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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정리

 

 

 

 

 

 

 

1대전의 발발동기

 

이는 시대적으로 슬라브족의 중심인 로마노프왕가 주창해온 범슬라브주의라는민족주의와

독일과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함스부르크왕가의 범 게르만주의가 충돌

영국프랑스 스페인등  브르봉왕조가 지역패권과 식민지 영토확장등에 혈안이 되어 있고 

(삼국동맹과 삼국협상의 충돌)

프러시아(프로이센)를 주축으로 대독일제국을 건설한 빌헤름2세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유럽을 뒤흔들고 있을때

1914. 6.28Austro-Hungarian Emperor Franz Josef (오스트리아-항거리안 황제 프란츠 조셉)

황태자 부처( Franz Ferdinand)가 세르비아(전 유고 현재세르비아)에 군대 열병식참가하는길에 Sarajevo에서 한 세르비아 청년에의해 권총으로 암살된 계기로 1대전이 발발

이 암살사건은 그저 명분에 불과하였고 이 이전부터 각국이 연대하여 블록을 형성하여 전쟁할 이유를 찾지못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사라예보의  한발의 총성으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1개월만에 선전포고 곧이어 독일은 러시아에게 선전포고 영국 프랑스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게 선전포고  전 유럽이 3일만에 전쟁의 도가니속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주요원인

삼국동맹과 삼국협상의 충돌

3B 정책과3C정책의 충돌 해외식민지 쟁탈

범슬라브정책과 범게르만정책의 충돌(합수부르그 왕조(독일 오스트리아)와 로마노프왕조(러시아왕조)의 충돌

발칸반도의 슬라브화를 저지하기위한 전쟁 러시아 남진정책 저지

 

1.삼국협상

1891년 러·프 동맹

1904년 영·프 협상

1907년 영·러 협상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독일의 제국주의적 침략은 유럽·아프리카의 각지에서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제국주의 제국과 대립·충돌하게 되었다그 때문에 비스마르크 시대에는 교묘히 분리되었던 영국·프랑스·러시아 3국이 독일에 대하여 강한 경계심을 품고 서로 가까워지게 되었다독일을 고립화시키기 위하여, ,각각 체결되어 외교적·군사적 동맹체제를 정비했다.

삼국동맹

독일·오스트리아·이탈리아로 구성된 삼국동맹의 제국주의 국가끼리 대립이 시작되어 제1세계대전이 일어났다.

 

2.영국의 3c정책과 독일의 3b정책(제국주의 확장정책)

제국주의 확장정책으로 말미암아  영국과 독일은 얼마후 제1세계대전에서 각각 3국협상과 3국동맹의 일원으로 전쟁을 하게 되었으며 이는 유럽의 강국이라 자부하는 영국과 독일의 식민지 재정책의 결과입니다

 

영국은 전세계곳곳에 식민지를 경영했지만다소 늦은 근대화와 통일로 뒤처져있던 독일은 식민지 확보를 하려고 하면 영국이나 프랑스가 방해를 하게되어 영국 프랑스가 관심을 갖지않은 지역을 선택하게된것입니다

1880년대부터 시작된 영국의 3c정책과 독일의 3b정책이었으며 각각 카이로(Cairo)ㆍ 케이프타운(Capetown)ㆍ 캘커타(Calcutta)를 연결하여 아프리카와 인도양의 확보를 목적으로 하는 것과  베를린(Berlin)ㆍ 비잔티움( Byzantium)ㆍ바그다드(Baghdad)를 연결(철도부설)하여 소아시아와 중동지방의 팽창 즉 근동지방확장을 목적으로 한 것이 바로 독일의 3B 정책입니다   

이런  확장 정책은 다른 경쟁국들과의 마찰도 있었지만 , 1890년대에 들어오면서 독일의 공업과 무역이 영국의 구세력을 위협하자 더욱 첨예화하였으며군비경쟁으로까지 확산 되었습니다

 

1대전은 영국과 독일의 직접 대립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보면 합스부르그 왕가와 영국 프랑스의 부루봉 왕가의 대결이었습니다 여기에 러시아의 남진정책이 물려 영국 독일은 다시 러시아를 저지하는데 협력하게되었으며  이런 밀월이 끝나자  세계대전의 시작이  바로 식민지 쟁탈전의 전초였습니다

 

3.범슬라브주의(Pan Slavism)와 범게르만주의의 충돌 (러시아 로마노프왕가중심) (독일 합수부르그 왕가중심)

러시아의 대외정책중 하나입니다 슬라브 민족권(언어 종교)이 단결하여 유럽세력에 맞선다는 정책특히  발칸 반더지역 슬라브 민족 세르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슬라브 언어 사용국가들과  러시아 정교를 믿고있는 국가간 협력 결속하자는 러시아 정책 

범 게르만니즘(Pan Germanism)(독일 합수부르그 왕가중심독일 오스트-항거리 중심으로 연합한  범슬라브주의에 대적하는 민족주의 바로이 두가지 상반된 주의 주장 정책이  1대전의 불씨입니다

