도교적 영향을 받았던 데 비해 고유의 힌두교로 복귀할 것을 주장하고,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인도인들의 종교 순화에 힘썼다. 아리아 사마지도 종교개혁뿐만 아니라 사회개혁, 특히 교육수준의 향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운동은 인도 고대문화에로의 복고적 성향 때문에 민족주의적 저항을 뒷받침하는 사상으로서 훗날 인도의 정치·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밖에도 같은 경향의 운동단체로서 베단타 철학을 기초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사상을 접목한 라마크리슈나 선교회, 미국에서 설립되었으나 인도의 사회사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신지학협회 등이 있다. 이들의 개혁운동은 종교적 배경과 그 추구하는 이념이 같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모두 종래의 화석화된 힌두교 교의와 전근대적인 사회 관습을 개혁하는 방향으로 실천되었다는 점에서 동일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더욱이 이들은 대부분 인도 고전사상의 재인식과 부활을 강조함으로써 인도의 일체화를 꿈꾸고 있던 도시의 중간계층이나 지식인들의 민족의식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점에서도 이들의 활동은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러한 인도인들의 각성은 그뒤 마하트마 간디(1869~1948)를 그들의 민족지도자로 맞이하게 되면서 새로운 활력과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는 오늘날 인도 독립의 아버지이며 국부(國父)로 전세계적인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비폭력무저항주의(ahims)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혼란기 인도의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였던 간디의 사상은 그 후계자인 네루의 평화사상으로 계승되었다.

사회적·문화적 변화

18세기말부터 시작된 유럽열강들의 인도 진출은 경제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문화 등 사회의 전분야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다. 특히 그후 인도의 실질적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는 영국인들의 직접적·간접적 영향은 실로 지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인도인들의 언어나 생활관습의 변화까지도 초래할 만큼 본질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영국인들의 진출 거점이었던 캘커타·봄베이·마드라스 등을 중심으로 영어를 배우고 서구식 사고를 겸비한 신중간계층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교육·종교·저널리즘 및 사상에 있어서도 영국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 이들은 영국식 교육을 받고 그리스도교 사상에도 접할 수 있었던 만큼 비교적 합리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한편 사회제도가 근대화되고 각종 관공서·재판소·학교 등이 생겨나면서 이에 필요한 인력의 양성도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다시 말해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현지 인도인들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결과 변호사·의사·교사 등의 직업에 서구식 교육을 받은 젊은 계층이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물론 사회조직의 최상층부는 영국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종 특권과 사회적 혜택을 누렸다. 차츰 인도인들도 자신들의 한계와 민족적 일체감의 필요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분명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민족운동의 저변에는 이러한 신교육세대 및 새로운 직업계층의 인도인들 사이에 싹트기 시작한 민족적 동류의식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영국식 교육을 받은 이 신교육세대가 중심이 되어 훗날 반영 민족주의운동이 태동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또한 이들 중에서 장래의 인도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된 것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간디·네루 등의 예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인도인들은 영국으로부터 받은 사회적·문화적인 영향이 적지 않았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고유문화와 사상을 간직하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늘날 인도가 현대와 고대를 함께 간직하고 있는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게 된 것도 이와 같은 인도인들의 가치관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인도의 독립

영국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1914~18)에 협력하는 대가로 인도인들에게 자치를 약속했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그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이에 자극받은 인도인들은 범국민적인 반영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 선두에는 간디가 서 있었다. 영국제품 불매운동, 물레의 장려 등으로 상징되는 그의 무저항비폭력주의는 전인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인도인들은 조국애로 뭉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간디의 민족주의운동은 본격적인 독립운동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영국은 강압정책을 병행하면서도 차츰 인도의 자치를 허용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꾸어갔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전인도의 연방화를 논의한 원탁회의(1930~32)와 뒤이어 공표된 1935년법 등이다. 이 법은 전인도의 연방제 지방자치의 허용 등을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연방제의 구상에 대해 인도 국민회의측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 이유는 시민적 자유와 각 지역을 대표할 책임정부 및 연방입법부의 선거방법도 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의 일방적 영토 편입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외교와 국방에 대한 권한도 주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실질적인 자치권의 확보와는 아직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 법의 시행을 둘러싸고 인도 전역에서는 소요가 끊이지 않았고, 각 정파간에도 알력이 심화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국내외적 여건은 인도의 독립에 밝은 빛을 던져주기 시작했다. 우선 영국의 정권 교체와 이에 따른 정책 변화를 들 수 있다. 영국은 1945년의 선거에서 보수당이 퇴진하고 노동당이 새로 정권을 잡았다. 노동당은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펴기 시작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인도의 독립문제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냈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그간 분열되어 있던 민족주의운동 단체들이 인도 국민회의를 중심으로 영국측에 더욱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들이 인도의 독립을 점점 재촉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영국의 애틀리 정부는 1947년 2월, '1948년 6월 이전에 책임 있는 인도인 단체에게 권력을 이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제안에 대해 이슬람교도들은 파키스탄 독립국을 요구함으로써 그들을 제외한 국민회의파 중심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 수반은 네루가 맡았다. 그러나 여기에 반대하는 이슬람교도들은 전국 각지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힌두교도들과의 충돌은 날이 갈수록 격화되었다. 사상자도 7,000여 명에 달했다. 결국 1947년 8월 15일 인도에는 2개의 공화국, 즉 인도공화국과 파키스탄 공화국이 동시에 탄생하게 되었다. 비록 과도기적 임시정부 형태였지만 3년후인 1950년 인도는 완전 독립했다. 한편 파키스탄은 1956년 이슬람 공화국을 선언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까지 이 두 나라는 민족적인 갈등과 종교문제로 끊임없는 분쟁에 휩싸여왔다.

1950년 1월 인도는 신헌법을 시행해 주권재민의 연방제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연이어 제1회 총선거가 소선거구제로 실시되어 국민회의파는 여당으로서의 지위를 다시 굳혔다. 1951년 4월에는 제1차 5개년계획이 시작되어 토지개혁의 추진과 함께 공업화계획이 본격화되었다 . 제1차 5개년계획은 농업 면에서 큰 성과를 얻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내정 면에서 주목받는 것은 1955년 1월에 시작된 국민회의파대회에서 인도가 달성해야 할 목표로서 '사회주의형 사회'가 설정된 점이다. 독립 인도의 국가건설은 그 내용에 대해서는 엄밀히 논의되어야 하겠지만 사회주의를 지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네루 정권은 대외적으로 비동맹외교정책을 내걸었고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평화5원칙을 고수했다. 1955년 4월에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개최된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서 네루는 이집트의 나세르와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과 지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독립 인도의 국가건설은, 제2차 5개년계획의 개시(1956)로 공업화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언어별 주(州) 재편성의 도입(1956)으로 하나의 전기를 맞이했다. 인도가 많은 언어와 민족으로 구성된 이상 언어별 주행정구역의 확정은 인도의 발전에 불가결한 요소였다.

