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역사
독일 역사의 시작은 프랑크 왕국이 3개의 국가로 갈려진 이후 부터 독립적인 역사로 다룬다. 물론, 독일이란 국명을 가진 단일 국가로 등장한 것은 1871년의 일이지만 역사학계에서는 843년 이후 동프랑크 왕국부터 국가로서 독일사로 다루고 있다. 그 이전 게르만 족 역사는 로마사의 일부로 다루기도 하고 유럽 고대사의 일부로 다루기도 한다.
900년오토가 신성 로마 제국황제로 서임받은 이후에도 독일 국경은 한 번도 고정된 적이 없다. 비록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제국을 이루었지만, 껍데기 뿐인 제국이었고, 독일이란 국가 및 민족 정체성은 없었다.
독일은 도시 국가, 영주국, 주교령, 공국, 왕국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으며, 그 숫자는 몇 백개였다. 산 하나 넘으면 다른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 북독일과 남독일의 지역 차이는 서로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북독일을 대표하는 나라가 프로이센이었고, 남독일을 대표하는 것이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였다). 따라서 뭉뚱그려서 "독일사"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독일사라고 할만한 것은 1871년 이후다. 대한민국에서는 프로이센 역사와 독일 역사를 제외한 나머지에 대해서는 관심과 지식이 부족한 편이다. 여기에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역사도 포함되며, 현재 독일 내에서 각 주를 이루는 옛 공국들의 역사도 있다. 특히 후자의 부분들은 거의 다뤄지지 않고 있다.
1648년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끝난 30년 전쟁도 이런 상황을 더욱 고착시켰다. 특히 백년 전쟁이후 절대주의 왕권 체제를 지향한 프랑스는 독일을 철저히 조각조각 쪼개놔야 한다는 정책을 세웠다. 이 정책은 19세기까지 거의 300여년 간 프랑스 외교 정책의 한 기둥이었다(프랑스가 이러한 정책을 추구한 것은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갈리아와 게르만 관계의 기억도 한몫한 것이다).
18세기에 이르러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대등한 수준의 국가로 성장했다. 독일 기사단영지에서 출발한 프로이센은 부국강병책과 군국주의 정책으로 군사 강국으로 성장했으며,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며 유럽의 주요 강국이 된다. 유명무실하긴 했지만, 신성로마제국 황제도 겸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는 프랑스에 대해서는 프로이센과 동맹하여 대항하지만, 독일 내에서는 프로이센과 주도권을 놓고 다투는 관계가 되었다.
19세기에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독일 내에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퍼지면서 자연스럽게 통일에 대한 논의가 심화되었다. 이 논쟁의 핵심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를 배제하는 소독일주의와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대독일주의였다. 전자는 순수(하다고 믿어지는) 독일인만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후자는 오스트리아의 입장이었다. 대독일주의에 대한 반발은 슬라브계가 대다수인 오스트리아를 포함시키면 민족적 순수성이 저해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오스트리아 제국 전체를 놓고 보았을때 독일민족인 오스트리아인이 오히려 소수였던 것이다.
이 논쟁은 1861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을 거쳐 완전히 결론이 났고, 이후 오스트리아는 독일 역사에서 제외된다. 이때는 북독일연맹에 남부 지역 독일계 공국들이 참여하는 수준이었으며, 정식으로 독일 제국은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승전 후에 성립되었다.
통일 독일 제국은 제국 수상 비스마르크의 지도로 타 열강들과 평화 공존 관계를 유지하면서 프랑스를 철저히 고립하는 대외 정책을 추진했다. 물론 해외 식민지 쟁탈 경쟁에도 비스마크르의 강력한 입장때문에 추진하지 않았다. 그 정책은 영국, 프랑스 등과 불필요한 마찰을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대신 독일은 뒤늦은 산업혁명을 추진하면서 산업국가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산업국가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내부 모순 및 문제에 직면했으며, 이 내부 문제는 노동조합과 독일 사회민주당을 주축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의 활발한 운동으로 표면화되었다. 그러나 제2제국의 더 큰 위기는 외부에서 찾아왔다.
비스마르크 사후 강해진 국력에 취하여 비스마르크가 극력 피했던 식민지 쟁탈과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을 제대로 수행할 후임자를 갖지 못한 불행으로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에 뛰어들었다. 이 전쟁에서 패한 독일은 군주제가 폐지되는 등의 홍역을 치뤗지만, 결국 가혹한 베르사이유 조약에 대한 복수심과 민족적 자긍심에 대한 상처때문에 나치 독일이 집권했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패하여 전범국가가 된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었다(따라서 두 나라의 역사는 각기 또 별도로 다루어진다). 두 나라는 각기 WTO와 NATO의 최전방 국가가 되었지만, 1970년대 초에 빌리 브란트서독 수상이 추진한 동방 정책에 동독이 호응함으로써 양국간 긴장 관계는 한반도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냉전종식 후 1990년10월 9일, 두 나라는 승전4대국과 유럽연합의 승인을 받아 다시 통일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 고대부터 현대까지
고대
기원전 2000년 청동기 문화권이 형성되고 이들이 게르만족의 선조가 된다. 375년 훈족의 침략으로 게르만족의 대이동이 시작되고, 이 고대 게르만족 중에서 프랑크족이 서유럽 최초의 통일 국가인 프랑크 왕국을 세운다. 메로빙거 왕조와 카롤링거 왕조를 거쳐 카를 대제 때 서로마 제국 황제의 지위를 받지만, 카를 대제의 사후 왕권이 약화되면서 프랑크 왕국은 동프랑크(독일), 서프랑크(프랑스), 중프랑크(이탈리아)로 분열하게 된다.
