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 정리 '에 해당되는 글 6건

세계사 정리

 

 

 

 

 

 

 

1대전의 발발동기

 

이는 시대적으로 슬라브족의 중심인 로마노프왕가 주창해온 범슬라브주의라는민족주의와

독일과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함스부르크왕가의 범 게르만주의가 충돌

영국프랑스 스페인등  브르봉왕조가 지역패권과 식민지 영토확장등에 혈안이 되어 있고 

(삼국동맹과 삼국협상의 충돌)

프러시아(프로이센)를 주축으로 대독일제국을 건설한 빌헤름2세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유럽을 뒤흔들고 있을때

1914. 6.28Austro-Hungarian Emperor Franz Josef (오스트리아-항거리안 황제 프란츠 조셉)

황태자 부처( Franz Ferdinand)가 세르비아(전 유고 현재세르비아)에 군대 열병식참가하는길에 Sarajevo에서 한 세르비아 청년에의해 권총으로 암살된 계기로 1대전이 발발

이 암살사건은 그저 명분에 불과하였고 이 이전부터 각국이 연대하여 블록을 형성하여 전쟁할 이유를 찾지못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라예보의  한발의 총성으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1개월만에 선전포고 곧이어 독일은 러시아에게 선전포고 영국 프랑스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게 선전포고  전 유럽이 3일만에 전쟁의 도가니속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주요원인

삼국동맹과 삼국협상의 충돌

3B 정책과3C정책의 충돌 해외식민지 쟁탈

범슬라브정책과 범게르만정책의 충돌(합수부르그 왕조(독일 오스트리아)와 로마노프왕조(러시아왕조)의 충돌

발칸반도의 슬라브화를 저지하기위한 전쟁 러시아 남진정책 저지

 

1.삼국협상

1891년 러·프 동맹

1904년 영·프 협상

1907년 영·러 협상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독일의 제국주의적 침략은 유럽·아프리카의 각지에서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제국주의 제국과 대립·충돌하게 되었다그 때문에 비스마르크 시대에는 교묘히 분리되었던 영국·프랑스·러시아 3국이 독일에 대하여 강한 경계심을 품고 서로 가까워지게 되었다독일을 고립화시키기 위하여, ,각각 체결되어 외교적·군사적 동맹체제를 정비했다.

삼국동맹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로 구성된 삼국동맹의 제국주의 국가끼리 대립이 시작되어 제1세계대전이 일어났다.

 

2.영국의 3c정책과 독일의 3b정책(제국주의 확장정책)

제국주의 확장정책으로 말미암아  영국과 독일은 얼마후 제1세계대전에서 각각 3국협상과 3국동맹의 일원으로 전쟁을 하게 되었으며 이는 유럽의 강국이라 자부하는 영국과 독일의 식민지 재정책의 결과입니다

 

영국은 전세계곳곳에 식민지를 경영했지만다소 늦은 근대화와 통일로 뒤처져있던 독일은 식민지 확보를 하려고 하면 영국이나 프랑스가 방해를 하게되어 영국 프랑스가 관심을 갖지않은 지역을 선택하게된것입니다

1880년대부터 시작된 영국의 3c정책과 독일의 3b정책이었으며 각각 카이로(Cairo)ㆍ 케이프타운(Capetown)ㆍ 캘커타(Calcutta)를 연결하여 아프리카와 인도양의 확보를 목적으로 하는 것과  베를린(Berlin)ㆍ 비잔티움( Byzantium)ㆍ바그다드(Baghdad)를 연결(철도부설)하여 소아시아와 중동지방의 팽창 즉 근동지방확장을 목적으로 한 것이 바로 독일의 3B 정책입니다   

이런  확장 정책은 다른 경쟁국들과의 마찰도 있었지만 , 1890년대에 들어오면서 독일의 공업과 무역이 영국의 구세력을 위협하자 더욱 첨예화하였으며군비경쟁으로까지 확산 되었습니다

 

1대전은 영국과 독일의 직접 대립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보면 합스부르그 왕가와 영국 프랑스의 부루봉 왕가의 대결이었습니다 여기에 러시아의 남진정책이 물려 영국 독일은 다시 러시아를 저지하는데 협력하게되었으며  이런 밀월이 끝나자  세계대전의 시작이  바로 식민지 쟁탈전의 전초였습니다

 

3.범슬라브주의(Pan Slavism)와 범게르만주의의 충돌 (러시아 로마노프왕가중심) (독일 합수부르그 왕가중심)

러시아의 대외정책중 하나입니다 슬라브 민족권(언어 종교)이 단결하여 유럽세력에 맞선다는 정책특히  발칸 반더지역 슬라브 민족 세르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슬라브 언어 사용국가들과  러시아 정교를 믿고있는 국가간 협력 결속하자는 러시아 정책 

범 게르만니즘(Pan Germanism)(독일 합수부르그 왕가중심독일 오스트-항거리 중심으로 연합한  범슬라브주의에 대적하는 민족주의 바로이 두가지 상반된 주의 주장 정책이  1대전의 불씨입니다

 

 

1. 주요일지

 

   

              

    

                    

1914.6.28

프란츠 황태자부처  피살

1915.5.23

이태리 오스트-헝가리에 선전포고

1914.7.23

세르비아 흑수단 대표체포요구

1915. 9.11

영국군최초로 탱크 제작전투시작

1914.7.24

세르비아 러시아에 지원요청

1916.2.21

독일군 베르뎅 공격

1914.7.28

오스트헝가리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1916.3.9

독일군 폴투칼에 선전 포고

1914.8.1

독일 러시아에 선전포고

1916.8.29

힌덴부르크 독일 참모총장 취임

1914.8.4

독일군 벨기에 점령

1917.4.6

미국독일에 선전포고

1914.8.4

영국 독일에 선전포고

1917.6.29

그리스 독일에 선전포고

1914.8.12

오스트헝가리 세르비아 공격

1917.7.17

영국왕조지5  윈즈로 개명

1914.8.26

탄넨베르그전투시작

1918.1.8

미국윌슨대통령 14개 평화조약 선언

1914.9.6

프랑스 마른 전투시작

1918.10.3

맥스베이든 독일 수상 임명

1914.10.29

터키 독일측연합군에 가담

1918.9.9

빌헤름2세황제 퇴위

1914.12.25

서부전선 크리스마스 휴전

1918.11.11

1대전 종전

1915.4.22

독일군 개스전시작

1919.1.12

파리평화 협상

1915.5.7

루스티아나호 침몰

1919.6.28

베르사이유협정 조약

 

2. 1차 세계대전  전쟁사에 미치는 영향 

참호전이 가져다 주는 지구전 소모전의 비효율성

기관총의 등장으로 전술및 전투 개념의 새로운 정립

독개스 출현으로 인한  전쟁사에 화학전의 시초가 된점

 

3.후유증및 결과

끝내 독일을 중심으로한 함스브르그왕조가 멸망하고 독일은  유사이래 엄청난 전쟁보상비를 물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독일은 이 엄청난 전쟁보상비를 해댈능력이 없어 결국은 2세계대전으로 이어지게된 경우 입니다.

1세계대전 중세왕조들이 그들의 블록을 형성하여 몰락하는 왕조를 재 건설하는의미와 식민지 수탈정책에서 다른나라와 뒤질세라 각축장이 벌어졌고 이 왕조블록은 새로운 물결이 엄습해오는과학 기술등 산업혁명의 가속화와 국제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인식하지 못하여 전쟁이란 옛날 방식을 채택하여 유럽세계 발전에 100년이상 후퇴시키고 그 세계적 주도권을 미국에게 내놓은것이 되었습니다.