 

 

1. 주요일지

 

   

              

    

                    

1914.6.28

프란츠 황태자부처  피살

1915.5.23

이태리 오스트-헝가리에 선전포고

1914.7.23

세르비아 흑수단 대표체포요구

1915. 9.11

영국군최초로 탱크 제작전투시작

1914.7.24

세르비아 러시아에 지원요청

1916.2.21

독일군 베르뎅 공격

1914.7.28

오스트헝가리 세르비아에 선전포고

1916.3.9

독일군 폴투칼에 선전 포고

1914.8.1

독일 러시아에 선전포고

1916.8.29

힌덴부르크 독일 참모총장 취임

1914.8.4

독일군 벨기에 점령

1917.4.6

미국독일에 선전포고

1914.8.4

영국 독일에 선전포고

1917.6.29

그리스 독일에 선전포고

1914.8.12

오스트헝가리 세르비아 공격

1917.7.17

영국왕조지5  윈즈로 개명

1914.8.26

탄넨베르그전투시작

1918.1.8

미국윌슨대통령 14개 평화조약 선언

1914.9.6

프랑스 마른 전투시작

1918.10.3

맥스베이든 독일 수상 임명

1914.10.29

터키 독일측연합군에 가담

1918.9.9

빌헤름2세황제 퇴위

1914.12.25

서부전선 크리스마스 휴전

1918.11.11

1대전 종전

1915.4.22

독일군 개스전시작

1919.1.12

파리평화 협상

1915.5.7

루스티아나호 침몰

1919.6.28

베르사이유협정 조약

 

2. 1차 세계대전  전쟁사에 미치는 영향 

참호전이 가져다 주는 지구전 소모전의 비효율성

기관총의 등장으로 전술및 전투 개념의 새로운 정립

독개스 출현으로 인한  전쟁사에 화학전의 시초가 된점

 

3.후유증및 결과

끝내 독일을 중심으로한 함스브르그왕조가 멸망하고 독일은  유사이래 엄청난 전쟁보상비를 물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독일은 이 엄청난 전쟁보상비를 해댈능력이 없어 결국은 2세계대전으로 이어지게된 경우 입니다.

1세계대전 중세왕조들이 그들의 블록을 형성하여 몰락하는 왕조를 재 건설하는의미와 식민지 수탈정책에서 다른나라와 뒤질세라 각축장이 벌어졌고 이 왕조블록은 새로운 물결이 엄습해오는과학 기술등 산업혁명의 가속화와 국제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인식하지 못하여 전쟁이란 옛날 방식을 채택하여 유럽세계 발전에 100년이상 후퇴시키고 그 세계적 주도권을 미국에게 내놓은것이 되었습니다.

 

전쟁결과

1.전통유럽지배세력의 퇴조

2.해외 식민지의 독립또는 상실

3.전쟁보상비로 인하여 독일 국민 압박하여 애국심 고조

4.독일 애국심이 힛틀러의 등장을 합리화시켰음

5.독일 채무국에서 탈출할수있는 방법이 군비 증강 혁신

6.국제사회에서 유럽의 입지가 축소

7.러시아 혁명의 기폭제 

8.2세계대전 가속화 요인

9.유럽왕조의 퇴조또는 몰락

10.독일제국 러시아제국 오토만제국 오스트헝가리제국 멸망

11.동유럽신생국가 건설

12.연합군영국 프랑스 이태리 러시아 미국

13.패전국독일 오스트 헝가리 불가리아 오토만제국

14.전사자:

        

연 합국 측

패 전국 측

합계

         

전사자

5,000,000

4,000,000

9,000,000

 

전투병력민간인 포함

 (미군:116,708)

한국의역사

 

 

 

북한과의 전쟁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한국은 일본의 불법적인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카이로회담에서 나라의 독립이 약속은 되어 있었으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과 북에 미소 양군이 분할 진주함으로써 국토의 분단이라는 비참한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8월 9일 뒤늦게 대일전에 참가한 소련군은 허울뿐인 관동군을 격파하면서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8월 13일 제25군단의 일부가 청진에 상륙하고, 8월 22일에는 평양에 진주하였다. 미군 제24사단은 9월 8일에야 인천에 상륙하여 이튿날 서울에 진주하였다. 미소 양군의 한반도 진주 목적은 일본군의 무장해제 등 전후처리에 있었다.

그러나 북한에 진주한 소련 군정당국은 남북간의 왕래와 일체의 통신연락을 단절시킴으로써 38도선을 남북을 가르는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었으며, 공산화통일이 보장되지 않는 어떠한 통일정부수립도 거부함으로써 한반도의 반영구적인 정치적 분단을 강요하였다. 한반도에서의 지배권 강화를 목표로 하는 소련의 기도와 적대정부의 출현만은 절대로 반대하는 미국의 입장이 타협될 수 없었다. 따라서 한국의 통일독립 문제의 해결은 극히 어려웠으며 이 문제를 위해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고 말았다.

