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역사이야기

 

 

 

 

1)고대 스위스 역사
스위스 땅에 인류가 살기 시작한 것은 후기 구석기시대부터이며, 알프스의 빙하지대에 있는 동굴과 바위에는 그들의 자취가 남아 있다. 신석기시대에는 취리히호(湖), 뇌샤텔호 등의 주변에 정착한 호상(湖上) 생활인이 있었으며, 그 항상(杭上) 가옥 유적이 1853년부터 발견되었다. 이들 취락은 그 후 청동기시대·철기시대까지 계속되며 후기 철기시대의 라텐기(期)는 뇌샤텔 호반의 지명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BC 5세기경 켈트인이 정착하였는데, 가장 강력한 헬베티족(族)은 스위스 서부를 차지하고 라인강 북쪽의 게르만인과 대립하였다. 이 부족명에서 스위스의 옛 이름 헬베티아가 생긴 것이다. 헬베티족은 BC 107년 로마의 집정관 카시우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BC 59년에 론강을 따라 갈리아의 평원에 나가려 했으나 카이사르의 군대를 만나 패배했다. 그 다음부터 급속히 로마화되었으며, 4세기에는 그리스도교가 전해졌다. 5세기의 민족 대이동 때에는 서부에 부르군트족, 동부에 알라만족이 정착하였으며, 부르군트족은 라틴화되고 알라만족은 게르만색이 강하여 언어의 경계가 형성되었다.

2. 중세 스위스 역사
게르만인 중에서 프랑크족이 가장 강력한 왕국을 만들었으며, 5세기 말에는 스위스를 병합하였다. 그러나 게르만법에 의한 세습재산 분할제 때문에 국토의 분열과 항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스위스도 분할되었다. 특히 우리 지방은 중유럽과 이탈리아를 잇는 가도에 해당되며 경제적·군사적 요지였기 때문에 남북에서 모두 이를 노렸다. 10세기부터 11세기에 걸쳐 신성로마제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우리 지방을 중심으로 한 구역은 황제직할지가 되었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제후의 세력이 크고 황제의 힘이 약했기 때문에 스위스 지역도 독자성을 지키고 자주정신이 강해졌다. 11세기 말부터 13세기 초까지는 체링가가 지배하였으나 그 후 합스부르크가(家)가 동스위스를 중심으로 세력을 얻어 차츰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대공위시대(1256∼73)에는 자치의 자유를 얻었으나,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 1세가 황제가 되자 이 자치도 위태로워졌다.

3.독립
1291년 신성로마제국의 루돌프 1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스위스 지역의 우리·슈비츠의 공동자치체의 수장(首長)은 합스부르크가의 지배하에 들어간 운터발덴 지방의 수장과 만나 8월 1일 상호지지를 약속하는 영구동맹을 체결하였다. 이‘원시 3주(또는 森林諸州)’ 연합을 스위스의 기원으로 여겨 8월 1일을 국경일로 하며, 국명은 슈비츠에서 따왔다.

합스부르크가의 압제에 저항한 농민들의 활동은 후에 전설화되어 빌헬름 텔의 이야기가 되었으며, 이를 주제로 한 실러의 희곡으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에 대한 문제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으며, 1315년에는 아인지델른의 수도원 보호를 구실로 침입해온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여 3주의 결속을 강화하고 특권을 재확인하였다. 또한 이 때 제국 귀족의 기병대를 격파한 스위스 농민의 장창대(長槍隊)는 그 명성을 떨쳤다. 1322년 루체른, 1351년 상업도시인 취리히, 1352년 글라루스·추크, 1353년 베른이 포함되어 8주 동맹이 성립되었다.

그 후 슈바벤과 라인 지방의 도시들과도 연합하여 합스부르크가에 대항한 동맹은 옛 영토를 회복하려는 레오폴트 3세의 군대를 젬파하(루체른주)에서, 알브레히트 3세의 군대를 네펠스(글라루스주)에서 격파하고 독립적 지위를 확보하였다. 1474년부터는 부르고뉴의 샤를 호담공의 침입을 막은 스위스 민병은 프랑스 루이 11세의 용병이 되어 더욱 용맹을 떨쳤다. 그러나 8주 동맹은 본래 국가를 형성할 의도가 없었고 각 주는 저마다의 이익을 지키기에 급급했기 때문에 도시적 성격의 주와 농촌공동체적 주 사이에 대립이 일어나 굳건한 조직을 가질 수 없었다.