 

전쟁결과

1.전통유럽지배세력의 퇴조

2.해외 식민지의 독립또는 상실

3.전쟁보상비로 인하여 독일 국민 압박하여 애국심 고조

4.독일 애국심이 힛틀러의 등장을 합리화시켰음

5.독일 채무국에서 탈출할수있는 방법이 군비 증강 혁신

6.국제사회에서 유럽의 입지가 축소

7.러시아 혁명의 기폭제 

8.2세계대전 가속화 요인

9.유럽왕조의 퇴조또는 몰락

10.독일제국 러시아제국 오토만제국 오스트헝가리제국 멸망

11.동유럽신생국가 건설

12.연합군영국 프랑스 이태리 러시아 미국

13.패전국독일 오스트 헝가리 불가리아 오토만제국

14.전사자:

        

연 합국 측

패 전국 측

합계

         

전사자

5,000,000

4,000,000

9,000,000

 

전투병력민간인 포함

 (미군:116,708)

세계사 정리

 

 

 

 

 

태국을 구성하고 있는 타이족은 중국 남부 지금의 운남성에 살던 민족으로 13세기경 본격적으로 짜오프라야 강변에 이주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태국역사가 시작되었다.


가) 쑤코타이 시대(1238- 1378년) 1219년: 징기스칸의 정복 전쟁 시작

1231년: 고려에 몽고 침입 시작

1299년: 오스만 터키 제국 일어남


크메르 제국이 쇠태하면서 태국의 두 장관, 쿤 방끌랑타오와 쿤 빠므망은 1238년 크메르 제국의 북부를 점령하여 태국 민족 최초로 독립 왕국을 건설했다. 이것이 쑤코타이 왕조다.

왕조는 3대 왕 람캄행 대왕 때 전성기를 맞이하여 영토가 현재의 태국과 거의 같은 크기까지 확대되었다. 1292년 크메르 문자를 개량하여 독특한 태국 문자를 만들어 냈고 스리랑카로부터 처음으로 불교를 받아들여 국교로 삼았다.


나) 아유타야 시대(1350-1767년) 1393년: 이성계 조선 왕조 개국

1398년: 티무르 인도 침입

1453년: 오스만터키제국 비잔틴멸함

1517년: 오스만터키 이집트 정복

1592년: 임진왜란 일어남

1687년: 오스만터키제국 쇠락함

쑤코타이 남쪽의 아유타야에 새 왕조를 건설했다. 쑤코타이 왕조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라마타보디 1세가 태국 사상 처음으로 법전을 만들고 1378년 쑤코타이를 병합하여 태국 전국을 통일, 동남아시아 최고의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에 이웃 나라 버마(지금의 미얀마) 의 침략을 받게 되고 1569년 버마군에 항복하면서 이후 15년간 버마의 지배를 받았다.


다) 톤부리 시대(1767- 1782년)


아유타야 붕괴 후 태국 동부 해안에 피신해 있던 딱신이 아유타야를 탈환하고 1767년 톤부리(방콕의 건너편)에 수도를 정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딱신의 정신 이상으로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고 1대 왕 겨우 15년만에 톤부리 왕조는 끝나고 말았다.


라) 방콕 시대(1782년- 현재, 짜끄리 왕조)

1794년: 이란 통일

1804년: 러시아, 터키 전쟁

1829년: 그리스 터키서 독립

1839년: 1차 아프칸 전쟁


1782년 수도를 톤부리에서 짜오프라야강 건너편, 현재의 방콕으로 옮기고 새 왕조를 열었다. 이 때부터 왕을 라마라 칭하고 현재까지 이르게 되었다.

현재 태국의 국왕은 1946년 등극한 라마 9세 푸마폰 아둔야뎃이다. 1996년은 푸마폰 국왕 즉위 50주년이 되던 해로 현존하는 전 세계 국가 지도자 중 최장기 재임이다.

 

 

 

 

 

 

태국의 왕궁

 

 

 

 

"그랜드 팔래스"를 가봤다면 에메랄드 사원(왓 프라깨우)가 있는 본당을 둘러

싼 회랑에 화려한 벽화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 벽화는 라마키안이라고 불리는 태국의

전통 서사시를 그림으로 구성하여 제작한 것으로 총170면 8칸으로 나누어 그려져 있다. 

라마키안은  총 116권의 방대한 서사시로 전체가 연결 된 8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라마키안을 바르게 이해할면 인도의 라마야나를 먼저 살펴 보아야 한다.

 

두 작품 모두 총 116권에 달하는 장편이고, 팔리, 싼쓰크릿어가 80%를 넘는 고어(古語)로 된 서사시이다.

 대략 5 세기 B.C에 Valmiki(인도 시인)는 Ramayana을 창작한다. 이 서사시는 오늘날까지도 매우 인기가 있다. 이 라마야나는 태국의 라마키안의 원작이 된다. 라마야나의 태국 버전의 메인 줄거리는 라마키안은 악마의 왕인 토사간(라마야나의 라바나)이 라마(태국의 왕)의 아내 시타를 납치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속의 라마는 흰두교의 신 비쉬누의 인간으로 현신이다. 그는 납치된 그의 아내 시타를 구출하기 위해 원숭이 군대의 지원을 받는다.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를 창작할때 시인 발미키는 두가지 전설을 조합하였다. 한가지는 북부 지방에서 뿌리를 두고 내려오는 아리아인의 전설이다. 대 서사시는 야유타야의 왕자 라마의 이야기를 첫번째 장으로 다룬다.  

두번째 전설은 남부 지방에서 내려오는 전설로 이 전설은 드라비디안(남인도계인) 사람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있는 이야기로 굉장한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 악마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발미키는 라마와 악마의의 모든 이야기를 이 서사시에 포함시키지는 않았다. 후대 다른 작가들은 이 서사시에 다른 이야기를 섞어 새로운 버전을 창조해 낸다. 그러나 발미키의 라마야나는 현재까지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라마야나의 대서사시로 기억되고 있다.

어떻게 라마야나가 태국에 전파가  것인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죽음  세기초 동안 동남아시아 전역에 인도의 종교와 정치가 전파되기 시작한다. 이시기에 태국 뿐만이 아니라 동남아시아 대륙의 많은 나라들이 라마야나를 차용했다. 발마키의 저작 외에 다른 작가들에 의한 라마야나 역시 인도에서 주변국으로 퍼지게 된다.

태국의 라마키안은 라마야나의 몇가지 버전을 혼합한 것으로 보이는데 몇몇 남부인도 버전처럼 악마의 왕 "토사칸"이 등장한다. 태국의 라마키안의 악마 토사칸은 나쁜일을 저지르지만 절대악의 존재는 아니다. 행동은 나쁘지만 라마의 아내 "시타"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은 순수해 보인다.  

라마키안은 또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서 전승되고 있는 라마야나와도 비슷한데(Bridhyakorn, and Yupho 1962, P.5 and Desai 1969, p.165) 이렇게 여러 나라의 이야기를 차용해서 조합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태국의 "라마키안" 매우 태국적인 이야기로 변형 되었다.

인도의 라마야나의 라마는 힌두교의 신인 비쉬누(Vishnu) 화신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매우 힌두교적인 관점에서 쓰여진 종교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태국사람들이 전통적으로 믿는 종교는 불교로 태국인들은 라마야나의 힌두교적인 요소들을 벗겨내었다.

 

라마키안에 등장하는 라마는 "" 전생으로 묘사된다.

첫째로 라마는 모든 태국의 관습을 따르는 태국의 왕자이다. 인도의 버전과 같이 태국의 라마키안도 여러 가지 버전이 있는데 가장 인기있는 것 중 하나는 18세기에 짜끄리 왕조의 창시자인 라마 1세가 만든 것이다.

다른 것으로는 그의 아들인 라마2세에 의해 쓰여진 것이 있다.

이후 라마키안은 가면극과 인형극, 그림자 놀이 고전적인 무용극 등 다양한 공연의 소재로 이용되었고 많은 화가들이 사원을 장식하는 그림의 주제로 삼아 왔다.

왜 인도의 종교적인 서사시가 불교국가인 태국에서 인기를 얻게 되었을까?