독립 인도의 정치사는 1957년 제2단계를 맞이했다. 즉 제2회 총선거로 신설된 게랄라 주에서 인도공산당이 제일당이 되어 몇몇의 다른 좌익정당과 연합해 주 정부를 장악한 것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좌익성향의 게랄라 주정부는 1959년에 대통령중심제가 도입될 때까지 정권을 유지했으며, 국민회의파 중앙정부가 내건 정책의 혁신적 부분을 실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네루를 선두로 하는 국민회의파는 이 '좌익정권'의 타도에 전력을 기울였고 대외적으로도 티베트 문제에 대해 내정불간섭원칙을 버렸다. 1962년에 인도와 중국 국경에서 발생한 군인간 무력충돌 결과 인도군의 패배는 네루의 정치적 위신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인도의 제2차 5개년계획도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 1964년 네루의 사망은 인도의 한 시대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67년 인도정치는 전독립 인도사에서 전환점을 맞이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해 제4회 총선거의 결과 종래의 연방과 여러 주를 장악한 국민회의파의 일원적 지배체제가 무너지면서 연방은 네루의 딸인 인디라 간디가 이끄는 국민회의파가, 주는 좌파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통일전선정부가 서벵골과 게랄라의 두 주에서 정권을 장악했다. 또한 타밀나두 주에서는 드라비다 진보연맹이 국민회의파를 누르고 주정부를 장악했다. 이에 대해 인디라 간디 총리는 강권정치를 도입함으로써 위기를 타개하고자 모색했다. 즉 인권탄압과 주 자치의 핵심을 제거하는 것이 그녀의 기본전략이며 관리의 부정부패, 인플레이션, 생활불안이 만성화하는 가운데 1975~77년 비상사태선포를 강화해 인도의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1977년 제6회 총선거 결과 독립 후 만년 여당이던 인디라 간디 총리가 이끄는 국민회의파가 처음으로 패배하고 대신 자나타(인민)당이 정권을 잡았다. 자나타당에 거는 민중의 기대는 컸다. 그러나 자나타당은 비상사태 이전으로 정치를 되돌린다는 의지가 약했다. 자니타당은 애초부터 당내의 권력투쟁에 시간을 허비하며 자멸의 길을 걸었다. 마침내 1978년 인디라 간디가 정계로 복귀했고, 1980년 제7회 총선거에서 재집권했다. 기적적으로 정계로 복귀한 인디라 간디 총리는 이전처럼 강권정치를 속행했다. 1980년대 펀자브 주의 시크교도는 일제히 국민회의파 중앙정부에 반대하는 운동을 강화하고 있었다. 녹색혁명의 모범적인 주로 간주된 펀자브 주가 농업 중심의 주로 고정되어 공업투자가 보류되자 시크교도들 사이에는 카스트 신분제도의 고하를 막론하고 불만과 분노가 쌓여 있었다. 1984년 6월 시크교도 가운데 일부 과격파가 굳게 버티고 있는 시크교도 총본산에 대한 정부군의 무력진압은 같은 해 10월에 발생한 인디라 간디 총리 암살의 도화선이 되었다. 새 총리에는 그녀의 맏아들인 라지브 간디가 취임했다. 국민회의파 정권은 외국자본의 지원을 받으면서 국내의 독점 부르주아 계급과 지주계급을 기본적인 지지세력으로 삼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또다른 혁신정책이 마련되지 않아 이들은 국민회의파에서 유능한 인재가 배출되는 것을 견제하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국민회의파가 펼친 정치적 현실이 인도의 모든 정치적 현실은 아니다. 1967년 이래 인도정치의 다원적 지도와 민주화의 진행은 서벵골 주에 나타난 바와 같이 좌파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전선정부의 지속적인 정치활동으로도 확인된다. 서 벵골 주 민중의 생활향상과 민주화에 대한 확대된 요구는 인도정치에 발전과 활성화를 가져다준 계기가 되어 전인도인에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1989년에 네루 일가(인디라 간디와 그 아들 라지브 간디)의 권력독점을 종식시키고 출범한 비스와나스 싱 정권은 1990년 종교 분쟁과 계급갈등으로 인한 집권 국민전선의 붕괴로 정권을 유지하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회의파의 지지로 셰카르가 정권을 승계했으나 1991년 3월 국민회의파의 간섭과 비협조를 이유로 사임했다. 그 결과 벤카타라만 대통령이 하원을 해산했고 같은 해 5월에 총선이 실시되었다. 이 총선의 선거 유세 과정에서 라지브 간디 전 총리가 남부에 갔다가 테러리스트의 총격에 의해 암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따라 국민회의파는 동정표가 급증하여 과반수 의석확보에는 실패했지만 제1당의 위치를 확보했고, 1991년 6월 21일 제9대 총리에 라오 국민회의파 총재가 취임했다 . 그러나 1992년 12월 6일 과격 힌두교도의 아요디아 시 소재 바브라 회교사원 파괴로 종교분쟁이 확산되었다. 이 분쟁으로 1,000여 명 이상이 사망하고 분쟁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 인접 이슬람교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세계역사이야기

 

 

 

독일역사

 

 

독일 역사의 시작은 프랑크 왕국 3개의 국가로 갈려진 이후 부터 독립적인 역사로 다룬다물론독일이란 국명을 가진 단일 국가로 등장한 것은 1871의 일이지만 역사학계에서는 843 이후 동프랑크 왕국부터 국가로서 독일사로 다루고 있다그 이전 게르만 족 역사 로마사의 일부로 다루기도 하고 유럽 고대사의 일부로 다루기도 한다.

900오토가 신성 로마 제국황제로 서임받은 이후에도 독일 국경은 한 번도 고정된 적이 없다. 비록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제국을 이루었지만, 껍데기 뿐인 제국이었고, 독일이란 국가 및 민족 정체성은 없었다.


독일은 도시 국가영주국주교령공국왕국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으며그 숫자는 몇 백개였다산 하나 넘으면 다른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특히 마르틴 루터 종교 개혁 이후 북독일과 남독일의 지역 차이는 서로 다른 나라다른 민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독일을 대표하는 나라가 프로이센이었고독일을 대표하는 것이 바이에른 오스트리아였다). 따라서 뭉뚱그려서 "독일"라고는 하지만실제로 독일사라고 할만한 것은 1871년 이후다대한민국에서는 프로이센 역사독일 역사를 제외한 나머지에 대해서는 관심과 지식이 부족한 편이다여기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리투아니아의 역사도 포함되며현재 독일 내에서 각 주를 이루는 옛 공국들의 역사도 있다특히 후자의 부분들은 거의 다뤄지지 않고 있다.