1947년 중반에 이르러 미국은 마침내 단일정부의 수립과 신탁통치의 실시를 전제로 하여 한반도를 통일하려 했던 종래의 대한 정책을 포기하고, 분단의 고정화라는 기정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한반도의 세력균형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유엔은 1947년 제2차 총회에서 통일된 한국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1948년 5월 31일 이전에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선거감시를 위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유엔이 결의한 전국적 범위에서의 총선거는 1948년 1월 소련 군정당국이 이의 수락을 거부하고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지역 출입을 막음으로써 좌절되었다.

1948년 2월 26유엔 소총회는 '유엔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실시'를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38도선 이남지역에서 유엔 감시하의 자유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국회가 구성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세계만방에 선포되었다. 소련군의 비호 아래 북한지역을 장악한 김일성 등 공산주의자들은 1948년 9월 9일 이른바 '흑백선거'에 의하여 북한지역에 독자적 공산정권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 제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러나 1948년 12월 12일 제3차 유엔총회는 대한민국정부만이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정부'(유엔 총회결의 195 Ⅲ호)임을 결의함으로써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서 대한민국의 법통을 확인하였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됨에 따라 한국은 일본의 불법적인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러나 카이로회담에서 나라의 독립이 약속은 되어 있었으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과 북에 미소 양군이 분할 진주함으로써 국토의 분단이라는 비참한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8월 9일 뒤늦게 대일전에 참가한 소련군은 허울뿐인 관동군을 격파하면서 파죽지세로 남하하여 8월 13일 제25군단의 일부가 청진에 상륙하고, 8월 22일에는 평양에 진주하였다.

미군 제24사단은 9월 8일에야 인천에 상륙하여 이튿날 서울에 진주하였다. 미소 양군의 한반도 진주 목적은 일본군의 무장해제 등 전후처리에 있었다.


그러나 북한에 진주한 소련 군정당국은 남북간의 왕래와 일체의 통신연락을 단절시킴으로써 38도선을 남북을 가르는 정치적 경계선으로 만들었으며, 공산화통일이 보장되지 않는 어떠한 통일정부수립도 거부함으로써 한반도의 반영구적인 정치적 분단을 강요하였다.

 

한반도에서의 지배권 강화를 목표로 하는 소련의 기도와 적대정부의 출현만은 절대로 반대하는 미국의 입장이 타협될 수 없었다. 따라서 한국의 통일독립 문제의 해결은 극히 어려웠으며 이 문제를 위해 개최된 미소공동위원회도 결렬되고 말았다.

 

1947년 중반에 이르러 미국은 마침내 단일정부의 수립과 신탁통치의 실시를 전제로 하여 한반도를 통일하려 했던 종래의 대한 정책을 포기하고, 분단의 고정화라는 기정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한반도의 세력균형을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유엔은 1947년 제2차 총회에서 통일된 한국정부수립을 위한 총선거를 1948년 5월 31일 이전에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하기로 결의하고, 선거감시를 위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유엔이 결의한 전국적 범위에서의 총선거는 1948년 1월 소련 군정당국이 이의 수락을 거부하고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지역 출입을 막음으로써 좌절되었다.

 

 

1948년 2월 26유엔 소총회는 '유엔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의 선거실시'를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8년 5월 10일 38도선 이남지역에서 유엔 감시하의 자유 총선거가 실시되어 제헌국회가 구성되었으며, 1948년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의 건국이 세계만방에 선포되었다.

 

소련군의 비호 아래 북한지역을 장악한 김일성 등 공산주의자들은 1948년 9월 9일 이른바 '흑백선거'에 의하여 북한지역에 독자적 공산정권인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 제국의 승인을 얻어냈다.

 

그러나 1948년 12월 12일 제3차 유엔총회는 대한민국정부만이 '한반도에 존재하는 유일한 합법정부'(유엔 총회결의 195 Ⅲ호)임을 결의함으로써 한반도의 유일 합법정부로서 대한민국의 법통을 확인하였다.

 

세계사 정리

 

 

 

 

 

태국을 구성하고 있는 타이족은 중국 남부 지금의 운남성에 살던 민족으로 13세기경 본격적으로 짜오프라야 강변에 이주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태국역사가 시작되었다.


가) 쑤코타이 시대(1238- 1378년) 1219년: 징기스칸의 정복 전쟁 시작

1231년: 고려에 몽고 침입 시작

1299년: 오스만 터키 제국 일어남


크메르 제국이 쇠태하면서 태국의 두 장관, 쿤 방끌랑타오와 쿤 빠므망은 1238년 크메르 제국의 북부를 점령하여 태국 민족 최초로 독립 왕국을 건설했다. 이것이 쑤코타이 왕조다.