 질문의 대답은 (Khon) 기원에서 찾아    있다.

태국이 캄보디아의 수도 앙코르를 점령한 시기에 크메르 왕실 무용단(Brandon 1967) 태국으로 데려간다. 그러나  시대의 역사 기록들은 모두 유실되어 정확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1767년의 방콕에 "(Khon)" 존재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시대 이전에 이미 태국에서  무용극이 보급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확실한 것은 (Khon)  야이(작은 인형으로 진행되는 인형극) 라마키안의 이야기를 기초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시대의 동남아시아 지역의 왕국의 왕들은 인도의 사상과 정치, 종교에서 자신들의 통치법을 빌려 오게 되는데 이유는 왕권 강화를 위해 자신을 신격화하고 자신들의 통치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인도의 라마야나의 등장 인물인 "라마"는 신의 현신인 왕자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콘 무용극과 낭 야이(인형극)의 공연은 결국 이 창조된 이야기를 사실인 것처럼 사람들에 인식시키기 위한 왕의 요구로 만들어 진 것이다.

라마키안의 저작 시기로 보여지는 1782년 라타나꼬신 왕국(씨암-지금의 태국)을 설립한 짜끄리 라마티보티왕 즉 라마1세(텅 두엉) 즉위 당시 시대적 상황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시기였다.
아유타야의 멸망을  후 텅두엉은 톤부리에 나라를 세운 탁신 왕의 가장 신뢰하는 장수의 한 사람으로 잃어 버렸던 아유타야 왕국의 땅을 탈환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이후 탁신 왕이 재위 15년 만에 석연치 않은 이유로 처형(기록에는 정신 이상으로 폭정을 행했다고 한다.)을 당하자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 라마1세는 새왕조의 정당성을 세워야 할 필요를 느낀다. 아유타야 시대 말기와 톤부리 시대의 혼란기를 직접 겪은 라마1세는 불교를 국가 안정과 번영의 한 기본적인 요인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등위 후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이 불교의 개혁이었다. 국가의 도덕적 기강과 질서의 회복에 우선적인 비중을 두었기 때문에 혼란에 빠져있던 승가(僧家)를 정비하여 승가의 권위를 회복 시켰다.
전통적인 불교 후원자 및 통제자로서의 역할에 대해 분명한 인식을 갖고 있었던 그는 불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새로운 타이왕국을 건설하는 탐마라차로서 전통적인 왕권의 역할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는 종래의 역사 해석의 관점이었던 아유타야 전통의 복원이 아니라 아유타야 전통의 개혁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라마키안
은 라마야나와 달리 제1장에서 국가탄생의 유래를 불교의 우주론인 삼계론(三界論)에 바탕을 두고 건국 신화의 형태로 저작하였다. 이제까지는 삼계(三界)의 존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지옥 세계로부터 시작하여 인간 세계 그리고 신의 세계를 포함하는 색계(色界)와 인식의 세계인 무색계(無色界)를 거쳐 니르바나의 순서로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라마키안에서는 천상의 세계에서 시조(始祖)가 탄생하여 인간계로 내려와 나라를 건국하는 구성을 통해 의도적으로 우주의 존재론적 결정의 축에 있는 인간 세계를 강조하였다고 보여진다. 뿐만 아니라 업(業)사상(일상 행위에 따라 내세에서의 존재가 결정 된다)을 도입하여 국민들이 선업(善業)을 축적할 수 있는 사회적 사상을 제공하고 왕권을 정당화한 것으로 보여 진다.
 


라마키안 줄거리
제1장 : 최초의 왕국과 왕의 출현
수미산(짝끄라완) 꼭대기에 살고있던 히란이라는 나찰(히란약)이 이쑤언 신의 은총으로 얻은 법력을 이용하여 천지를 진동시키며 천계(天界), 인간계(人間界), 그리고 지하계(地下界)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이쑤언 신은 히란약의 횡포로 불안에 떨고있는 삼 세계의 주인들을 구하기 위해 프라나라이(나라야나=비슈누신)를 파견하였다. 즉시 땅의 세계로 내려와 멧돼지로 변신하여 히란약을 살해하고 지구를 평정한 프라나라이는 낙(용 또는 뱀)을 타고 유해의 바다에 이르러 베다 찬가를 불렀다. 그랬더니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났고, 꽃 안에서 귀골의 동자가 나타났다. 나라이는 그 동자를 천에 싸서 이쑤언 신에게 헌상하였다. 이쑤언 신은 그 동자에게 아노마딴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최초의 아요타야국의 왕으로 명하였다.
지상으로 내려가 왕국을 건설하라는 이쑤언 신의 명을 받은 프라나라이는 비슈누신의 권유로 네 명의 행자가 고행을 하고있는 타와라와디숲에 도시를 건설하고, 아짜하카위, 육아카라, 타하, 야카의 행자 네 사람 이름의 첫 글자를 딴 아·유·타·야와 숲의 이름을 합쳐 아유타야타와라와디라 지었다. 아유타야 왕에 즉위한 아노마딴은 프라나라이의 화신으로 여겨져, 악마를 퇴치하기 위한 법력과 네 가지 무기를 받았다.
이후의 이야기는 아노마딴의 아들 아차반의 탄생과 왕위계승, 이 이야기의 중요 등장인물의 탄생과 환생 그리고 소 왕국들의 설립과정이 상세하고 장황하게 묘사되어 있다.


제2장 : 프라람의 탄생
아요타야 왕국의 톳싸롯왕이 신에게 자식을 구하는 제의를 거행한다. 네 덩어리의 밥을 만들어 신에게 바쳤는데, 그 향기가 온 천지를 진동하여, 롱까국에 살고 있던 낭몬토가 그 냄새를 맡고 깍까나쑨신을 시켜 반 덩어리를 훔쳐오게 한다. 남은 세 덩어리 반을 부인 세 명이 나누어 먹은 후 정비인 낭까오쑤리야는 프라람을, 낭까이께씨는 프라프롯을 낭싸뭇테위는 프라락과 프라쌋따룯 등 네 명의 아들을 낳았다.
한편 피펙은 낭몬토가 훔쳐온 밥을 먹고 낳은 딸이 불행을 가져올 징조라며 물 속에다 버리라고 예언하자 아버지인 톳싸깐은 딸을 물에 띄워 버린다. 수도승 차녹과 나이쏨이 강에서 목욕을 하다가 연꽃 속에 유골 넣는 용기가 들어있는 것을 보고 주워다 뚜껑을 열었더니 작은 아기가 있었다. 아기는 미천한 출신이 아닌 왕가의 후손으로 여겨졌다. 나이쏨이 데려다 정성껏 키웠는데 아기가 왕가의 후손일 경우에 후일이 복잡해질 것을 우려한 수도승 차녹은 부모를 찾아 주기로 하였다. 아기를 전과 같이 용기에 담아 싸이나무 아래 구덩이를 파고 나무판 위에 용기를 놓은 후 흰색의 왕실용 우산을 씌워놓고 부모가 찾아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차녹이 데려다 "시타"라 이름짓고 미티라 왕국으로 데려가 양육하였다. 시타는 아름다운 아가씨로 성장하고 결혼할 나이가 되자 마하타누모리라는 이쑤언 신의 활을 쏠 수 있는 사람을 사위로 삼겠다는 방을 내걸었고, 그 활쏘기 시합에서 프라람이 승리하였다. 차녹은 톳싸롯 왕을 초청하여 프라람과 시타의 결혼식을 성대히 치루어 주었고 프라람 일행은 아요타야로 돌아갔다.