1648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끝난 30년 전쟁도 이런 상황을 더욱 고착시켰다. 특히 백년 전쟁이후 절대주의 왕권 체제를 지향한 프랑스독일을 철저히 조각조각 쪼개놔야 한다는 정책을 세웠다. 이 정책은 19세기까지 거의 300여년 간 프랑스 외교 정책의 한 기둥이었다(프랑스가 이러한 정책을 추구한 것은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갈리아와 게르만 관계의 기억도 한몫한 것이다).

18세기에 이르러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대등한 수준의 국가로 성장했다. 독일 기사단영지에서 출발한 프로이센은 부국강병책과 군국주의 정책으로 군사 강국으로 성장했으며,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며 유럽의 주요 강국이 된다. 유명무실하긴 했지만, 신성로마제국 황제도 겸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는 프랑스에 대해서는 프로이센과 동맹하여 대항하지만, 독일 내에서는 프로이센과 주도권을 놓고 다투는 관계가 되었다.


19세기에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독일 내에 민족주의 자유주의가 퍼지면서 자연스럽게 통일에 대한 논의가 심화되었다. 이 논쟁의 핵심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를 배제하는 독일주의와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독일주의였다. 전자는 순수(하다고 믿어지는) 독일인만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후자는 오스트리아의 입장이었다. 독일주의에 대한 반발은 슬라브계가 대다수인 오스트리아를 포함시키면 민족적 순수성이 저해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오스트리아 제국 전체를 놓고 보았을때 독일민족인 오스트리아인이 오히려 소수였던 것이다.

이 논쟁은 1861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을 거쳐 완전히 결론이 났고이후 오스트리아는 독일 역사에서 제외된다이때는 독일연맹에 남부 지역 독일계 공국들이 참여하는 수준이었으며정식으로 독일 제국은 1870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승전 후에 성립되었다.

통일 독일 제국은 제국 수상 비스마르크의 지도로 타 열강들과 평화 공존 관계를 유지하면서 프랑스를 철저히 고립하는 대외 정책을 추진했다물론 해외 식민지 쟁탈 경쟁에도 비스마크르의 강력한 입장때문에 추진하지 않았다그 정책은 영국프랑스 등과 불필요한 마찰을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대신 독일은 뒤늦은 산업혁명을 추진하면서 산업국가로 거듭나기 시작했다그러나 산업국가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내부 모순 및 문제에 직면했으며이 내부 문제는 노동조합 독일 사회민주당을 주축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의 활발한 운동으로 표면화되었다그러나 제2제국의 더 큰 위기는 외부에서 찾아왔다.


비스마르크 사후 강해진 국력에 취하여 비스마르크가 극력 피했던 식민지 쟁탈과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을 제대로 수행할 후임자를 갖지 못한 불행으로 독일 1차 세계 대전에 뛰어들었다이 전쟁에서 패한 독일은 군주제가 폐지되는 등의 홍역을 치뤗지만결국 가혹한 베르사이유 조약에 대한 복수심과 민족적 자긍심에 대한 상처때문에 나치 독일이 집권했고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2차 세계 대전에서도 패하여 전범국가가 된 독일 동독 서독으로 분단되었다(따라서 두 나라의 역사는 각기 또 별도로 다루어진다). 두 나라는 각기 WTO NATO의 최전방 국가가 되었지만, 1970년대 초에 빌리 브란트서독 수상이 추진한 동방 정책에 동독이 호응함으로써 양국간 긴장 관계는 한반도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냉전종식 후 199010 9, 두 나라는 승전4대국과 유럽연합의 승인을 받아 다시 통일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 고대부터 현대까지

고대
기원전 2000년 청동기 문화권이 형성되고 이들이 게르만족의 선조가 된다. 375년 훈족의 침략으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되고, 이 고대 게르만족 중에서 프랑크족이 서유럽 최초의 통일 국가인 프랑크 왕국을 세운다. 메로빙거 왕조와 카롤링거 왕조를 거쳐 카를 대제 때 서로마 제국 황제의 지위를 받지만, 카를 대제의 사후 왕권이 약화되면서 프랑크 왕국은 동프랑크(독일), 서프랑크(프랑스), 중프랑크(이탈리아)로 분열하게 된다.

중·근세
동프랑크의 왕인 오토 대제가 중부 유럽의 패권을 잡자 교황은 신성 로마 황제의 왕관을 수여하고, 이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이 성립된다. 신성 로마 제국의 왕위는 여러 왕조를 거쳐 오스트리아가(家)로 넘어간다. 오스트리아가는 계속되는 종교 전쟁과 왕위 싸움으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으로 나누어졌고, 신성 로마 제국은 분쟁을 계속하다 1806년, 나폴레옹 1세에 의해 해체된다.

근대
1862년 독일 북부 프로이센 주의 총리가 된 비스마르크는 '철혈 정책'을 주장하며 군비를 확장하여 독일을 통일하지만,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암살 사건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독일 제국은 붕괴된다.

현대
군주제에서 공화제로 바뀐 독일은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거듭난다. 그러나 1929년에 시작된 세계 대공황으로 혼란이 시작되고, 이때 나치스 세력인 히틀러가 정권을 잡게 된다. 이후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합하고 폴란드를 침입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다. 1945년 독일이 연합군에게 항복하고 히틀러가 자살함으로써 오랜 기간 계속된 전쟁이 막을 내린다.

 

Bundesrepublik Deutschland

 표어: Einigkeit und Recht und Freiheit

국가: Das Lied der Deutschen

수도   베를린

정부 형태

연방공화국
대통령
호르스트 쾰러
수상
:   앙겔라 메르켈

성립
신성 로마 제국 843(
베르됭조약)
독일 제국   1871 1 18
독일분단    1949 5 23
재통일
:       1990 10 3

 

면적
 • 전체
: 357,050 km2(63)
 •
내수면 비율: 2.416%

인구

82,515,988 (14)

GNP

전체:$2446(5)

개인:$29,700(25)

통화: 유로(EUR)

국가도메인: de

국제전화: 49


독일 연방 공화국(獨逸聯邦共和國, 독일: Bundesrepublik Deutschland, Deutschland (?), 문화어: 도이췰란드, 문화어 옛표기: 독일)중앙유럽의 나라이다. 북쪽으로 덴마크북해, 발트 해, 동쪽으로 폴란드체코, 남쪽으로 오스트리아스위스, 서쪽으로 프랑스, 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와 접한다.

독일 16개 주로 이뤄진 연방 공화국이다. 역사적으로 여러 독립국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1871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거치면서 국민국가로 통합되었다.

독일 연방 공화국은 국제 연합NATO, G8의 가입국이며, 유럽 연합의 창설국이다. 유럽 연합에서 가장 인구가 많으며 경제력으로도 중심이 되는 나라이다.

