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교육

 

 

 

 

위로부터 빨강·노랑·초록의 3색기이며 중앙에 문장()이 있다. 빨강은 동물을, 노랑은 광물을, 초록은 식물의 각 자원을 표시한다. 방패 모양의 문장에는 콘도르·알파카·빵나무, 포토시의 구릉, 9개 지방을 나타내는 9개의 별, 태양 등이 있다. 1851년 10월 31일 제정하였고 1888년 7월 14일 인증하였다. 국내에서는 문장이 없는 기를 사용하기도 하나 공공 및 민간 단체에서는 주로 문장이 있는 것을 주로 사용한다
 

인구는 100만 899명(2000)이다. 티티카카호(湖) 동쪽 80km 지점에 있는 볼리비아의 사실상의 수도(헌법상의 수도는 수크레)이며, 최대의 도시이다. 1548년 알티플라노고원 약 3,600m의 고지에 건설된 도시로, 볼리비아의 정치·문화\·경제의 중심지를 이루고 있다. 티티카카호에서 흘러내리는 라파스강(江) 연변에 전개된 분지에 시가지가 발달되었으며, 높은 단구(段丘)의 위와 하류부의 낮은 곳에 원주민의 주택이 있고, 그 중간에 백인지구가 있다. 순수한 인디오가 주민의 반을 차지한다. 강의 북동안(北東岸) 무리요광장이 시의 중심이며, 부근에 대통령관저를 비롯하여 정부청사·국회의사당 등의 건물과 로마가톨릭대성당, 1830년 창립된 대학, 박물관·호텔\·극장 등이 있으며, 고원도시임에도 근대적인 고층건물을 볼 수 있다. 중심가에는 동양인의 점포가 있다.

광업·축산업\·농업 활동이 대부분이고, 특히 주석·금\·안티몬·납\·구리·텅스텐 등은 중요한 광물자원이다. 티티카카호 주변 일대는 감자의 산지이다. 직물·가구제조\·화학·금속\·식품가공 등의 산업이 성하다. 라파스의 중심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플라도는 아름다운 거리로 ‘7월 16일 거리’라고도 한다. 서쪽 끝에 있는 베네수엘라광장에는 볼리바르상(像)이 있고, 동쪽 끝의 로마광장에는 수크레상이 있다. 철도는 안데스를 넘어 칠레의 안토파가스다항(港)에 통하고, 팬아메리칸 고속도로 등의 도로가 집중되어 있다. 또 티티카카호의 항로로 페루의 푸노까지 갈 수 있다. 시내에서 버스로 1시간 정도 가서 산에 오르면 세계 최고의 스키장이 있다.

 

볼리비아역사

 

볼리비아티아우아나코의 유적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안데스 최고의 문명의 꽃을 피웠다. 아이마라족()은 11세기경 케추아족의 지배하에 들어가 이 땅은 잉카제국의 영토가 되었으나, 1535년 피사로에게 정복되어 에스파냐의 영토가 된 후 포토시 등 많은 광산도시가 번영하였다. 1825년 인접국인 페루와 함께 수크레가 이끄는 볼리바르군()에 의해 해방되어, 국명을 ‘해방자’의 이름을 따서 볼리비아 공화국이라 이름하였다.

독립 후 정권은 쿠리올료(식민지 태생의 에스파냐인)라는 소수 지배층의 손에 들어갔고, 원주민인 인디오는 비참한 생활을 면치 못하였다. 1879∼1883년 태평양전쟁볼리비아의 초석과 구아노(바닷새의 으로 비료 등에 이용)를 둘러싼 영·미 자본의 이해관계의 대립으로 말미암아 칠레와의 사이에 야기된 것인데, 볼리비아는 이 전쟁에 패함으로써 태평양에 면한 안토파가스타주()를 내주고 내륙국이 되어, 이 나라의 발전은 크게 지연되었다. 전후 광산주를 대표하는 보수당의 집권, 내전을 거쳐 19세기 말부터 대지주와 상인을 대변하는 자유당이 정권을 쥐었고 국내교통의 정비, 종교의 자유 등 여러 가지 개혁을 실시하였으나, 정치적 안정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또 은 대신에 주석 개발이 왕성하였으나, 그 이익은 파티뇨·아라마요·호호실로의 3대 재벌에게 독점되었고, 재정은 외국자본에 의존하게 되었다.