왕조는 3대 왕 람캄행 대왕 때 전성기를 맞이하여 영토가 현재의 태국과 거의 같은 크기까지 확대되었다. 1292년 크메르 문자를 개량하여 독특한 태국 문자를 만들어 냈고 스리랑카로부터 처음으로 불교를 받아들여 국교로 삼았다.


나) 아유타야 시대(1350-1767년) 1393년: 이성계 조선 왕조 개국

1398년: 티무르 인도 침입

1453년: 오스만터키제국 비잔틴멸함

1517년: 오스만터키 이집트 정복

1592년: 임진왜란 일어남

1687년: 오스만터키제국 쇠락함

쑤코타이 남쪽의 아유타야에 새 왕조를 건설했다. 쑤코타이 왕조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라마타보디 1세가 태국 사상 처음으로 법전을 만들고 1378년 쑤코타이를 병합하여 태국 전국을 통일, 동남아시아 최고의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에 이웃 나라 버마(지금의 미얀마) 의 침략을 받게 되고 1569년 버마군에 항복하면서 이후 15년간 버마의 지배를 받았다.


다) 톤부리 시대(1767- 1782년)


아유타야 붕괴 후 태국 동부 해안에 피신해 있던 딱신이 아유타야를 탈환하고 1767년 톤부리(방콕의 건너편)에 수도를 정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딱신의 정신 이상으로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고 1대 왕 겨우 15년만에 톤부리 왕조는 끝나고 말았다.


라) 방콕 시대(1782년- 현재, 짜끄리 왕조)

1794년: 이란 통일

1804년: 러시아, 터키 전쟁

1829년: 그리스 터키서 독립

1839년: 1차 아프칸 전쟁


1782년 수도를 톤부리에서 짜오프라야강 건너편, 현재의 방콕으로 옮기고 새 왕조를 열었다. 이 때부터 왕을 라마라 칭하고 현재까지 이르게 되었다.

현재 태국의 국왕은 1946년 등극한 라마 9세 푸마폰 아둔야뎃이다. 1996년은 푸마폰 국왕 즉위 50주년이 되던 해로 현존하는 전 세계 국가 지도자 중 최장기 재임이다.

 

 

 

 

 

 

태국의 왕궁

 

 

 

 

"그랜드 팔래스"를 가봤다면 에메랄드 사원(왓 프라깨우)가 있는 본당을 둘러

싼 회랑에 화려한 벽화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 벽화는 라마키안이라고 불리는 태국의

전통 서사시를 그림으로 구성하여 제작한 것으로 총170면 8칸으로 나누어 그려져 있다. 

라마키안은  총 116권의 방대한 서사시로 전체가 연결 된 8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라마키안을 바르게 이해할면 인도의 라마야나를 먼저 살펴 보아야 한다.

 

두 작품 모두 총 116권에 달하는 장편이고, 팔리, 싼쓰크릿어가 80%를 넘는 고어(古語)로 된 서사시이다.

 대략 5 세기 B.C에 Valmiki(인도 시인)는 Ramayana을 창작한다. 이 서사시는 오늘날까지도 매우 인기가 있다. 이 라마야나는 태국의 라마키안의 원작이 된다. 라마야나의 태국 버전의 메인 줄거리는 라마키안은 악마의 왕인 토사간(라마야나의 라바나)이 라마(태국의 왕)의 아내 시타를 납치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속의 라마는 흰두교의 신 비쉬누의 인간으로 현신이다. 그는 납치된 그의 아내 시타를 구출하기 위해 원숭이 군대의 지원을 받는다.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를 창작할때 시인 발미키는 두가지 전설을 조합하였다. 한가지는 북부 지방에서 뿌리를 두고 내려오는 아리아인의 전설이다. 대 서사시는 야유타야의 왕자 라마의 이야기를 첫번째 장으로 다룬다.  

두번째 전설은 남부 지방에서 내려오는 전설로 이 전설은 드라비디안(남인도계인) 사람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있는 이야기로 굉장한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 악마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발미키는 라마와 악마의의 모든 이야기를 이 서사시에 포함시키지는 않았다. 후대 다른 작가들은 이 서사시에 다른 이야기를 섞어 새로운 버전을 창조해 낸다. 그러나 발미키의 라마야나는 현재까지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라마야나의 대서사시로 기억되고 있다.

어떻게 라마야나가 태국에 전파가  것인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죽음  세기초 동안 동남아시아 전역에 인도의 종교와 정치가 전파되기 시작한다. 이시기에 태국 뿐만이 아니라 동남아시아 대륙의 많은 나라들이 라마야나를 차용했다. 발마키의 저작 외에 다른 작가들에 의한 라마야나 역시 인도에서 주변국으로 퍼지게 된다.

태국의 라마키안은 라마야나의 몇가지 버전을 혼합한 것으로 보이는데 몇몇 남부인도 버전처럼 악마의 왕 "토사칸"이 등장한다. 태국의 라마키안의 악마 토사칸은 나쁜일을 저지르지만 절대악의 존재는 아니다. 행동은 나쁘지만 라마의 아내 "시타"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은 순수해 보인다.  