 

행정 구역

 

16개 주(Land. 정식 명칭은 연방주 Bundesland)로 구성되어 있다.

  1. 바덴뷔르템베르크 (Baden-Württemberg)
  2. 바이에른 (Bayern)
  3. 베를린 (Berlin)
  4. 브란덴부르크 (Brandenburg)
  5. 브레멘 (Bremen)
  6. 함부르크 (Hamburg)
  7. 헤센 (Hessen)
  8.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Mecklenburg-Vorpommern)
  9. 니더작센 (Niedersachsen)
  10.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Nordrhein-Westfalen)
  11. 라인란트팔츠 (Rheinland-Pfalz)
  12. 자를란트 (Saarland)
  13. 작센 (Sachsen)
  14. 작센안할트 (Sachsen-Anhalt)
  15. 슐레스비히홀슈타인 (Schleswig-Holstein)
  16. 튀링겐 (Thüringen)

국가로서 독일 역사의 시작은 프랑크 왕국 3개의 국가로 갈려진 이후 부터 독립적인 역사로 다룬다. 물론, 독일이란 국명을 가진 단일 국가로 등장한 것은 1871의 일이지만 역사학계에서는 843 이후 동프랑크 왕국부터 국가로서 독일사로 다루고 있다. 그 이전 게르만 족 역사로마사의 일부로 다루기도 하고 유럽 고대사의 일부로 다루기도 한다.

900 오토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서임받은 이후에도 독일 국경은 한 번도 고정된 적이 없다. 비록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제국을 이루었지만, 껍데기 뿐인 제국이었고, 독일이란 국가 및 민족 정체성은 없었다.

독일은 도시 국가, 영주국, 주교령, 공국, 왕국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으며, 그 숫자는 몇 백개였다. 산 하나 넘으면 다른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마르틴 루터종교 개혁 이후 북독일과 남독일의 지역 차이는 서로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독일을 대표하는 나라가 프로이센이었고, 독일을 대표하는 것이 바이에른오스트리아였다). 따라서 뭉뚱그려서 "독일"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독일사라고 할만한 것은 1871년 이후다. 대한민국에서는 프로이센 역사독일 역사를 제외한 나머지에 대해서는 관심과 지식이 부족한 편이다. 여기에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역사도 포함되며, 현재 독일 내에서 각 주를 이루는 옛 공국들의 역사도 있다. 특히 후자의 부분들은 거의 다뤄지지 않고 있다.

1648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끝난 30년 전쟁도 이런 상황을 더욱 고착시켰다. 특히 백년 전쟁 이후 절대주의 왕권 체제를 지향한 프랑스독일을 철저히 조각조각 쪼개놔야 한다는 정책을 세웠다. 이 정책은 19세기까지 거의 300여년 간 프랑스 외교 정책의 한 기둥이었다(프랑스가 이러한 정책을 추구한 것은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갈리아와 게르만 관계의 기억도 한몫한 것이다).

18세기에 이르러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대등한 수준의 국가로 성장했다. 독일 기사단 영지에서 출발한 프로이센은 부국강병책과 군국주의 정책으로 군사 강국으로 성장했으며,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며 유럽의 주요 강국이 된다. 유명무실하긴 했지만, 신성로마제국 황제도 겸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는 프랑스에 대해서는 프로이센과 동맹하여 대항하지만, 독일 내에서는 프로이센과 주도권을 놓고 다투는 관계가 되었다.

19세기에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독일 내에 민족주의자유주의가 퍼지면서 자연스럽게 통일에 대한 논의가 심화되었다. 이 논쟁의 핵심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를 배제하는 독일주의와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독일주의였다. 전자는 순수(하다고 믿어지는) 독일인만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후자는 오스트리아의 입장이었다. 독일주의에 대한 반발은 슬라브계가 대다수인 오스트리아를 포함시키면 민족적 순수성이 저해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오스트리아 제국 전체를 놓고 보았을때 독일민족인 오스트리아인이 오히려 소수였던 것이다.

이 논쟁은 1861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을 거쳐 완전히 결론이 났고, 이후 오스트리아는 독일 역사에서 제외된다. 이때는 독일연맹에 남부 지역 독일계 공국들이 참여하는 수준이었으며, 정식으로 독일 제국은 1870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승전 후에 성립되었다.

통일 독일 제국은 제국 수상 비스마르크의 지도로 타 열강들과 평화 공존 관계를 유지하면서 프랑스를 철저히 고립하는 대외 정책을 추진했다. 물론 해외 식민지 쟁탈 경쟁에도 비스마크르의 강력한 입장때문에 추진하지 않았다. 그 정책은 영국, 프랑스 등과 불필요한 마찰을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대신 독일은 뒤늦은 산업혁명을 추진하면서 산업국가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산업국가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내부 모순 및 문제에 직면했으며, 이 내부 문제는 노동조합독일 사회민주당을 주축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의 활발한 운동으로 표면화되었다. 그러나 제2제국의 더 큰 위기는 외부에서 찾아왔다.

비스마르크 사후 강해진 국력에 취하여 비스마르크가 극력 피했던 식민지 쟁탈과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을 제대로 수행할 후임자를 갖지 못한 불행으로 독일1차 세계 대전에 뛰어들었다. 이 전쟁에서 패한 독일은 군주제가 폐지되는 등의 홍역을 치뤗지만, 결국 가혹한 베르사이유 조약에 대한 복수심과 민족적 자긍심에 대한 상처때문에 나치 독일이 집권했고,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2차 세계 대전에서도 패하여 전범국가가 된 독일동독서독으로 분단되었다(따라서 두 나라의 역사는 각기 또 별도로 다루어진다). 두 나라는 각기 WTONATO의 최전방 국가가 되었지만, 1970년대 초에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이 추진한 동방 정책에 동독이 호응함으로써 양국간 긴장 관계는 한반도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냉전 종식 후 1990 10 9, 두 나라는 승전4대국과 유럽연합의 승인을 받아 다시 통일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민족 구성

주민의 대부분은 독일이다. 소수 민족은 덴마크인, 소르브인, 터키인, 러시아인, 유고인, 화교, 중국인, 쿠르드족, 기타가 거주하고 있다.

언어

공용어독일이고, 소수 민족어나 러시아어, 영어, 소르브어, 덴마크어, 프리시아어도 사용된다.

종교

대부분이 크리스트교(가톨릭개신교)를 믿고, 일부는 이슬람교, 유대교, 신흥 종교를 믿는다.

인구통계

독일의 인구는 약 8200만명을 넘는다.

여성 1인당 합계출산율2004 현재 (Eurostat 추정) 1.37명이나, 동독지역의 합계출산율은 독일 평균보다 더 적다. 2005 현재 천명당출산율은 8.4명으로 유럽대륙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며, 천명당사망율은 10.1명이다. 독일 인구의 자연증가율은 만성적으로 감소세를 기록하고 있다.