제4장 : 시타를 사랑하게된 토사칸
롱까국의 치우하(혀, 설舌)는 토사칸 왕이 국외 순시를 떠나자 7일 동안 밤낮으로 자지 않고 나라를 지키다 마지막 7일째의 밤, 밀려오는 졸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라가 염려되어 잘 수 없었던 치우하는 혀를 길게 내밀어 왕국을 통째로 덮은 뒤에 깊은 잠에 빠졌다. 7일만에 롱까로 돌아온 토사칸은 암흑에 쌓인 도시가 적의 소행으로 파괴된 것으로 착각하고 잠에 빠져있는 치우하가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격분하여 짝이라는 톱니가 달린 원형의 무기를 던져 죽였다.
미안한 마음의 토사칸은 억울한 남편의 죽음으로 슬픔에 쌓인 낭쌈마낙카에게 도시를 구경 다니며 새 남편을 만나보라고 권하였다. 코타와리 강가에서 마침 그 곳에 당도한 프라람과 시타, 프라락을 우연히 만난 낭쌈마낙카는 프라람을 보고 반해 인간으로 변신하여 프라람을 유혹하였으나 거절 당한다. 화가나 시타에게 달려들어 때리려 하자 프라락이 낭쌈마낙카의 손과 발을 잘라 버렸다. 아픔과 분을 참지 못한 그녀가 오빠 프라야컨에게 고해 바치자 프라야컨과 그의 부하 뜨리씨안은 차례로 프라람을 죽이러 갔다가 도리어 죽임을 당했다. 그녀는 롱까의 토사칸을 찾아가 시타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면서 같이 가보자고 토사칸을 충동질했다. 시타를 보고 반해버린 토사칸은 마릿에게 사슴으로 변하여 시타를 유혹하도록 하였다.
예쁜 사슴을 본 시타가 프라람에게 사슴을 잡아 달라고 하자 동생에게 아내를 부탁하고 사슴을 잡으러 숲 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타난 사슴이 프라람의 목소리로 프라락을 유인해간 후, 이상하게 여긴 시타가 프라락을 돕기 위해 집밖으로 나왔다. 이때를 틈타 시타를 유괴하여 롱까국으로 가던 토사칸을 싸다유가 공격하였고 시타는 반지를 떨어뜨려 자신의 행방을 알린다. 사슴을 잡으러 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온 프라람은 시타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때마침 시타의 반지를 가지고 달려온 싸다유를 통해 그간의 경위를 듣는다. 시타를 구하는데 도움을 청하기 위하여 형제는 숲으로 하누만과 쑤크립을 찾아간다.



제5장 : 시타를 찾아서
프라람을 만난 하누만은 쑤크립을 데리고 와 팔리에게 추방당한 경위를 들려 준다. 프라람은 쑤크립이 팔리를 쳐부수는데 도움을 주고, 쑤크립은 시타를 찾는 일을 돕기로 약속하였다. 프라람은 활을 쏴 팔리를 제거하고 킫킨으로 들어가 나라를 세우고 쑤크립에게 통치하도록 한다. 칸타맛 산으로 가는 도중 금 공작은 시타의 소식을 전해 주었고 원숭이로부터는 시타의 싸바이( 어깨에 두르는 띠)를 건네 받았다.
하누만은 시타를 구하기 위해 군대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롱까로 간다.



제6장 : 하누만의 활약

하누만이 롱까에 당도하여 모든 성을 돌아다녔으나 시타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토사칸의 정원에서 시타를 발견하였으나 프라람이 보낸 것을 알리 없는 시타 앞에 선뜻 나설 수가 없어 작은 원숭이로 변하여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이때 토사칸은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시타를 괴롭히기 위해 낭약(여자귀신)을 시켜 시타를 비난하게 하였다. 비난을 들은 시타가 목을 매어 죽으려 하자 하누만은 프라람의 반지를 내어주며 프라람이 찾으러 온 사실을 알려준다. 그런 후 정원을 부수고 화가 나서 달려온 토사칸의 아들 싸핫꾸만을 죽였다. 토사칸이 길길이 날뛰며 싸우려하자 일부러 져주어 잡힌다. 화가 난 토사칸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여 하누만을 죽이려 했으나 아무리 해도 죽일 수가 없었다. 하누만이 자기를 태워 죽여 달라고 청하니, 토사칸은 죽일 요량으로 하누만의 몸에 불을 붙였고 꼬리에 불을 달은 하누만은 롱까국 사방을 뛰어 다니며 불을 내 롱까국을 태워 없애 버렸다.



제7장 : 프라람과 토사칸의 전쟁

하누만으로부터 시타의 소식을 들은 프라람은 칸타끼라산의 바닷가에 진을 쳤다. 한편 토사칸은 흉몽을 꾼다. 불안한 토사칸은 예언자 피펙에게 해몽을 의뢰했는데, 흉몽이라며 시타를 돌려보내 주어야 한다고 말하자 토사칸은 피펙이 프라람과 한편이라며 쫓아냈다. 혼자가 된 피펙은 프라람의 휘하로 들어가 프라람의 군대를 교란하려던 토사칸의 온갖 술수를 간파하여 프라람에게 알려 주었다.
그 동안 시타를 돌려보내 주라는 주위의 권유를 듣지 않은 토사칸은 전쟁을 하게 된다. 아들 인트라칟이 7년 동안 아키(불의 신)에게 드린 기도 끝에 삼신으로부터 받은 세 개의 활을 가지고 프라락과 네 번의 싸움을 벌이다 프라락의 마법의 화살을 맞고 죽음을 당한다. 아들의 죽음에 토사칸이 직접 전쟁에 나서자 열 명의 아들이 따라 나서고 네 차례에 걸쳐 전쟁을 하다가 마침내 죽임을 당한다.
 
( 이 전쟁 장면이 가장 재미있고 널리 알려져 있어 때로는 이야기 전체가 영웅신화로 알려질 정도로 독자들에게 인기가 있다. 가면극에서 변사의 입담에 따라 여러 가지 이야기가 가감되기도 한다.)피펙은 시타가 프라람에게 돌아가도록 도와주었고, 시타는 적군에 잡혀갔었던 자신의 순결함을 모든 사람들에게 증명하기 위하여 전통적으로순결을 증명하는 의식인 루이파이(불에 달군 숯 위를 맨발로 걷는 시험)를 행한다. 프라람은 피펙을 롱까왕으로 추대하고 시타와 함께 아요타야 왕국으로 돌아갔다. 아요타야 왕국으로 돌아온 프라람은 하누만의 공적을 기려 아요타야 왕국을 통치하도록 하였으나 하누만이 하루 만에 나라를 반환하자 "롭부리"라는 나라를 만들어 통치하도록 하고, 그 밖의 장수들에게 높은 지위의 포상을 하였다.

 

8장 : 아요타야의 평화
토사칸이 죽은 후 그의 아내 낭몬토는 임신 일 개월의 몸으로 피펙의 아내가 되었다. 낭몬토의 아들 파이나쑤리웡이 이 사실을 알 게 되어 피펙을 증오하여 싸움을 벌이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프라람은 동생 프라프룻과 프라쌋따룯을 보내 피펙을 도와준다.
한편 토사칸의 유모인 마녀 삐쌋아둔이 복수를 하기 위해 시타를 찾아간다. 이십개의 얼굴을 가진 토사칸의 모습이 어떻게 생겼나 그려 보여 주라고 유혹한다. 토사칸의 모습을 그리자 때마침 프라람이 숲을 순시하고 돌아온 것을 안 삐쌋아둔이 그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시타가 아무리 그림을 없애려 해도 찢어지지도 불에 타지도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침대 밑에 숨겨 두었으나 프라람이 이것을 발견하게 된다. 시타를 의심하게 된 프라람은 시타를 죽이라고 프라락에게 명하고, 프라락은 형수가 숲으로 도망가도록 내 버려 두었다. 시타는 숲 속에서 도인의 도움을 받고 지내면서 아들을 낳아 프라몽꿋이라 이름 짓고, 도인은 프라몽꿋의 안전을 위해 똑같이 생긴 아들 한 명을 더 만들어 프라롭이라 불렀다. 두 아이는 도인으로부터 배운 여러 학문과 활 솜씨가 탁월하여 그 명성을 아요타야 왕국에까지 떨치게 되었다.