라마키안은 또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서 전승되고 있는 라마야나와도 비슷한데(Bridhyakorn, and Yupho 1962, P.5 and Desai 1969, p.165) 이렇게 여러 나라의 이야기를 차용해서 조합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태국의 "라마키안" 매우 태국적인 이야기로 변형 되었다.

인도의 라마야나의 라마는 힌두교의 신인 비쉬누(Vishnu) 화신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매우 힌두교적인 관점에서 쓰여진 종교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태국사람들이 전통적으로 믿는 종교는 불교로 태국인들은 라마야나의 힌두교적인 요소들을 벗겨내었다.

 

라마키안에 등장하는 라마는 "" 전생으로 묘사된다.

첫째로 라마는 모든 태국의 관습을 따르는 태국의 왕자이다. 인도의 버전과 같이 태국의 라마키안도 여러 가지 버전이 있는데 가장 인기있는 것 중 하나는 18세기에 짜끄리 왕조의 창시자인 라마 1세가 만든 것이다.

다른 것으로는 그의 아들인 라마2세에 의해 쓰여진 것이 있다.

이후 라마키안은 가면극과 인형극, 그림자 놀이 고전적인 무용극 등 다양한 공연의 소재로 이용되었고 많은 화가들이 사원을 장식하는 그림의 주제로 삼아 왔다.

왜 인도의 종교적인 서사시가 불교국가인 태국에서 인기를 얻게 되었을까?

 질문의 대답은 (Khon) 기원에서 찾아    있다.

태국이 캄보디아의 수도 앙코르를 점령한 시기에 크메르 왕실 무용단(Brandon 1967) 태국으로 데려간다. 그러나  시대의 역사 기록들은 모두 유실되어 정확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1767년의 방콕에 "(Khon)" 존재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시대 이전에 이미 태국에서  무용극이 보급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확실한 것은 (Khon)  야이(작은 인형으로 진행되는 인형극) 라마키안의 이야기를 기초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시대의 동남아시아 지역의 왕국의 왕들은 인도의 사상과 정치, 종교에서 자신들의 통치법을 빌려 오게 되는데 이유는 왕권 강화를 위해 자신을 신격화하고 자신들의 통치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인도의 라마야나의 등장 인물인 "라마"는 신의 현신인 왕자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콘 무용극과 낭 야이(인형극)의 공연은 결국 이 창조된 이야기를 사실인 것처럼 사람들에 인식시키기 위한 왕의 요구로 만들어 진 것이다.

라마키안의 저작 시기로 보여지는 1782년 라타나꼬신 왕국(씨암-지금의 태국)을 설립한 짜끄리 라마티보티왕 즉 라마1세(텅 두엉) 즉위 당시 시대적 상황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시기였다.
아유타야의 멸망을  후 텅두엉은 톤부리에 나라를 세운 탁신 왕의 가장 신뢰하는 장수의 한 사람으로 잃어 버렸던 아유타야 왕국의 땅을 탈환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이후 탁신 왕이 재위 15년 만에 석연치 않은 이유로 처형(기록에는 정신 이상으로 폭정을 행했다고 한다.)을 당하자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 라마1세는 새왕조의 정당성을 세워야 할 필요를 느낀다. 아유타야 시대 말기와 톤부리 시대의 혼란기를 직접 겪은 라마1세는 불교를 국가 안정과 번영의 한 기본적인 요인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등위 후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이 불교의 개혁이었다. 국가의 도덕적 기강과 질서의 회복에 우선적인 비중을 두었기 때문에 혼란에 빠져있던 승가(僧家)를 정비하여 승가의 권위를 회복 시켰다.
전통적인 불교 후원자 및 통제자로서의 역할에 대해 분명한 인식을 갖고 있었던 그는 불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새로운 타이왕국을 건설하는 탐마라차로서 전통적인 왕권의 역할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는 종래의 역사 해석의 관점이었던 아유타야 전통의 복원이 아니라 아유타야 전통의 개혁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라마키안
은 라마야나와 달리 제1장에서 국가탄생의 유래를 불교의 우주론인 삼계론(三界論)에 바탕을 두고 건국 신화의 형태로 저작하였다. 이제까지는 삼계(三界)의 존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지옥 세계로부터 시작하여 인간 세계 그리고 신의 세계를 포함하는 색계(色界)와 인식의 세계인 무색계(無色界)를 거쳐 니르바나의 순서로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라마키안에서는 천상의 세계에서 시조(始祖)가 탄생하여 인간계로 내려와 나라를 건국하는 구성을 통해 의도적으로 우주의 존재론적 결정의 축에 있는 인간 세계를 강조하였다고 보여진다. 뿐만 아니라 업(業)사상(일상 행위에 따라 내세에서의 존재가 결정 된다)을 도입하여 국민들이 선업(善業)을 축적할 수 있는 사회적 사상을 제공하고 왕권을 정당화한 것으로 보여 진다.
 