중·근세
동프랑크의 왕인 오토 대제가 중부 유럽의 패권을 잡자 교황은 신성 로마 황제의 왕관을 수여하고, 이로 인해 신성 로마 제국이 성립된다. 신성 로마 제국의 왕위는 여러 왕조를 거쳐 오스트리아가(家)로 넘어간다. 오스트리아가는 계속되는 종교 전쟁과 왕위 싸움으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으로 나누어졌고, 신성 로마 제국은 분쟁을 계속하다 1806년, 나폴레옹 1세에 의해 해체된다.
근대
1862년 독일 북부 프로이센 주의 총리가 된 비스마르크는 '철혈 정책'을 주장하며 군비를 확장하여 독일을 통일하지만,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암살 사건으로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독일 제국은 붕괴된다.
현대
군주제에서 공화제로 바뀐 독일은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거듭난다. 그러나 1929년에 시작된 세계 대공황으로 혼란이 시작되고, 이때 나치스 세력인 히틀러가 정권을 잡게 된다. 이후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병합하고 폴란드를 침입하여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다. 1945년 독일이 연합군에게 항복하고 히틀러가 자살함으로써 오랜 기간 계속된 전쟁이 막을 내린다.
Bundesrepublik Deutschland
표어: Einigkeit und Recht und Freiheit
성립
신성 로마 제국 843(베르됭조약)
독일 제국 1871년 1월 18일
독일분단 1949년 5월 23일
재통일: 1990년 10월 3일
면적
• 전체: 357,050 km2(63위)
• 내수면 비율: 2.416%
인구
82,515,988명 (14위)
GNP
전체:$2446조(5위)
개인:$29,700(25위)
통화: 유로(EUR)
국가도메인: de
국제전화: 49
독일 연방 공화국(獨逸聯邦共和國, 독일어: Bundesrepublik Deutschland, Deutschland ▶(?), 문화어: 도이췰란드, 문화어 옛표기: 독일)은 중앙유럽의 나라이다. 북쪽으로 덴마크와 북해, 발트 해, 동쪽으로 폴란드와 체코, 남쪽으로 오스트리아와 스위스, 서쪽으로 프랑스, 룩셈부르크, 벨기에, 네덜란드와 접한다.
독일은 16개 주로 이뤄진 연방 공화국이다. 역사적으로 여러 독립국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을 거치면서 국민국가로 통합되었다.
독일 연방 공화국은 국제 연합과 NATO, G8의 가입국이며, 유럽 연합의 창설국이다. 유럽 연합에서 가장 인구가 많으며 경제력으로도 중심이 되는 나라이다.
행정 구역
16개 주(Land. 정식 명칭은 연방주 Bundesland)로 구성되어 있다.
- 바덴뷔르템베르크 주 (Baden-Württemberg)
- 바이에른 주 (Bayern)
- 베를린 (Berlin)
- 브란덴부르크 주 (Brandenburg)
- 브레멘 주 (Bremen)
- 함부르크 (Hamburg)
- 헤센 주 (Hessen)
-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 (Mecklenburg-Vorpommern)
- 니더작센 주 (Niedersachsen)
-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 (Nordrhein-Westfalen)
- 라인란트팔츠 주 (Rheinland-Pfalz)
- 자를란트 주 (Saarland)
- 작센 주 (Sachsen)
- 작센안할트 주 (Sachsen-Anhalt)
-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Schleswig-Holstein)
- 튀링겐 주 (Thüringen)
국가로서 독일 역사의 시작은 프랑크 왕국이 3개의 국가로 갈려진 이후 부터 독립적인 역사로 다룬다. 물론, 독일이란 국명을 가진 단일 국가로 등장한 것은 1871년의 일이지만 역사학계에서는 843년 이후 동프랑크 왕국부터 국가로서 독일사로 다루고 있다. 그 이전 게르만 족 역사는 로마사의 일부로 다루기도 하고 유럽 고대사의 일부로 다루기도 한다.
900년 오토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서임받은 이후에도 독일 국경은 한 번도 고정된 적이 없다. 비록 신성 로마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하나의 제국을 이루었지만, 껍데기 뿐인 제국이었고, 독일이란 국가 및 민족 정체성은 없었다.