프라람이 말 축제에서 "누구든지 이 말을 만나는 사람은 말에게 경의를 표하라. 복종하지 않는 자는 반역에 처한다."는 글귀를 말의 목에 달아 숲 속에 놓아주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달려온 말을 타고 놀던 두 아들은 명령을 어긴 죄로 프라람의 군대에 잡혀간다. 프라람은 진지에 도착한 두 명의 사내아이가 자신의 아들 임을 알게되고 그들을 데리고 시타를 찾아가 왕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였으나 시타는 거절한다. 프라람은 하누만을 시켜 프라람이 죽어 장례식을 치를 예정이니 참석해 달라는 계책을 꾸미는데, 장례식에 참석하러 왕국으로 돌아 온 시타는 그 말이 거짓임을 알고 지하 세계로 들어가 용과 함께 지낸다. 프라람은 잘못을 뉘우치기 위해 숲으로 들어가 1년을 지내면서 많은 도깨비들을 평정하였다. 이쑤언 신은 프라람과 시타가 아직도 헤어져 있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을 불러 천계에서 다시 결혼식을 올리게 하여 행복하게 살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 후 아요타야 왕국은 평온하였다.

 

 

세계사 정리

 

 

 

서인도제도에서 2번째로 큰 히스파니올라섬의 동반부를 차지하는 나라.

위치 : 아메리카 카리브해
면적 : 4만 8671㎢
인구 : 883만 3000명(2002)
인구밀도 : 181.5명/㎢(2002)
수도 : 산토 도밍고
정체 : 공화제
공용어 : 에스파냐어
통화 : 도미니카 페소(RD$)
환율 : 17.10RD$ = 1달러(2002.9)
1인당 국민총생산 : 2,130달러(2000)


면적은 4만 8671㎢, 인구는 883만 3000명(2002)이다. 인구밀도는 181.5명/㎢(2002)이다. 정식명칭은 도미니카공화국(Repblica Dominicana)이다. 카리브해에 있는 국가로 수도는 산토 도밍고이고, 언어는 에스파냐어를 사용한다. 서부의 아이티와는 같은 섬을 이분하고 있으나, 면적은 아이티의 약 4배이다. 콜럼버스가 제1차 항해 때 발견한 이래 정복·점령·독재·내란 등 고난의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1. 자연

도미니카는 아이티와의 국경 북쪽에서부터 남안 중앙부에 걸쳐서 중앙산맥(최고봉은 3,175m의 두아르테산)이 뻗어 있어 국토를 북동부와 남서부로, 2대 1의 비율로 이분하고 있다. 중앙산맥의 북쪽 북부산맥과의 사이에 전개된 베이가레이알계곡(시바오 지방)은 옥토를 이루고 있어, 주요도시도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길이 400km의 북(北)야퀘강은 북서쪽으로 흘러 대서양으로 유입되고, 오사마강(江)은 남쪽으로 흘러 산토도밍고에서 카리브해(海)로 유입된다. 남서부에는 남(南)야퀘강과 해면보다 낮은 엔리키요호(湖)가 있으나, 해안을 따라 뻗은 남부산맥으로 남쪽이 막혀서 산지성(山地性)을 이루고 있다.

기후는 열대권에 속하여, 저지에서는 연중 30℃ 내외의 기온을 이루나 카리브해로 불어오는 북동무역풍의 영향으로 견디기가 쉽고 고지에서는 연평균 10℃ 내외를 이루고 있다. 연강우량은 북부가 2,000mm 이하, 남부가 1,500mm 이하이다. 영구경지 9%, 경작 가능한 땅 21%, 초원43% , 산림 12%로 이루어져 있다. 가끔 열대성 폭풍과 허리케인이 발생하여 큰 재해를 일으키곤 한다.

2. 주민

도미니카의 2000년 인구증가율은 1.64%, 출생률은 1,000명당 25.15명, 사망률은 4.72명, 영아사망률은 35.93명이다. 평균수명은 73.2세로 남자는 71.12세, 여자는 75.38세이다. 인구의 34%가 15세 이하로 유소년층(幼少年層)이 많다. 인종구성은 백인과 흑인과의 혼혈인 물라토가 73%, 백인이 16%, 흑인이 11%이다. 공용어는 에스파냐어(語)이다. 종교는 가톨릭이 94%, 신교 3% 그리고 나머지는 여러 종교를 믿고 있다.



3. 역사

도미니카는 1492년에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되어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되었다. 16세기 중에 원주민은 전멸하였고 아프리카 흑인노예가 대량으로 수입되어 사탕수수 재배에 혹사되었다. 1795년 바젤조약에 의하여 프랑스에 이양된 이래 아이티군(軍)에 의한 점령·독립, 에스파냐통치, 재독립, 아이티에 의한 재점령 등으로 고난의 역사를 거쳤으나 1844년 드와르테의 지도하에 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고 현재의 국가기초를 다졌다. 그러나 그후에도 군벌과 결탁한 토지귀족의 배신행위 때문에 1862∼1865년의 에스파냐 지배를 비롯하여 반란·독재의 반복으로 정치정세는 문란해지고 결국 19세기 말 이후에는 미국의 지배하에 놓였다. 미국은 1917∼1924년 ‘권익의 보호와 질서유지를 위하여’ 해군을 파견하여 1941년까지 세관을 관리하였다.

미국의 동의를 얻어 1930년에 정권을 장악한 라파엘 트루히요는 족벌정치로 민심을 상실하여 1961년에 암살되고, 1963년의 총선거로 발족했던 도미니카 혁명당의 보슈 정권도 7개월간의 집권으로 종말을 고했다. 1965년 4월 대령 카마뇨 등 청년장교들이 보슈의 복귀를 요구하는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미국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실패로 끝나고, 1966년 6월의 선거에서 호아킨 발라게르가 보슈를 누르고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3기에 걸친 대통령 임기 중 정계부패와 인플레의 증대로 1978년 5월의 대통령선거에서 처음으로 야당인 혁명당의 안토니오 구스만 페르난데스에게 패하였고, 8월에는 구스만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처음으로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하였다.

1982년의 대통령·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도미니카 혁명당의 살바도르 호르헤 블랑코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986년의 선거에서 호아킨 발라게르가 재선되었다. 이후 기독교 사회개혁당과 도미니카 혁명당 2개당이 번갈아 정권을 장악하는 양당정치의 형태를 띠어왔다. 그러나 1996년 5월 선거에서 전 대통령이자 도미니카 해방당에 속한 페르난데스가 승리함으로써 다당정치가 시작되었다.

4. 정치
도미니카는 1966년 11월에 제정된 현행헌법에 의하면, 원수는 국민투표에 의하여 선출되는 대통령으로 임기는 4년이다. 국회는 양원제이며 상원은 26주와 수도권에서 한 사람씩 선출되는 의원을 합쳐 40명으로 구성되며 임기는 4년이다. 하원은 인구 5만 명에 한 사람의 비율로 뽑히는 의원 149명으로 구성되며 임기는 역시 4년이다. 2000년 5월의 대통령선거에서는 도미니카 혁명당의 히폴리토 메자(Hipolito Mejia)가 승리하여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주요정당은 도미니카 혁명당(PRD)과 개혁당(PR)이 있다.

도미니카 혁명당은 안토니오 구스만 페르난데스가 1939년에 망명처에서 결성한 것으로서 소자본가·일부의 농민·지식인을 모아 결성한 정당이며, 반제국주의·반과두제(反寡頭制)의 입장을 취했으나, 기반이 안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개혁당은 트루히요 사후의 체제유지를 목적으로 1964년에 결성된 보수정당이다. 그밖에 예전의 혁명당 당수 보슈가 1973년 말에 만든 도미니카 해방당, 1970년에 개혁당에서 이탈한 극우분자를 규합하는 민중통합운동 등의 소회파(小會派)가 있다. 도미니카 공산당은 1944년에 창립되어 도미니카 혁명민주당(1946년까지), 도미니카 인민사회당(1965년까지)의 명칭으로 거의 비합법상태로 활동해왔으나, 구스만 정권 성립 후 합법화되었다.