그리하여 부르고뉴에 대한 승리도 영예와 전리품 분배를 둘러싼 분쟁의 원인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 1세가 황제가 되어 부국강병을 꾀하고 이탈리아 정책을 추진, 스위스를 압박하기 시작하자 각 주는 단결하여 과세·병역 및 제국법정의 승인을 거부하였다. 막시밀리안은 1499년에 스위스를 공격하여 슈바벤전쟁이 시작되었다. 스위스는 9개월도 안 되어 각지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바젤화약의 결과에 따라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4.종교개혁
1481년 졸로투른과 프리부르를 참가시키고, 1501년 바젤과 샤프하우젠을 동맹원으로 만든 스위스는 장크트갈렌의 수도원령에서 해방된 아펜첼의 가입과 함께 13주 동맹이 되었다(1513). 당시는 이탈리아전쟁의 시대로 스위스는 루이 12세의 프랑스에 용병을 보냈으나(동부는 밀라노 쪽에 파병), 나중에는 교황 율리우스 2세 쪽에 접근하여 1512년에는 프랑스군을 북이탈리아에서 몰아내어 현재의 이탈리아 쪽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프랑수아 1세의 군대에 패배한 후부터는 프랑스가 용병 징모권(徵募權)을 쥐었다.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나자 취리히에서는 츠빙글리가 복음주의에 입각한 설교를 하기 시작했으며(1519), 용병제 배격, 우상폐지, 교회재산 매각에 의한 구빈법 실시 등 급진적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 움직임은 샤프하우젠·바젤·베른에도 미쳤으며, 신교의 8개주는 동맹하여 원시 3주를 비롯한 구교 여러 주와 대립하였다.

1528년 베른회의에서 각 주의 신앙의 자유가 일단 인정되었으나 2차례의 카펠전쟁 끝에 신교는 패배하고 츠빙글리도 전사하였다. 이 무렵 독자적인 발전을 해오던 서부의 제네바가 사보이가(家)의 압력에서 벗어나려고 스위스 연맹의 보호를 요청하였으며, 프리부르 및 베른과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신교사상이 급속히 퍼졌기 때문에 프리부르와는 단절하였으며, 베른의 원조하에서 1536년에 독립공화국이 되었다.

제네바는 이리하여 신교운동의 중심이 되었으며, 파렐과 칼뱅의 힘으로 개혁이 추진되어 신정정치(神政政治)의 도시가 되었다. 또한 베른은 보 지방을 얻어 강대해졌다. 17세기에도 2차례의 빌메르겐전쟁 등 종교상의 분쟁이 있었으나 파멸적인 종교전쟁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며, 30년전쟁 때에도 중립을 지켰다. 내부 불화가 있으면 용병공급이 중단되기 때문에 프랑스도 스위스의 중립을 원했다. 때문에 시계(서부)·직물(동부) 등의 공업이 크게 일어났고 포도주와 밀도 수출되었으며, 조세도 가벼워서 각 주는 번영을 누렸다. 그리하여 1648년의 30년전쟁을 종결시킨 베스트팔렌조약에 의해서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의 스위스 연맹의 독립을 열국(列國)으로부터 인정받았다.


5. 18세기
스위스 17~18세기에는 각 주마다 각종 정치제도가 있고 법률도 달랐으며, 중앙의 의회는 공동관리지의 행정과 외교문제를 다룰 뿐이었다. 평원의 신교 6개주는 산촌의 구교 7개주보다 수는 적었으나 공업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군사적으로는 우세했다. 신교와 구교는 각각 아르가우와 루체른에 독립된 의회를 가졌다. 경제적·문화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프랑스이다. 낭트칙령의 폐지(1685)로 많은 신교도가 스위스에 유입하였으며, 계몽주의가 보급되어 볼테르 등의 피난처가 되었다. 또 루소, J.네케르, 크라비에르 등의 사상가·재정가도 18세기에 배출되어 프랑스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절대주의의 영향으로 과두정치가 행해지는 주도 있었으며, 보수적·폐쇄적인 특권 시민계급도 성립하였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자유를 찾아 폭동을 일으키는 지방도 있었으나, 그 반면에는 스위스 병정이 해고되거나 학살당한 일 때문에 혁명에 반감을 가지는 사람들도 많았다. 프랑스-오스트리아전쟁 중에는 중립을 지켰으나 바젤의 개혁자 페터 오크스와 파리의 망명 스위스인 클럽의 조직자 라 하르프 등이 집정관 정부에 출병을 요구했으며, 나폴레옹은 이를 이용하여 젝스·보 지방에 침입하고 밀라노 침입을 위한 길을 확보하였다. 프랑스군은 다시 베른에 진주하여 13주 연맹을 굴복시켰으며, 아르가우에서 헬베티아 공화국의 성립이 선언되었다(1798). 오크스는 프랑스식 공화국 헌법을 기초하였고, 제1회 입법회의도 열렸으나 1803년까지는 거의 무정부상태였다.