1920년대의 미국자본 진출은 광산회사의 주식 취득과 남동부 유전지대 100만ha에 걸친 스탠더드오일권리 취득으로 영국 자본을 훨씬 능가하였다. 1932∼1935년 차코전쟁에서는 미국자본의 지원 아래 영국자본의 지원을 받은 파라과이와 싸웠으나, 이 전쟁에서도 패배함으로써 파라과이에게 넓은 영토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볼리비아의 영토는 독립 당시의 3/5으로 줄어들었다. 1929년 세계대공황으로 타격을 받은 이 나라의 경제는 패전으로 더욱 악화되었고, 좌우의 정치세력이 대두하여 정치는 불안정하였다. 이 가운데 결성된 정치조직의 하나인 민족혁명운동은 1943년 쿠데타에 의해서 대령 비야로엘에게 정권을 담당하게 하여, 예농제()를 폐지하고 석유사업의 국가독점확립 등을 실시하였으나, 1946년 비야로엘 정권은 쿠데타에 의해서 붕괴되었다.

1952년 혁명으로 1951년에 대통령에 선출되었던 파스 에스텐소로의 민족혁명운동정권이 발족하여, 주석광산의 국유화, 농지개혁 등 일련의 획기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급격한 개혁정치를 편 결과 심각한 인플레이션 등 경제위기가 1954∼1956년에는 절정에 이르렀다. 1956년 정권을 담당한 실레스 소아소는 미국의 원조에 의해서 이 위기를 타개하였고, 1960년 재선된 파스도 이 정책을 답습하였다. 1964년 5월 파스는 총사령관 바리엔토스를 부통령으로 하여 3선되었으나, 11월 바리엔토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은 다음, 모든 좌익활동을 금지시켰다. 1969년 4월 바리엔토스가 항공기 추락사고로 사망하자 부통령인 실레스 사리나스가 정권을 이어받았으나, 10월  오반도의 좌경 쿠데타로 쓰러지고, 오반도 정권은 다시 1970년 10월 장군 미란다가 이끄는 군부 우파의 쿠데타로 붕괴되었다. 그러나 곧 좌파의 토레스 장군이 이를 눌러 정권을 장악하고, 이에 반대하는 군부 우파는 1971년 8월 쿠데타로 토레스 정권을 몰아내고, 장군 우고 반세르(Hugo Banzer)를 중심으로 군사위원회를 조직하였다. 7년간의 군사정권 후 1978년 7월에 실시된 총선에서 장군 파레다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4개월 후 장군 파디자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1979년 7월 총선이 실시되었으나 과반수득표자가 없어 대통령 선출에는 실패하였고, 144석의 의회만을 구성하였다. 의회에서도 대통령 선출에 실패하자 임시대통령으로 상원의장 월터 게바라를 선출하고 1980년 5월에 있을 총선까지 정권을 맡겼으나, 11월 대령 나투시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러나 의회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사임한 게바라 대신 리디아구에일라 여사를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군부에 나투시의 축출을 요구하였다. 이에 불복한 군부는 반란을 일으켜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정국은 혼미상태가 계속되었다. 1989년 8월 사모라가 5년 임기의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93년 8월에는 야당인 민족혁명운동당(MNR)의 곤살로 산체스가 시민연합 볼리비아 자유운동과 제휴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97년 6월에는 민족행동당(ADN)의 우고 반세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2001년 병으로 사임하였고, 부통령이던 호르헤 키로가(Jorge Quiroga)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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