라마키안 줄거리
제1장 : 최초의 왕국과 왕의 출현
수미산(짝끄라완) 꼭대기에 살고있던 히란이라는 나찰(히란약)이 이쑤언 신의 은총으로 얻은 법력을 이용하여 천지를 진동시키며 천계(天界), 인간계(人間界), 그리고 지하계(地下界)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이쑤언 신은 히란약의 횡포로 불안에 떨고있는 삼 세계의 주인들을 구하기 위해 프라나라이(나라야나=비슈누신)를 파견하였다. 즉시 땅의 세계로 내려와 멧돼지로 변신하여 히란약을 살해하고 지구를 평정한 프라나라이는 낙(용 또는 뱀)을 타고 유해의 바다에 이르러 베다 찬가를 불렀다. 그랬더니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났고, 꽃 안에서 귀골의 동자가 나타났다. 나라이는 그 동자를 천에 싸서 이쑤언 신에게 헌상하였다. 이쑤언 신은 그 동자에게 아노마딴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최초의 아요타야국의 왕으로 명하였다.
지상으로 내려가 왕국을 건설하라는 이쑤언 신의 명을 받은 프라나라이는 비슈누신의 권유로 네 명의 행자가 고행을 하고있는 타와라와디숲에 도시를 건설하고, 아짜하카위, 육아카라, 타하, 야카의 행자 네 사람 이름의 첫 글자를 딴 아·유·타·야와 숲의 이름을 합쳐 아유타야타와라와디라 지었다. 아유타야 왕에 즉위한 아노마딴은 프라나라이의 화신으로 여겨져, 악마를 퇴치하기 위한 법력과 네 가지 무기를 받았다.
이후의 이야기는 아노마딴의 아들 아차반의 탄생과 왕위계승, 이 이야기의 중요 등장인물의 탄생과 환생 그리고 소 왕국들의 설립과정이 상세하고 장황하게 묘사되어 있다.


제2장 : 프라람의 탄생
아요타야 왕국의 톳싸롯왕이 신에게 자식을 구하는 제의를 거행한다. 네 덩어리의 밥을 만들어 신에게 바쳤는데, 그 향기가 온 천지를 진동하여, 롱까국에 살고 있던 낭몬토가 그 냄새를 맡고 깍까나쑨신을 시켜 반 덩어리를 훔쳐오게 한다. 남은 세 덩어리 반을 부인 세 명이 나누어 먹은 후 정비인 낭까오쑤리야는 프라람을, 낭까이께씨는 프라프롯을 낭싸뭇테위는 프라락과 프라쌋따룯 등 네 명의 아들을 낳았다.
한편 피펙은 낭몬토가 훔쳐온 밥을 먹고 낳은 딸이 불행을 가져올 징조라며 물 속에다 버리라고 예언하자 아버지인 톳싸깐은 딸을 물에 띄워 버린다. 수도승 차녹과 나이쏨이 강에서 목욕을 하다가 연꽃 속에 유골 넣는 용기가 들어있는 것을 보고 주워다 뚜껑을 열었더니 작은 아기가 있었다. 아기는 미천한 출신이 아닌 왕가의 후손으로 여겨졌다. 나이쏨이 데려다 정성껏 키웠는데 아기가 왕가의 후손일 경우에 후일이 복잡해질 것을 우려한 수도승 차녹은 부모를 찾아 주기로 하였다. 아기를 전과 같이 용기에 담아 싸이나무 아래 구덩이를 파고 나무판 위에 용기를 놓은 후 흰색의 왕실용 우산을 씌워놓고 부모가 찾아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차녹이 데려다 "시타"라 이름짓고 미티라 왕국으로 데려가 양육하였다. 시타는 아름다운 아가씨로 성장하고 결혼할 나이가 되자 마하타누모리라는 이쑤언 신의 활을 쏠 수 있는 사람을 사위로 삼겠다는 방을 내걸었고, 그 활쏘기 시합에서 프라람이 승리하였다. 차녹은 톳싸롯 왕을 초청하여 프라람과 시타의 결혼식을 성대히 치루어 주었고 프라람 일행은 아요타야로 돌아갔다.