6.19세기
나폴레옹은 1803년 파리에서 스위스와의 조정법(調停法)을 발표하였으며, 이것이 스위스의 헌장이 되었다. 이 때 새로이 6주를 더하여 19주가 되었으며, ‘슈비첼란트’라는 정식명칭도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또 각 주의 경계선도 정해지고 주 헌법의 우선도 인정되었으나 프랑스와의 군사협정에서는 병원(兵員)파견의 의무가 생겼다. 그러나 이 조정법도 나폴레옹이 라이프치히에서 패전한 후에는 폐지되었고(1813), 옛 정부가 부활하였으며, 대륙봉쇄령의 영향으로 원료가 들어오지 않아 실업상태였던 동부의 직물업도 다시 활기를 찾았다.

1815년에 개최된 빈회의에서 스위스는 영세중립을 인정받고 새로이 발레·뇌샤텔·제네바를 포함하여 22개주가 되었으며, 연방협약이 스위스의 기본법으로 선언되었다. 이에 따라 각 주는 평등해지고 귀족의 특권도 줄었으나 연방의회의 힘은 아직 미약했다. 보수적인 빈 체제에 대항하여 각국에서 자유주의 운동이 일어나자 스위스는 정치망명자의 피난처가 되었지만 스위스 내부에도 보수와 자유 간의 투쟁이 일어났다. 한편 기계의 도입으로 산업이 발달하고 금속공업이 발생하였으며 관광업도 시작되었다. 그 동안 통일정부를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졌으며, 진보적인 7개주와 반대파의 5개주 사이에는 지방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종교문제가 얽혀서 1844년 카톨릭 7개주는 존더분트를 결성, 1847년 내전에 돌입하였으나 여러 자유주가 다수를 차지한 의회가 파병하여 카톨릭 세력을 격파하고 존더분트를 해산시켰다. 1848년 2월혁명의 영향 등으로 새 헌법이 채택되었으며, 그 때까지의 ‘수개국의 연맹’ 형태에서 ‘연방제의 한 국가’로 바뀌었고 연방정부가 만들어졌다. 프로이센-프랑스전쟁(1870~71) 때에는 중립을 지켰으나, 열강의 재편성과 실업계의 복잡화에 따라 각 주의 서로 다른 법률과 군사제도를 통일해야 할 필요성이 생김에 따라 1874년 연방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헌법개정이 단행되었다. 또 수시로 국민투표를 하는 제도도 만들어졌으나, 국민은 보수적이어서 제안은 번번히 부결되는 일이 많았고 정치는 안정되었다.

8.20세기
제1차 세계대전 때에도 중립을 지킨 스위스는 전후에 그 입장을 유지한 채로 국제연맹 가입이 승인되었으며, 국제연맹 본부도 제네바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스위스는 연맹의 ‘군사제재’에는 참가하지 않는다는 점을 에티오피아전쟁 때 표명하였으며, 1938년 국제연맹에서 사실상 탈퇴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UN(United Nations:국제연합)에는 처음부터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제적십자사 본부를 비롯하여 많은 국제기관의 중심이 스위스에 있으며, 전시(戰時)에는 교전 각국의 이익대표국이 되었고 전후에는 교전 각국의 국제회의의 무대가 되어 인도적인 역할을 다하고 있다. 1986년 UN에 가입하기 위해 국민투표에 부쳤으나 75%의 반대로 모든 주에서 부결되었고, 2002년 3월 3일 이에 관한 국민투표를 다시 실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