독일은 도시 국가, 영주국, 주교령, 공국, 왕국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으며, 그 숫자는 몇 백개였다. 산 하나 넘으면 다른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 북독일과 남독일의 지역 차이는 서로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북독일을 대표하는 나라가 프로이센이었고, 남독일을 대표하는 것이 바이에른과 오스트리아였다). 따라서 뭉뚱그려서 "독일사"라고는 하지만, 실제로 독일사라고 할만한 것은 1871년 이후다. 대한민국에서는 프로이센 역사와 독일 역사를 제외한 나머지에 대해서는 관심과 지식이 부족한 편이다. 여기에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 리투아니아의 역사도 포함되며, 현재 독일 내에서 각 주를 이루는 옛 공국들의 역사도 있다. 특히 후자의 부분들은 거의 다뤄지지 않고 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끝난 30년 전쟁도 이런 상황을 더욱 고착시켰다. 특히 백년 전쟁 이후 절대주의 왕권 체제를 지향한 프랑스는 독일을 철저히 조각조각 쪼개놔야 한다는 정책을 세웠다. 이 정책은 19세기까지 거의 300여년 간 프랑스 외교 정책의 한 기둥이었다(프랑스가 이러한 정책을 추구한 것은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갈리아와 게르만 관계의 기억도 한몫한 것이다).
18세기에 이르러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와 대등한 수준의 국가로 성장했다. 독일 기사단 영지에서 출발한 프로이센은 부국강병책과 군국주의 정책으로 군사 강국으로 성장했으며,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며 유럽의 주요 강국이 된다. 유명무실하긴 했지만, 신성로마제국 황제도 겸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는 프랑스에 대해서는 프로이센과 동맹하여 대항하지만, 독일 내에서는 프로이센과 주도권을 놓고 다투는 관계가 되었다.
19세기에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독일 내에 민족주의와 자유주의가 퍼지면서 자연스럽게 통일에 대한 논의가 심화되었다. 이 논쟁의 핵심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를 배제하는 소독일주의와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대독일주의였다. 전자는 순수(하다고 믿어지는) 독일인만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고, 후자는 오스트리아의 입장이었다. 대독일주의에 대한 반발은 슬라브계가 대다수인 오스트리아를 포함시키면 민족적 순수성이 저해된다는 것이 이유였다. 오스트리아 제국 전체를 놓고 보았을때 독일민족인 오스트리아인이 오히려 소수였던 것이다.
이 논쟁은 1861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을 거쳐 완전히 결론이 났고, 이후 오스트리아는 독일 역사에서 제외된다. 이때는 북독일연맹에 남부 지역 독일계 공국들이 참여하는 수준이었으며, 정식으로 독일 제국은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승전 후에 성립되었다.
통일 독일 제국은 제국 수상 비스마르크의 지도로 타 열강들과 평화 공존 관계를 유지하면서 프랑스를 철저히 고립하는 대외 정책을 추진했다. 물론 해외 식민지 쟁탈 경쟁에도 비스마크르의 강력한 입장때문에 추진하지 않았다. 그 정책은 영국, 프랑스 등과 불필요한 마찰을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대신 독일은 뒤늦은 산업혁명을 추진하면서 산업국가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산업국가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내부 모순 및 문제에 직면했으며, 이 내부 문제는 노동조합과 독일 사회민주당을 주축으로 한 사회주의 세력의 활발한 운동으로 표면화되었다. 그러나 제2제국의 더 큰 위기는 외부에서 찾아왔다.
비스마르크 사후 강해진 국력에 취하여 비스마르크가 극력 피했던 식민지 쟁탈과 비스마르크의 외교 정책을 제대로 수행할 후임자를 갖지 못한 불행으로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에 뛰어들었다. 이 전쟁에서 패한 독일은 군주제가 폐지되는 등의 홍역을 치뤗지만, 결국 가혹한 베르사이유 조약에 대한 복수심과 민족적 자긍심에 대한 상처때문에 나치 독일이 집권했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패하여 전범국가가 된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었다(따라서 두 나라의 역사는 각기 또 별도로 다루어진다). 두 나라는 각기 WTO와 NATO의 최전방 국가가 되었지만, 1970년대 초에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이 추진한 동방 정책에 동독이 호응함으로써 양국간 긴장 관계는 한반도처럼 심하지는 않았다. 냉전 종식 후 1990년 10월 9일, 두 나라는 승전4대국과 유럽연합의 승인을 받아 다시 통일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민족 구성
주민의 대부분은 독일인이다. 소수 민족은 덴마크인, 소르브인, 터키인, 러시아인, 유고인, 화교, 중국인, 쿠르드족, 기타가 거주하고 있다.
언어
공용어는 독일어이고, 소수 민족어나 러시아어, 영어, 소르브어, 덴마크어, 프리시아어도 사용된다.
종교
대부분이 크리스트교(가톨릭과 개신교)를 믿고, 일부는 이슬람교, 유대교, 신흥 종교를 믿는다.
인구통계
독일의 인구는 약 8200만명을 넘는다.
여성 1인당 합계출산율은 2004년 현재 (Eurostat 추정) 1.37명이나, 동독지역의 합계출산율은 독일 평균보다 더 적다. 2005년 현재 천명당출산율은 8.4명으로 유럽대륙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며, 천명당사망율은 10.1명이다. 독일 인구의 자연증가율은 만성적으로 감소세를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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