제4장 : 시타를 사랑하게된 토사칸
롱까국의 치우하(혀, 설舌)는 토사칸 왕이 국외 순시를 떠나자 7일 동안 밤낮으로 자지 않고 나라를 지키다 마지막 7일째의 밤, 밀려오는 졸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라가 염려되어 잘 수 없었던 치우하는 혀를 길게 내밀어 왕국을 통째로 덮은 뒤에 깊은 잠에 빠졌다. 7일만에 롱까로 돌아온 토사칸은 암흑에 쌓인 도시가 적의 소행으로 파괴된 것으로 착각하고 잠에 빠져있는 치우하가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격분하여 짝이라는 톱니가 달린 원형의 무기를 던져 죽였다.
미안한 마음의 토사칸은 억울한 남편의 죽음으로 슬픔에 쌓인 낭쌈마낙카에게 도시를 구경 다니며 새 남편을 만나보라고 권하였다. 코타와리 강가에서 마침 그 곳에 당도한 프라람과 시타, 프라락을 우연히 만난 낭쌈마낙카는 프라람을 보고 반해 인간으로 변신하여 프라람을 유혹하였으나 거절 당한다. 화가나 시타에게 달려들어 때리려 하자 프라락이 낭쌈마낙카의 손과 발을 잘라 버렸다. 아픔과 분을 참지 못한 그녀가 오빠 프라야컨에게 고해 바치자 프라야컨과 그의 부하 뜨리씨안은 차례로 프라람을 죽이러 갔다가 도리어 죽임을 당했다. 그녀는 롱까의 토사칸을 찾아가 시타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면서 같이 가보자고 토사칸을 충동질했다. 시타를 보고 반해버린 토사칸은 마릿에게 사슴으로 변하여 시타를 유혹하도록 하였다.
예쁜 사슴을 본 시타가 프라람에게 사슴을 잡아 달라고 하자 동생에게 아내를 부탁하고 사슴을 잡으러 숲 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타난 사슴이 프라람의 목소리로 프라락을 유인해간 후, 이상하게 여긴 시타가 프라락을 돕기 위해 집밖으로 나왔다. 이때를 틈타 시타를 유괴하여 롱까국으로 가던 토사칸을 싸다유가 공격하였고 시타는 반지를 떨어뜨려 자신의 행방을 알린다. 사슴을 잡으러 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온 프라람은 시타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때마침 시타의 반지를 가지고 달려온 싸다유를 통해 그간의 경위를 듣는다. 시타를 구하는데 도움을 청하기 위하여 형제는 숲으로 하누만과 쑤크립을 찾아간다.



제5장 : 시타를 찾아서
프라람을 만난 하누만은 쑤크립을 데리고 와 팔리에게 추방당한 경위를 들려 준다. 프라람은 쑤크립이 팔리를 쳐부수는데 도움을 주고, 쑤크립은 시타를 찾는 일을 돕기로 약속하였다. 프라람은 활을 쏴 팔리를 제거하고 킫킨으로 들어가 나라를 세우고 쑤크립에게 통치하도록 한다. 칸타맛 산으로 가는 도중 금 공작은 시타의 소식을 전해 주었고 원숭이로부터는 시타의 싸바이( 어깨에 두르는 띠)를 건네 받았다.
하누만은 시타를 구하기 위해 군대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롱까로 간다.



제6장 : 하누만의 활약

하누만이 롱까에 당도하여 모든 성을 돌아다녔으나 시타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토사칸의 정원에서 시타를 발견하였으나 프라람이 보낸 것을 알리 없는 시타 앞에 선뜻 나설 수가 없어 작은 원숭이로 변하여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이때 토사칸은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시타를 괴롭히기 위해 낭약(여자귀신)을 시켜 시타를 비난하게 하였다. 비난을 들은 시타가 목을 매어 죽으려 하자 하누만은 프라람의 반지를 내어주며 프라람이 찾으러 온 사실을 알려준다. 그런 후 정원을 부수고 화가 나서 달려온 토사칸의 아들 싸핫꾸만을 죽였다. 토사칸이 길길이 날뛰며 싸우려하자 일부러 져주어 잡힌다. 화가 난 토사칸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여 하누만을 죽이려 했으나 아무리 해도 죽일 수가 없었다. 하누만이 자기를 태워 죽여 달라고 청하니, 토사칸은 죽일 요량으로 하누만의 몸에 불을 붙였고 꼬리에 불을 달은 하누만은 롱까국 사방을 뛰어 다니며 불을 내 롱까국을 태워 없애 버렸다.



제7장 : 프라람과 토사칸의 전쟁

하누만으로부터 시타의 소식을 들은 프라람은 칸타끼라산의 바닷가에 진을 쳤다. 한편 토사칸은 흉몽을 꾼다. 불안한 토사칸은 예언자 피펙에게 해몽을 의뢰했는데, 흉몽이라며 시타를 돌려보내 주어야 한다고 말하자 토사칸은 피펙이 프라람과 한편이라며 쫓아냈다. 혼자가 된 피펙은 프라람의 휘하로 들어가 프라람의 군대를 교란하려던 토사칸의 온갖 술수를 간파하여 프라람에게 알려 주었다.
그 동안 시타를 돌려보내 주라는 주위의 권유를 듣지 않은 토사칸은 전쟁을 하게 된다. 아들 인트라칟이 7년 동안 아키(불의 신)에게 드린 기도 끝에 삼신으로부터 받은 세 개의 활을 가지고 프라락과 네 번의 싸움을 벌이다 프라락의 마법의 화살을 맞고 죽음을 당한다. 아들의 죽음에 토사칸이 직접 전쟁에 나서자 열 명의 아들이 따라 나서고 네 차례에 걸쳐 전쟁을 하다가 마침내 죽임을 당한다.
 