 

세계역사이야기

 

 

 

뉴칼레도니아는 남반구의 서경 158도와 172도 사이, 남위 19도와 23도 사이에 위치합니다. 호주 동쪽에서 1,200km, 뉴질랜드의 북쪽으로 1,500km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대한민국으로부터의 거리는 약 7,300km입니다.



 

총 면적은 18,575 km2으로 남태평양에서는 파푸아뉴기니, 뉴질랜드에 이어 3번 째로 큰 섬입니다. 프랑스의 바게뜨 빵처럼 길쭉한 형태로 생긴 길이 약 400km, 폭 50km의 그랑드 떼르(Grande Terre) 섬이 본섬입니다.
본섬에서 비행기로 20분 정도 소요되는 곳에 아름다운 소나무 숲으로 유명한 일데뺑(Ile des Pins)이 있습니다. 그 외에 로열티 군도라 불리는 리푸섬(Lifou), 마레섬(Maré), 우베아섬(Ouvéa)을 비롯한 수많은 작은 섬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며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본섬의 중앙에는 약 1,000m 길이의 척추 모양 산맥이 각기 다른 풍경과 기후의 동,서를 구분 짓습니다.
동쪽은 풍부한 강수량과 무역풍으로 숲이 우거지고 토양이 비옥합니다. 서쪽은 건조하여 곳곳에 적토가 펼쳐져 있으며, 이 지역 특유의 식물군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전체 길이 약 1,600km에 걸친 암초에 둘러싸여 형성된 지상 최대의 석호와 24,000km2에 달하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산호초도 자랑하고 있습니다. 뉴칼레도니아는 또한 매장량 세계 1위의 니켈 산지로도 유명합니다.



 

총 인구는 약 23만 명. 2005년 인구조사에서는 232,258명 이었습니다.
인종별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멜라네시아계 44.1%, 유럽계 34.2%, 그 외 21.7% (폴리네시안, 타히티인, 베트남인, 일본인 등)



뉴칼레도니아는 아열대 기후에 속해 연평균 기온 24℃ 전후로 초여름의 상쾌함이 연중 계속 됩니다. 기온의 변화는 비교적 적고, 가장 더운 2월의 평균 기온이 27℃, 가장 시원한 7월이 20℃정도 입니다.
남국의 강한 햇볕을 받아 땀이 솟더라도 그늘 진 곳에서 잠시 쉰다면 이내 상쾌해지는, 기분 좋은 더위가 뉴칼레도니아 기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행 떠나기 전 항상 궁금한 현지의 날씨. 지금 뉴칼레도니아의 날씨는 과연 어떨까? 현지의 날씨를 아는 방법은 없을까? 하지만 날씨에만 너무 신경 쓰다 보면 여행 전의 두근거림이 반감될 수 있으므로 유용한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프랑스 기상청 METEO-FRANCE의 뉴칼레도니아 기상 사이트 “www.meteo.nc” 입니다. 각국의 기상 정보를 모은 포털 사이트도 있지만, 현지의 기상 사이트만한 곳이 없을 듯 합니다.

오른쪽 그림을 클릭해 보세요. 실시간으로 오늘 오후 혹은 내일의 날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날씨를 나타내는 기호는 만국공통이므로 보기에 어렵지 않을 듯 합니다. 그래도 아래 위에 쓰여진 불어를 알고 싶어하시는 분들을 위해 간단한 불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덧붙여 뉴칼레도니아는 작은 섬들, 본섬의 서해안, 동해안에서 날씨가 아주 다른 일이 종종 있습니다.
여행 출발 전에 참고하세요.
하지만 뉴칼레도니아에 도착한 후에는 현지 사람이 주는 날씨에 관한 정보에 귀 기울이세요.

 

뉴칼레도니아는 빙하기 이전에 대륙에 붙어 있었으나, 빙하기가 끝나면서 해수면이 상승해 바다에 고립된 그랑드 떼르섬이 탄생했습니다.(약 1만 년 전) 고고학적으로 가장 오래된 인류의 흔적은 암각화, 라피타식 토기(BC 2000년) 등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현재의 멜라네시아계 사람들은 동남아시아에서 카누(Pirogue, 피로그)를 타고 섬에서 섬으로 이주해 온 것 같습니다. 각 부락 마다 자급자족 경제가 이뤄졌고, 곧이어 서방에서 폴리네시아인도 이주해 왔습니다. 따라서 관습도 다양하고 언어 또한 약 27가지 이상의 방언이 있다고 합니다.



 

1774년,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이 서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뉴칼레도니아를 발견했습니다. 원래 뉴칼레도니아라는 이름은 제임스 쿡이 그랑드 떼르섬의 산맥을 보고, 영국 북부의 스코틀랜드 지방의 풍경과 닮았다고 하여 붙인 것입니다.(스코틀랜드의 로마 시대 이름이 칼레도니아였다고 합니다.) “일데뺑”도 제임스 쿡 선장이 소나무가 많은 쿠니에(Kunié)섬에 붙인 이름입니다. 다음에 방문한 것이 루이 16세의 명을 받은 라뻬루즈 백작(La comte de Lapérouse)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카톨릭 선교사가 뉴칼레도니아를 방문했습니다.
1853년, 나폴레옹 3세가 뉴칼레도니아는 프랑스령이라고 선언하여 같은 해 9월 24일에 페브리에 데포앵뜨(Febvrier Despointes) 해군 대장이 그랑드 떼르 북부의 발라드(Balade)에 3색기를 세웠습니다. 이를 기념하여 현재 9월 24일은 뉴칼레도니아의 국경일입니다.



 

프랑스는 식민지가 된 뉴칼레도니아에 정치범들을 보냈습니다. 당시 프랑스에서 배를 타고 4개월 넘게 항해해야 했으므로, 뉴칼레도니아는 세계의 끝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1871년, 파리 꼬뮌이 발발했을 때는 약 4천명이 유배되어 대부분이 일데뺑에 유형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에는 약 3만명 정도가 국외 추방 및 유형자로 뉴칼레도니아에 송환되었습니다. 1887년 이 처벌 제도가 폐지된 후에 유형자는 없습니다.



 

1946년, 뉴칼레도니아는 식민지에서 프랑스 해외 영토로 인정됩니다. 그 결과 인종에 관계없이 뉴칼레도니아 주민은 본국과 동등한 프랑스 국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뉴칼레도니아는 니켈 광업과 관광업, 남태평양이라고 하는 특수한 지방 풍습을 가진 프랑스 공화국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특정 영역의 자치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공용어는 프랑스어입니다. 일부 호텔, 레스토랑, 면세점 등에서는 영어도 통용됩니다. 현재 많은 누메아의 호텔·면세점 등 한국인 직원을 채용 중입니다. 멜라네시아어나 폴리네시아어가 사용되는 곳도 있는데, 예를 들면 일데뺑에서는 쿠니에어를 쓰기도 합니다.