외교적으로는 대미(對美) 협력과 OAS(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미주기구)를 존중하고 있고, NAFTA(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북미자유무역협정) 및 기타 지역의 경제 통합 움직임과 관련 중남미와 카리브해(海) 연안 국가들의 지역통합을 위한 교량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공산권과는 국교(國交)가 없다. 군사력은 총 2만 3400명으로 육군(1만 3000명)·공군(4,800명)·해군(5,600명)으로 이루어지고 수도경찰대 1만 2000명이 있으며, 군복무는 지원병제이다.

5. 경제

도미니카는 외국자본, 특히 미국자본과 대지주세력의 지배하에서 농업을 주요산업으로 하며, 사탕수수를 비롯한 소수의 산물에 의존하는 모노컬처(단일재배)를 특징으로 한다. 노동인구의 절반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농업생산은 국민총생산(GNP)의 1/5 정도를 차지하나, 대토지소유제에서 사탕수수·담배·카카오·커피·바나나 등 수출작물을 주로 재배하고 있다. 쌀·옥수수 등 국내소비용 작물도 재배하나 부족분의 식료를 대량 수입하고 있다. 제조업은 자유무역지대 업체가 주류를 이루고 있어 2000년 말 현재 46개공단에 481개 업체가 입주하고 있으며, 약 19만 7000명의 현지인력이 고용되어 있다. 공업의 대부분은 제당업이 차지하고 있고 그밖에도 면직공업·시멘트 공업 등의 경공업이 있으나 미미하다. 제조업에서는, 기업수로는 국유(옛 트루히요家 소유)가 60%, 외국자본소유가 28%, 민족자본소유가 12%이나 자본총액의 약 반은 미국민간 직접투자에 의하고 있다.

광업도 미국자본의 원조에 의해서 수출용으로 생산되는 보크사이트를 주로 산출하고 있으며, 그 밖에 금과 구리의 자원을 비롯하여 철·은·납·석유가 매장되어 있다. 수출은 원료수출·제품수입의 후진적 무역구조를 이룬다. 최대의 주된 무역상대국은 미국으로 수출의 80%, 수입의 45% 정도를 차지한다. 무역수지의 적자, 더욱이 운임·차입금의 상환 등에 의한 적자와 경상수지(經常收支)의 적자 등은 차관(40%) 및 미국의 증여(60%)에 의하여 보충되고 있다. 주요 교통수단은 자동차이며, 자동차도로는 총연장 1만 7645km이고, 철도 총연장은 1,770km이며 대부분이 제당소 전용이다. 도미니카는 카리브지역 최고의 통신선진국으로 전화사정은 양호하다.

2000년 경제성장률은 7.8%이고 실업률은 13.9%이다. 수출은 57억 달러, 수입은 94억 달러이고 주요 수출품은 니켈, 설탕, 담배, 커피, 카카오, 수입품은 연료이다. 주요 수출국은 미국, 독일, 네덜란드, 한국, 영국, 수입국은 미국, 베네수엘라, 멕시코, 일본, 에스파냐 등이다.

6. 사회
국민들은 도미니카가 콜럼버스가 미주대륙을 발견한 이래 최초로 식민활동을 시작한 곳으로, 중남미의 원조라고 생각하여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도미니카는 초등 의무교육 6년간은 무상으로 실시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교육수준이 낮아 문맹률은 15세 이상에서 17.9%이다. 신문은 최대일간지 《리스틴 디아리오 Listin Diario》를 포함해 7종 이상이 있다. 라디오방송은 HJLB를 포함해 전국에 250개국 이상이 있으며, TV방송은 국영 TV와 미국 케이블 TV를 포함해 7개국이 있다.

1980년대 후반의 도미니카 사회는 도미니카의 스페인-카리브해의 혈통을 반영한다. 도미니카 사회는 인종과 계급으로 명백하게 나누어져 있으며 소수가 사회의 부를 장악하고 있는 반면 대다수 서민들은 생존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중산층은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일반적으로 도미니카 사회는 신분 상승의 길이 상대적으로 막혀 있는 편이며, 많은 수의 사람들은 현재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하거나 강화할 수 있을 뿐이다. 또 소수의 백인과 대다수의 물라토, 흑인 간에 이질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어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7. 문화
도미니카의 인디오 영웅을 묘사한 《엔리키요》의 자 가르방, 문예평론가 페드로 엔리케스 등 저명한 문학가가 있다. 독특한 문화적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메렝게라고 하는 색다른 무곡(舞曲)도 있으나 ‘미국식 생활양식’이 일반생활에 침투되어 가고 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최초로 식민활동을 시작한 곳으로, 당시의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다. 산토도밍고는 신대륙 최초의 도시이며 당시 신대륙 개척자들의 활동 본거지였다.


세계사 정리

 

 

 

말레이시아또는 말련 동남아시아에 있는 연방제 입헌 군주국이다. 말레이시아 13개의 주와 3개의 연방 직할구로 구성되어 있고, 남중국해로 나뉜 말레이 반도 지역과 보르네오 섬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타이, 인도네시아, 브루나이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해상국경은 싱가포르 베트남, 필리핀과 맞대고 있다. 연방정부는 푸트라자야에 있지만, 수도는 쿠알라룸푸르이다.


문화

말레이시아는 다민족국가이다. 주류 민족인 말레이족 뿐만 아니라,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도계 말레이시아도 거주한다.


역사

인도양과 남중국해 사이의 말레이 반도는 옛부터 동서양 무역상 및 여행객들의 장소였다. 5-6세기 유입된 힌두 문화와 불교 문화는 말레이시아 북서 지역에 빠르게 보급되었고, 14세기 무렵 아랍 상인들이 이슬람교를 소개하였다.말라카 해협을 중심으로 13세기까지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한 말레이시아는 식민 열강들이 향료가 풍부한 말라카에 침범하기 시작하면서 외세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16세기 포르투갈의 침공 이후 네덜란드의 말라카 점령을 거쳐, 18세기 영국이 페낭(Penang)을 점령하면서 말레이시아 지역은 20세기 초까지 외세의 지배를 받았다. 바다 건너 보루네오 섬에 있는 사라왁주는 1841년 이후 영국 모험가인 제임스 브룩(James Brooke)과 후손들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1888년 사라왁주와 북 보루네오(추후 사바로 개칭됨)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1957년 8월 31일 말라야 연방(Malayan Union)이 대영제국에서 독립하였다. 이후 툰쿠 압둘 라만이 초대 총리가 되었으며, 투앙쿠 압둘 라만이 초대 국왕이 되었다. 사바 주사라왁 주는 싱가포르,브루나이와 함께 1961년 9월 16일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현재의 말레이시아 연방을 성립하였다.[4] 1962년에 브루나이가 독립하였다. 1965년에 싱가포르가 독립하였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지배계층이며, 말레이시아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말레이인들을 우대했다. 인민행동당을 이끌었던 중국계 정치가 리콴유는 이를 비판하였다. 그는 "중국계도 말레이 원주민과 같은, 엄연한 말레이인이다"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민족 간의 불화로 인한 폭동은 종종 일어났고, 말레이시아 정부는 싱가포르가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며 자국에서 추방하였다(싱가포르 입장에서 보면, 원치 않은 독립이다).

라만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1969년에 민족 간에 일어난 불화로 폭동이 일어나자(일명 5·13 사건), 인기를 잃게 된다. 라만은 사건이 터진 그 이듬해에 사임하였고, 대신에 부총리 압둘 라작이 신임 총리로 임명되었다. 라작은 민족 간의 불화를 막고 빈곤을 뿌리뽑고자 했으나 재임 중 급사하고 만다. 후임 총리 후세인 온은 단결을 강조하였으며, 민족 간의 불화를 막고자 했다.