뉴칼레도니아 여행 중에 불어를 써보고 싶은 분은 이 카드를 활용해 보세요.
조금 서투른 불어라도 뉴칼레도니아인들은 반드시 웃는 얼굴로 화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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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 60%는 가톨릭, 30%는 개신교입니다. 1843년 그랑드 떼르 북부에 최초의 가톨릭 선교사가 상륙했다고 합니다. 개신교 선교사는 1841년에 포교 활동을 시작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일데뺑 주민의 대부분은 가톨릭 신자이고, 마레섬, 리푸섬에는 개신교도가 많아 지역적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영국인 선교사(개신교)와 프랑스 선교사(가톨릭)가 서로 보다 많은 신자를 확보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며 기독교를 포교하였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누메아(뉴칼레도니아의 수도)나 웨(로열티 군도의 리푸섬에 소재) 등 인구가 많은 마을에서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교회가 가깝게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두 개의 종파가 서로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멜라네시아계 주민이 기독교로 개종 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퍼지기 이전의 전통이나 의식도 숨쉬고 있습니다. 마을의 추장이나 섬의 대추장은 세습제로 선택됩니다. 꺄즈(La case, 전통 가옥의 이름)의 지붕을 새로 바꿀 때나 작물을 수확할 때 마을사람들이 상부상조하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섬사람들은 숲이나 동굴을 신성한 영혼이나 성령이 머무는 장소로 생각합니다. 또한 특정 장소를 신성시하는 관습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특정 장소에 외부 사람의 출입을 금지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보통은 관광객이 여행하기 부적합한 곳에 위치해 있으므로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뉴칼레도니아는 일반적으로는 치안 상태가 좋은 곳입니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
지갑이나 현금, 고가의 물건 등 귀중품은 객실에 두지 마시고 세이프티 박스 등 안전한 방법을 이용해 보관해 주세요.



뉴칼레도니아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곳입니다. 현지의 관습을 존중해 주는 것은 여행자에게 있어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누메아 같은 도시에서는 특별히 조심할 것은 없습니다만, 카지노나 몇몇 레스토랑 등은 지나치게 캐주얼한 복장이나 샌들로는 입장하실 수 없습니다.
작은 섬에서 지켜야 할 에티켓으로는 원주민이나 원주민 가옥 사진을 찍을 때 허락을 구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신성한 장소로 여겨지는 곳에 출입할 때에도 원주민의 허락을 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보통 이러한 곳은 관광객이 별로 가지 않는 곳이므로 과도하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 보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부상을 막기 위해서 산호는 직접 건드리지 않도록 합시다.



뉴칼레도니아에는 팁 문화가 없습니다.
미소와 함께 “Merci!(메르씨)”라는 한 마디를 팁 대신 전해주세요.



타인을 촬영할 때, 상대방에게 승낙을 구하는 것은 당연히 지켜야 할 매너입니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지만 뉴칼레도니아인은 친절하기 때문에 미소나 손짓, 몸짓만으로도 얼마든지 촬영허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외에 몇몇 건물이나 원주민 가옥 등은 촬영 금지인 곳도 있기 때문에 사진 찍기 전에 한 번 확인해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뉴칼레도니아 국가번호 : 687
뉴칼레도니아 국내 전화번호 및 핸드폰 번호 : 6자릿수
공중 전화의 대부분이 카드식으로 1,000 XFP, 3,000 XFP, 5,000 XFP 3종류가 있습니다.
전화 카드는 우체국, 서점, 담배·잡화점 등에서 판매합니다.



직통 전화 :00 + 82(한국 국가번호) + (0을 뺀 지역번호 + 걸고자 하는 전화번호)



뉴칼레도니아에서 한국에 우편을 보낼 경우, 그림 엽서(15cm × 10cm 이하)는 세계 어느 곳으로 보내도 110 XFP 입니다.
편지의 경우 20g까지 150 XFP, 50g까지 320 XFP, 100g까지 645 XFP입니다.
항공편은 통상 3일 ~ 1주일, 배편은 3주 ~ 4주 정도 소요됩니다.

주소 : 7 rue E. Porcheron, Quartier Latin
영업시간 : 월~금요일 - 7:45~15:30
                   토요일 - 7:30~11:00
                   일요일 - 휴무


누메아 시내에는 인터넷 카페도 있습니다만, 보통 한국어 폰트가 깔려 있지 않습니다. 인터넷 카페에 노트북을 반입하여 이용가능 하지만 랜포트로 연결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현재로써는 무선 인터넷이 되는 곳은 드뭅니다.

 

뉴칼레도니아 국가번호 : 687
뉴칼레도니아 국내 전화번호 및 핸드폰 번호 : 6자릿수
공중 전화의 대부분이 카드식으로 1,000 XFP, 3,000 XFP, 5,000 XFP 3종류가 있습니다.
전화 카드는 우체국, 서점, 담배·잡화점 등에서 판매합니다.



직통 전화 :00 + 82(한국 국가번호) + (0을 뺀 지역번호 + 걸고자 하는 전화번호)



뉴칼레도니아에서 한국에 우편을 보낼 경우, 그림 엽서(15cm × 10cm 이하)는 세계 어느 곳으로 보내도 110 XFP 입니다.
편지의 경우 20g까지 150 XFP, 50g까지 320 XFP, 100g까지 645 XFP입니다.
항공편은 통상 3일 ~ 1주일, 배편은 3주 ~ 4주 정도 소요됩니다.

주소 : 7 rue E. Porcheron, Quartier Latin
영업시간 : 월~금요일 - 7:45~15:30
                   토요일 - 7:30~11:00
                   일요일 - 휴무


누메아 시내에는 인터넷 카페도 있습니다만, 보통 한국어 폰트가 깔려 있지 않습니다. 인터넷 카페에 노트북을 반입하여 이용가능 하지만 랜포트로 연결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현재로써는 무선 인터넷이 되는 곳은 드뭅니다.

 

뉴칼레도니아의 통화는 퍼시픽프랑입니다.
기호는 CFP 또는 XFP로 표기되며 현지에서는 보통 “프랑”으로 부릅니다. 프랑스에서는 2002년부터 유로를 쓰지만, 뉴칼레도니아에서는 여전히 퍼시픽프랑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퍼시픽프랑과 유로는 고정 레이트로 약 1유로 = 119.77 XFP입니다.