후세인 온도 건강이 악화되었고, 5년만에 중도 사임했다. 이후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가 후임 총리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경제 발전을 위해 한국과 일본으로부터 본받고자 했다. 그는 여러 차례의 총선에서 승리하여 장기 집권에 성공한다.

2003년 압둘라 아마드 바다위가 신임 총리로 임명되었다. 2009년 압둘 라작의 아들인 나집 라작이 신임 총리로 임명되었다.

2011년 현재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필리핀,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으로 구성된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 10개 회원국 중 하나로 활동하고 있다.

 

수도인 콸라룸푸르를 비롯 왼쪽의 지방들은 1957년 8월 31일 영국으로 부터 독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측 지방이 1963년 9월 16일 역시 영국으로 부터 독립하고요. 두지방이 독립기념일이 다르지만 정부에서는 8월 31일을 기본적인 독립기념일로 제정하고 있습니다.

 

 

 이슬람을 믿는 자들을 무슬림이라고 하지요. 이슬람교가 돼지고기를 금하는 이유는 여러가지 설들이 있어서 어느 한가지가 정답이다라고 확신하기는 어렵습니다. 대강의 이유들을 나열하면

 

1. 중동의 환경에서 돼지는 정말 키우기 힘든 가축이기 때문에 많은 돈과 시간이 낭비된다.

2. 소, 말과 달리 노동력을 제공하지 않는다.

3. 젖을 식용으로 사용할 수 없다.

 

이런 등등의 이유들입니다.

 

 

 다음으로 단식일에 관해서 설명을 드리자면 무슬림에게는 5가지 중요한 의무가 있습니다.

 

1. 샤하다 - 알라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알라는 마지막 예언자이다.

2. 살라 - 매일 5회의 기도

3. 사움 - 금식

4. 자카 - 부자들은 반드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눔을 베풀어야한다.

5. 핫즈 - 일생에 한번 경제적 신체적으로 능력이 된다면 반드시 이슬람교의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로 순례여행을 떠난다.

 

 이렇게 있습니다. 그 중 단식에 대해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흔히들 라마단으로 알려져 있는 이 금식기간은 이슬람달력으로 9번째달 1달동안 행해집니다. 2010년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달력으로 보자면 8월11일 부터 9월9일 까지 이므로 현재 라마단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금식기간에 외국인들은 자신이 무슬림이 아니면 비록 이슬람교 지역에 있다고 해도 지킬 필요가 없지만 왠만하면 그들 앞에서 먹는 행동은 자제하고 안보이는 곳에서 먹는게 좋습니다. 이 기간은 금식뿐만 아니라 금주, 금연까지 같이 행해집니다.

 

 다만 무슬림이라도 라마단에서 예외가 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전쟁중인 군인, 다른지역에 있는 무슬림,  어린이, 노약자, 건강에 이상이 있는 사람, 임산부

 

 이렇게는 라마단에서 면제가 됩니다. 다만 라마단 기간이 지난 후 나중에라도 자신이 라마단을 행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면 반드시 행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코란에는 금식은 인내와 자제력을 가르치고 소외된 사람들을 되돌아보게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신에 대한 순종을 나타내는 행위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금식의 계율을 지킴으로써 개인적인 과실과 악행을 속죄하고 천국에 이르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라고 해놓았습니다.

세계사 정리

 

 

 

공식국가명은 "미얀마연방(Union of Myanmar)"으로 인도차이나 반도의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불교국가인 미얀마는 동쪽으로 라오스와 태국, 남쪽으로 벵갈만, 안다만해과 접하고 있다. 국토면적이 한반도의 약 3.5배에 달하며, 삼림면적이 전국토의 57%에 달하는 약390,000㎢로 티크목재와 광물등의 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지고 있다.

◈ 수 도 : 양곤(Yangon)
◈ 인 구 : 약 5,052만명(2005년 기준)
◈ 면 적 : 678,528㎢(한반도의 3.5배)
◈ 민 족 : 버마족(70%), 카렌족(7%), 카친족(2%) 등
◈ 언 어 : 미얀마어(공용어), 영어, 힌두어, 광동어
◈ 종 교 : 불교(89.5%), 정령숭배(1.5%), 회교(4%), 힌두교(1% 미만), 기독교(5%)
◈ 주요도시 : 만다레이(Mandalay), 몰멩(Moulmein)
   바쎈(Bassein),페구(Pegu)
◈ 행정구분 : 총 14개 주로 구성된 연방형태
   7개의 자치주(State): 소수종족이 거주
   7개의 행정주(Division) : 다수종족인 미얀마족이 거주


언 어
미얀마어가 공식공용어로, 대도시에서는 영어가 가능하고, 중국, 태국 등 국경접경지역에서는 중국어와 태국어가 가능하다.

기 후
열대성 몬순기후로 연평균기온이 27.4℃이며, 연평균 강우량은 2,812㎜이다. 5월하순부터 10월말까지 이어지는 우기때는 거의 매일 비가 내린다. 2월말부터 5월 중순까지 여름이고, 겨울은 11월초부터 시작하여 2월 중순까지 이른다. 미얀마의 겨울날씨는 한국의 가을날씨와 유사하다.

◈ 시 차
한국시각과 비교하여 2시간 30분이 늦다.

◈ 통 화
공식 화폐단위는 짜트(Kyat)로 지폐로 되어 있고, 짜트이하 단위는 "퍄(Pya)"라는 화폐단위가 있는데, 1짜트에 100퍄로 동전으로 되어있으나, 년 25%의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면서 지금은 거의 사용이 되지 않고 있다.
지폐는 1000, 500, 200, 100, 50, 20, 10, 5, 1짜트가 있고, 동전은 1짜트와 50, 25, 10, 5, 1퍄 가 있다. 특히, 1000짜트는 고액권으로 현지인들도 보기가 드물다.

◈ 전원 & 통신
미얀마 전역은 220-230 볼트, AC 전원을 사용한다.
양곤의 국제수준의 호텔에서는 자체발전기를 보유하고 있어, 호텔내 전력은 안정적으로 공급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은 전압의 불안정과 단전이 종종 일어나는 등 불안한 전력공급이 이뤄지고 있다. 컴퓨터와 스테레오 라디오 등의 전압에 민감한 전자제품사용하려면 전압안정장치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국제전화와 팩스사용은 용이하나, 비용이 비싸다.

◈의 류
양곤에서는 짧은 소매의 셔트나 블라우스등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미얀마 북부지역, 특히 샨지역과 같은 고산지역을 방문할때는 가벼운 자켓이나 스웨터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불교문화권에 있는 미얀마에서는 너무 짧은 셔츠나 속이 들여다 보이는 옷은 가급적이면 피하는 것이 좋다.

◈국 경 일
- 1월4일 : 독립기념일(Independence day)
- 2월12일 : 국가 연합 기념일(Union day)
- 3월2일 : 농민의 날(Peasant's day)
- 3월27일 : 국군의 날(Armed Forces day)
- 5월1일 : 노동절( May day)
- 7월19일 : 순교자의 날(Martyrs day)
- 12월25일 : 크리스마스(Christmas)

 

미얀마역사
미얀마지역에서의 인류문명의 흔적은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몇세기전부터 중앙아시아로부터 내려온 '몬족'이 딴륀(Thanlwin)과 씻또웅(Sittoung)강변에 생활의 터를 잡았다. 그들은 몬-크메르계 언어를 사용하였으며, 지금의 미얀마에 거주한 최초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몬족은 이곳을 "황금의 땅"으로 칭하여, 불교와 인도의 아쇼카왕과의 무역을 시작하였다.