현재 대한민국 내에서 퍼시픽프랑으로의 환전은 되지 않고 있으므로 국내에서 유로나 달러로 환전하신 후 뉴칼레도니아 현지 공항 내 환전소, 누메아 시내 은행, 호텔 등지에서 퍼시픽프랑으로 환전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내에서 퍼시픽프랑을 원화로 환전하실 수 없기 때문에 남은 퍼시픽프랑은 귀국 시 통투타 공항에서 유로나 달러로 환전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뉴칼레도니아에서 VISA나 MASTER 신용카드는 외국인 관광객이 많은 곳(호텔이나 면세점, 레스토랑, 부띠끄 등)에서는 큰 불편 없이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현지에서 신용카드 사용 시, 지면에 서명 하는 방식이 아닌,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곳도 있으므로 출발 전 신용카드의 비밀번호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표는 매년 바뀌는 휴일










뉴칼레도니아는 낮은 습도와 상쾌한 기후가 일년 내내 계속 되므로 스포츠 애호가들의 천국입니다. 따라서 국제적인 스포츠 행사도 많습니다. 관심 있으신 스포츠 애호가분들을 위해 2008년에 예정된 국제 스포츠 이벤트 일정을 싣습니다.



누메아 국제 철인 3종 경기 대회는 국제적인 수준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아 세계 각국의 철인들이 참가하고 있습니다.
(수영1.5km/자전거40km/런닝10km)

대회 공식 사이트 (불어사이트)http://www.lctri.org/
주최: LIGUE CALEDONIENNE DE TRIATHLON (LCTRI)
주소 : BP 328 - 98845 Noumea Cedex
Tel:(687)28.18.33   Fax:(687)28.18.33   Emaillctri@offratel.nc


COMINC 공식 사이트http://www.marathon-noumea.lagoon.nc/
주최: COMINC
주소 : BP 333-98845 Noumea Cedex
Tel:(687)28.10.57   Fax:(687)28.80.80   Emailcominc@lagoon.nc

 



꼬꼬띠에 광장내 오피스 (중심가)
꼬꼬띠에 광장 중앙의 분수의 서쪽에 위치

꼬꼬띠에 광장 내 오피스
월~금 8:00 ~17:30 / 토 9:00 ~12:00
주소 : 14, J. JAURES - SQUARE ORLY, PLCE DES COCOTIERS, BP. 2828-98846, Noumea
Tel : (687) 28.75.80 Fax:(687) 28.75.85
프리 다이얼 : 05.75.80(국내 전용)

앙스바타 해변의 중앙에 위치한 바다를 향해 있는 전통 지붕을 한 건물

앙스바타 오피스
월~금 8:30 ~18:30 / 토, 일 9:00 ~18:00
주소 : PROMENADE ROGER LAROQUE, NOUMEA



누메아 시내 쇼핑센터 「르 빌라쥬(Le Village)」내에 있습니다.

월 12:00 ~ 4:30 / 화·수·목·금 8:00 ~16:00 / 토 8:00 ~12:00
주소 : Le Village, BP 115-98800, NOUMEA
Tel : (687) 27.78.05 Fax:(687) 27.48.87
웹 사이트 : http://www.tourismeprovincenord.nc/



웹 사이트 : http://www.iles-loyaute.com/

위치 : 앙스바타 란타나 비치 호텔 입구 옆

주소 : 113, avenue R. Laroque, Anse Vata, 98800, Noumea
Tel : (687) 28.93.00 Fax:(687) 28.91.21
웹 사이트 : http://www.tourismeprovincenord.nc/

꼬꼬띠에 광장 옆의 SEBASTOPOL 대로에 접한 건물

Tel : (687) 27.66.27 Fax:(687) 27.48.27
주소 : 메인 오피스 27, rue Sebastopol, Central Bldg, 98800, Noumea



바오(Vao) 사무소
Tel : (687) 46.10.27

일데뺑 공항 안내소(AEROGARE DE L'ILE DES PINS)
Tel : (687) 46.14.00

리푸섬 관광 안내소
Tel : (687) 45.00.32 Fax : (687) 45.40.39

※ 이 외에 통투타 국제 공항, 마젠타 공항, 리푸섬 공항에도 관광 안내소가 있습니다.

뉴칼레도니아에서는 관광객을 위해 무료로 배포하는 관광 자료가 많이 있습니다. 위에 표기된 관광 오피스 외에도 통투타 공항 인포메이션, 누메아의 각호텔 로비나 면세점 등에도 놓여 있습니다.

 

경찰 17 / 소방차 18 / 구급차 15

뉴칼레도니아 의료 센터(CENTRE HOSPITALIER TERRITORIAL DE NOUVELLE-CALEDONIE) http://www.cht.nc/
누메아 시내에 위치한 종합병원

뉴칼레도니아에서 여권을 분실했을 경우, 현지에 한국 영사관이 없으므로 여권의 재발행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귀국을 위해서는 「출국 허가증」을 현지 경찰에 신청하셔야 합니다. 수속하는데 수일이 소요될 가능성이 있어 귀국 일정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으므로 여권은 분실하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만의 하나 여권을 분실할 경우에 대비하여 여권 사본, 국내 신분증(주민등록증이나 면허증), 여권용 사진 등을 준비하시는 것도 좋습니다. 이 서류들과 함께 여권을 분실한 장소의 관할 경찰서가 발행한 분실 신고 증명서를 지참하여 누메아 국제 경찰 본부에 「출국 허가증」을 신청하여야 합니다.

뉴칼레도니아 국제 경찰 본부(POLICE NATIONALE)
Tel : (687) 24.33.00 Fax : (687) 27.12.22

 



일데뺑의 왕새우, 로열티 제도의 킹크랩 등 뉴칼레도니아는 해산물의 천국이기도 합니다. 특히 현재 가까운 일본에서는 일명 “천사의 새우”라는 왕새우가 대인기입니다. “천국”인 뉴칼레도니아에서 나기 때문에 「천사의 새우」로 불리는 이 새우는 살짝 달콤한 맛이 나는 통통한 몸통을 가진 고급 식재료입니다. 화학 약품이나 사료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산에 가깝게 양식하고 있기 때문에 회로 먹어도, 데쳐 먹어도 안정성에서나 맛에서나 최고의 품질을 자랑합니다.

사슴고기는 뉴칼레도니아의 대표적 특산품 중 하나입니다. 주로 육회나 스테이크로 먹습니다. 뉴칼레도니아의 사슴은 “루사”라 불리는 품종으로 본래 인도네시아가 원산지이지만 뉴칼레도니아의 기후 및 풍토에 잘 맞아 목축이 발달하였고, 북부에서는 야생화되어 야산에서 생활하는 사슴을 흔치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또 누메아 교외로 나가면 시골 요리로 사슴 스테이크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씹는 맛이 좋고 신선한 청정 사슴 요리를 뉴칼레도니아에서 맛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입니다.