오랜기간동안 미얀마에는 몬족만이 살았던 것은 아니다. 몇세기가 지나, 티벳에서 온 퓨(Pyu)족은 바마르족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는 풍요로운 이라와디강변을 따라 정착했던 바마르족(Bamar)의 지배를 강화시키면서 파간일대의 지배권 바마르족이 가지게 된다. 바마르족으로부터 버마왕국의 기원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아나와라타(Anawrata)왕 은 몬의 수도인 타톤(Thaton)을 정복하고, 3만명의 죄수를 파간으로 쫏아내는 역사적인 일을 감행하게 된다. 바마르의 아나와라타(Anawrata)왕은 몬족의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던 근간이 되었던 불교에 귀의하고 몬족어를 수용하는 등 다양하게 몬족을 흡수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온순한 민족이 아닌 몬족은 훗날 반란을 꾀하여 아난와라타왕의 아들을 죽이게 된다. 몬족의 반란을 평정한 키안지타(Kyanzitta)은 지배권을 갖게 된다.

키안지타(Kyanzitta)의 출현은 미얀마 역사에 있어 황금시대의 서막을 예고한다. 이라와디강변에서 농작물을 경작함으로써, 이라와디강 주변에 새로운 문명의 태동을 가능케 하였다. 그는 이곳에 수천개의 사원을 만들고, 문화와 예술을 꽃피우게 된다. 왕조은 1세기정도 이곳을 지배한 후, 인류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대였던 칸이 이끄는 몽골군에 의해 망하게 된다. 1287년 보찬(Vochan)전쟁의 폐전으로 왕권자체가 몽골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서쪽으로 쫓겨난 몬족과 바마르족은 다시 바고(Bago)에 터를 잡고, 도시를 건설하게 하였다. 북쪽에서는 타이족의 후예인 "샨(Shan)"이 인화(Innwa)왕조를 세운다. 곧이어 벌어진 몬족과 샨족간의 전쟁은 유럽인들의 아시아 이동과 시기를 같이 하게 됨으로써, 인도차이나반도의 유럽인의 식민지정책에 불을 붙이게 되었다.

미얀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유럽인, 베네치아의 '니코토 디 콘티(Nicoto di Conti)'는 1435년 바고에 들어와 4개월간 머물게 된다. 1498년 포르투칼의 '바스코 디 가마(Portugeuse Vasco de Gama)'는 인도에서 해상로를 개척함으로써, 아시아로 이어지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 이윽고, 포르투칼은 동양의 무역 교두보로 사용하기 위해 인도의 고아(Goa)를 정복하였다. 이후 포르투칼의 '안토니 코리(Anthony Correa)'는 1519년 마타반(Martaban)의 총독과 미얀마에서 최초 무역 협정을 맺는다. 총독의 왕인 타빈쉬웨티(Tabinshweti)은 그의 동의 없이 이뤄진 협정에 인정하지 않았다. 1541년 타빈쉬웨티은 마타반을 공격하게 되고, 포프투칼인은 또다른 정복지인 라카인(Rahkin)로 퇴각하여 '미옹후앙(Myohuang)'과 연합하게 된다.

1600년, 포르투칼의 '필립 드 브리토 이 니코트(Philip de Brito y Nicote)'가 미얀마를 찾게 되는데, 이는 미얀마역사상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시발점이 된다. 드 브리토는 바고를 정복하여 라카인왕으로 등극하고, 도시의 요새 건설를 시작한다. 드 브리토는 곧 고아로 가서 부왕의 딸과 정략결혼한 후, 군대와 무기를 가지고 바고로 되돌아 왔다. 결혼 선물로 받은 미얀마에서 그는 자신을 왕으로 군립하였고 불교 사원을 파괴한다. 드 브리토의 통치는 13년간 이어지다, 몰락하게 되었으나, 영국인을 중심으로 한 유럽인인은 미얀마에 계속 머무렀다.
17세기중엽까지 미얀마는 프랑스와 독일, 영국의 식민지로 있었다. 바마르의 아라웅파야왕은 라칸을 정복하고 벵갈국경지역, 인도부근 영국령 라진(Rajin)까지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1819년 영국이 버마를 침공하여, 라칸, 타닌타이(Tanintharyi), 아쌈(Assam), 마니푸르(Manipur)등지를 빼았고, 1852년 버마남부까지 확대해 갔다. 급기야 1886년에는 인도국경지역까지 이르는 미얀마 전국토를 점령하게 되었다.

아시아의 독립운동의 시작은 영국 점령군의 퇴각할때 미얀마에 자치권을 인정하면서부터 기인된다. 사야 산(Saya San)이 이끄는 버마군은 영국군을 공격하게 되고, 이는 영국군으로하여금 버마를 독립된 식민지로 만드는 계기가 된다. 이후, 학생지도자,'타킨 아웅산(Thakin Aung San)'이 독립을 외치는 시위를 주동한다. 산은 그의 독립 시위로 인해 결국 체포되었지만, 중국으로 도망 가 일본인과 공조하여 독립을 향한 노력을 하게 된다. 일본인으로부터 미얀마의 독립을 약속받고, 영국을 몰아내는 데에 적극 지원 받은 산은 1941년 뜻을 이루게 된다. 수천명의 목숨을 잃은 영국군은 퇴각을 선언하게 되고, 4년이 지난후에야 일본과 산의 동맹군은 결국 버마를 되돌려 받게 되었다. 결국 1947년 영국은 국지전에 대한 부담감으로 버마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새로운 지도자로 등극한 아웅산은 사실상 실권을 쥐지 못한채, 그 해에 암살당하게 된다. 그의 동료인 탄킨 누(Thankin Nu)이 그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고, 그는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1958년, 시민소요가 터지자, 탄킨누는 네윈(NE Win)에게 소요진압을 지원해주기를 요청한다. 결국 누는 1960년 몬족과 라카인족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다시 권력을 되찾게 된다. 누의 자치권인정이 제대로 이행되지않자, 1962년 샨과 카인족은 폭동을 일으켜 새로운 세력으로 나타나게 된다. 당시 요청이 없었지만, 급진 공산주의자였던 네윈 장군은 폭동을 진압하고, 또한 누를 체포 감금한 후, 군부정치를 선언하게 된다.

1966년 풀려난 누는 지방으로 숨어들어가, 폭동세력 조직하여, 1971년 폭동을 일으켰으나, 곧바로 진압되고 만다. 네윈의 군부 독재가 막을 내린 1981년, 누는 석방되어 고향을로 돌아가, 생을 마감하였다. 1988년 타트마도(Tatmadaw)의 탄압에 대항한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결국 타트마도는 그 이듬해 민주선거에 동의하게 된다. 선거에서 민족 민주연합(NLD)가 60%를 얻게 되었으나, 타트마도는 새로운 지도자의 동의가 없었다는 이유로 선거무효를 선언한다.
군사정권의 폭정하에 비폭력 투쟁을 전개한 민주운동의 지도자였던, 아웅산 수지(Aung San Suu Kyi ; 아웅산의 딸)는 자택에 감금당한 1991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여받았다. 오늘날에도 수지의 평화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미얀마의 문화
▶건축 예술
미얀마의 건축물은 종교와 왕권에 의해 강한 영향을 받았다. 사원, 파고다, 왕궁은 그림, 목각, 조각등의 뛰어난 예술적 스킬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수많은 사원과 파고다는 전통적인 방식인 벽돌로 지어졌다. 그러나, 왕궁은 이와 달리 목재로 지어졌으며, 아름다운 조각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은 현재에도 잘 보존되어 있다.

▶음 식
미얀마의 음식문화는 중국과 인도식의 음식문화가 혼합된 것으로서, 미얀마의 카레와 수프는 대표적인 전통음식이다. 서양의 접시보다 중국 접시가 더 잘 맞으므로, 중국식 접시에 카레와 수프가 담겨져 나온다.

 

1 2
블로그 이미지

Kirakir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