달팽이 요리의 본고장인 프랑스에서 뿐만 아니라 뉴칼레도니아에서도 달팽이 요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일데뺑 산 달팽이는 프랑스 산 달팽이 보다 훨씬 크고 씹는 맛도 좋아 훨씬 더 맛이 좋다는 평도 있습니다. 현재 개체 감소 방지를 위해 포획이 제한되어 있어, 일데뺑의 레스토랑, 호텔 내에서만 맛볼 수 있습니다.

누메아에서 디저트를 드실 때 바닐라 향을 느끼셨다면 이는 리푸섬의 바닐라 농원에서 수확된 천연 바닐라로 만든 것일 확률이 높습니다. 기생 식물인 바닐라는 재배에 시간이 많이 걸려 대량생산을 할 수 없습니다. 그윽한 향기를 뽐내는 손수 만든 바닐라를 뉴칼레도니아에서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뉴칼레도니아에서는 과일도 많이 재배되고 있습니다. 바나나, 파인애플, 망고, 파파야 등 보기에도 아름답고 단맛이 풍부합니다. 11월 전후에는 리치가 제철입니다.

대부분의 레스토랑에서 수입 커피를 제공합니다만, 뉴칼레도니아 국내에서도 그 양은 적지만 커피가 생산되고 있습니다. 특히 본토인 그랑드 떼르의 산자락에서 재배되고 있는 Bourbon Pointu(부르봉 뽀앵뛰) 또는 Cafe Le Roy(카페 르호와)라 불리는 향기가 풍부한 품종은 커피 매니아들이 인정하는 세계적으로 드문 커피입니다.

「새우나 게를 비롯해 가리비 등 어패류 종류가 풍부하고 신선합니다. 또한 기후가 온난하고 연간 해수온이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굴 양식에는 최적의 조건입니다. 일 년 내내 생굴을 먹을 수 있습니다. 쇠고기나 기타 육류도 깨끗한 자연의 풀만 먹고 있기 때문에 아주 양질의 고기라 할 수 있지요. 사슴, 양, 비둘기 등 그 종류에 있어서도 다양합니다. 그야말로 식도락에 있어서도 뉴칼레도니아는 천국일 수 밖에 없습니다.」

 

 

 

 

 

 

 

 

 

 

프랑스 각 지방의 요리를 자랑으로 여기는 레스토랑도 많이 있으므로 남태평양의 프렌치 파라다이스 뉴칼레도니아에서 “음식”의 프랑스 일주를 즐길 수 있습니다. 프랑스 요리라 하면 약간 무거운 것을 상상하기가 쉽지만, 누메아의 요리는 소재를 살린 시원스러운 맛내기가 기본입니다. 한국인에게도 적당하고 양도 적당합니다.


뻬리고르 지방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 요리의 진미 푸아그라의 특산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최고급 요리라고 생각해 맛 볼 기회가 적었던 분은 꼭 누메아에서 이 지방 요리를 맛 보시기 바랍니다. 프랑스에서도 뻬리고르 지방은 미식의 지방으로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맛있는 치즈 퐁뒤를 뉴칼레도니아에서 맛 볼 수 있습니다. 퐁뒤는 본래 높은 산악 지방의 요리입니다. 누메아에서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덤베아는 뉴칼레도니아 중앙 산맥의 일부로 저녁이면 꽤 선선합니다. 이 곳의 레스토랑에서는 프랑스 직송의 맛있는 치즈를 이용한 요리가 명물입니다. 퐁뒤 외에 녹은 치즈를 감자에 얹어 구워먹는 라끌렛뜨도 추천합니다.

유명한 프로방스의 요리로 Bouillabaisse(부야베스)가 있습니다. 각종 신선한 해산물을 넣어 만든 해산물 수프로 양 또한 푸짐합니다. 가볍게 드시고 싶다면 숲드뿌와쏭(생선수프)을 맛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크레쁘는 원래 프랑스 북서부에 위치하는 브르타뉴의 요리입니다. 본래는 사과주를 곁들여 먹는 요리입니다. 다양한 바리에이션의 크레쁘는 한끼 식사로도, 디저트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벨기에와의 국경에 접하는 이 지방의 명물 요리는 홍합 요리입니다. 화이트 와인으로 익힌 홍합 요리가 보기만 해도 흐뭇한 큰 그릇에 담겨 나옵니다.

독일과의 국경에 접한 알자스 지방의 요리는 돼지고기를 주로 사용합니다. 식초에 절인 양배추와 소세지, 감자 등을 화이트 와인으로 쪄낸 슈크루트가 대표 요리입니다. 알자스산 화이트 와인 리슬링, 뮈스꺄, 게부르쯔라이너 또한 한국인의 입맛에 잘 맞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뉴칼레도니아의 향토 요리는 프랑스 요리와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지의 신선한 식재로 한 요리는 새로운 미식의 즐거움을 가르쳐 줍니다.


“부냐”란 뉴칼레도니아의 멜라네시안들이 결혼식과 같은 큰 행사날에 먹는 전통 요리입니다. 고구마나 감자, 토란, 닭고기나 생선 등을 넣고 코코넛 밀크로 맛을내어 바나나 잎으로 싸서 가열한 돌멩이로 찐 특이한 요리입니다. 작은 섬 등지에서 쉽게 맛 볼 수 있으나 시간이 걸리는 요리이므로 사전 예약이 필수입니다.





프랑스 풍이면서 현지에서 나는 최고의 식재를 도입한 소박한 시골 요리. 뉴칼레도니아화한 프랑스 요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슴고기 카르파치오는 물론이거니와 새우, 슈크루트 등 프랑스 본토에 뒤지지 않는 훌륭한 요리들을 맛 볼 수 있습니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뉴칼레도니아에서 해산물을 먹지 않는다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현지 산 왕새우나 작은 새우, 각종 어패류, 생선 등 언제나 신선한 해산물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습니다.

 

 

 

 

 

프랑스 산 와인이 주를 이룹니다. 저렴한 하우스와인 테이블 와인이라면 한 병에 2,000 XFP 정도부터 레스토랑에서 주문할 수 있으므로 한국에서 마시는 것 보다 훨씬 저렴합니다. 또한 누메아의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귀한 와인을 맛 볼 수 있습니다.



뉴칼레도니아에서 가장 인기있는 맥주는 바로 “NO. 1 (넘버원)” 맥주. 가볍고 상쾌한 맛이 특징으로 언제라도 부담없이 마시고 싶어지는 맥주입니다.



현지에서 시판되고 있는 「Mt. Dore(몽도르)」라고 하는 물은 누메아 교외의 몽도르산에서 나는 내츄럴 워터입니다. 뉴칼레도니아에서는 수도물도 안심하고 마실 수 있습니다.



맥주를 레모네이드 같은 소다수와 섞은 칵테일입니다. 뉴칼레도니아에서는 알코올 도수 1% 미만의 논알콜 맥주로 제조되고 있고 카페 등에서 많이 마시는 상쾌한 맛의 칵테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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