( 이 전쟁 장면이 가장 재미있고 널리 알려져 있어 때로는 이야기 전체가 영웅신화로 알려질 정도로 독자들에게 인기가 있다. 가면극에서 변사의 입담에 따라 여러 가지 이야기가 가감되기도 한다.)피펙은 시타가 프라람에게 돌아가도록 도와주었고, 시타는 적군에 잡혀갔었던 자신의 순결함을 모든 사람들에게 증명하기 위하여 전통적으로순결을 증명하는 의식인 루이파이(불에 달군 숯 위를 맨발로 걷는 시험)를 행한다. 프라람은 피펙을 롱까왕으로 추대하고 시타와 함께 아요타야 왕국으로 돌아갔다. 아요타야 왕국으로 돌아온 프라람은 하누만의 공적을 기려 아요타야 왕국을 통치하도록 하였으나 하누만이 하루 만에 나라를 반환하자 "롭부리"라는 나라를 만들어 통치하도록 하고, 그 밖의 장수들에게 높은 지위의 포상을 하였다.

 

8장 : 아요타야의 평화
토사칸이 죽은 후 그의 아내 낭몬토는 임신 일 개월의 몸으로 피펙의 아내가 되었다. 낭몬토의 아들 파이나쑤리웡이 이 사실을 알 게 되어 피펙을 증오하여 싸움을 벌이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프라람은 동생 프라프룻과 프라쌋따룯을 보내 피펙을 도와준다.
한편 토사칸의 유모인 마녀 삐쌋아둔이 복수를 하기 위해 시타를 찾아간다. 이십개의 얼굴을 가진 토사칸의 모습이 어떻게 생겼나 그려 보여 주라고 유혹한다. 토사칸의 모습을 그리자 때마침 프라람이 숲을 순시하고 돌아온 것을 안 삐쌋아둔이 그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시타가 아무리 그림을 없애려 해도 찢어지지도 불에 타지도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침대 밑에 숨겨 두었으나 프라람이 이것을 발견하게 된다. 시타를 의심하게 된 프라람은 시타를 죽이라고 프라락에게 명하고, 프라락은 형수가 숲으로 도망가도록 내 버려 두었다. 시타는 숲 속에서 도인의 도움을 받고 지내면서 아들을 낳아 프라몽꿋이라 이름 짓고, 도인은 프라몽꿋의 안전을 위해 똑같이 생긴 아들 한 명을 더 만들어 프라롭이라 불렀다. 두 아이는 도인으로부터 배운 여러 학문과 활 솜씨가 탁월하여 그 명성을 아요타야 왕국에까지 떨치게 되었다.


프라람이 말 축제에서 "누구든지 이 말을 만나는 사람은 말에게 경의를 표하라. 복종하지 않는 자는 반역에 처한다."는 글귀를 말의 목에 달아 숲 속에 놓아주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달려온 말을 타고 놀던 두 아들은 명령을 어긴 죄로 프라람의 군대에 잡혀간다. 프라람은 진지에 도착한 두 명의 사내아이가 자신의 아들 임을 알게되고 그들을 데리고 시타를 찾아가 왕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였으나 시타는 거절한다. 프라람은 하누만을 시켜 프라람이 죽어 장례식을 치를 예정이니 참석해 달라는 계책을 꾸미는데, 장례식에 참석하러 왕국으로 돌아 온 시타는 그 말이 거짓임을 알고 지하 세계로 들어가 용과 함께 지낸다. 프라람은 잘못을 뉘우치기 위해 숲으로 들어가 1년을 지내면서 많은 도깨비들을 평정하였다. 이쑤언 신은 프라람과 시타가 아직도 헤어져 있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을 불러 천계에서 다시 결혼식을 올리게 하여 행복하게 살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 후 아요타야 왕국은 평온하였다.

 

 

역사교육

 

 

 

 

미국 본토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사이판과 함께 미국령으로 미국비자 없이 갈 수 있는 곳이다. 서울에서 3시간 가량이면 도착하는 곳으로 1년 내내 온화한 기후와 깨끗한 바다로 우리나라에선 휴양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속한 지역은 마리아나 제도로 이 제도의 가장 남쪽에 자리잡고 있으며 의 어원은 원주민인 언어인 차모로 말로 '우리는 갖고있다' 란 뜻의 'guahan'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의 해안은 모래사장, 절벽, 바위등의 다양한 모습이 연출되어 많은 여행객이 찾고 있으며 여행객의 발길이 드문 섬 남부지역은 한가로운 남태평양의 이미지를 볼 수 있는 곳이다.



국가개요

면적 : 549 ㎢
길이는 48.39 km, 폭은 북쪽의 좁은 지역이 13.71 km, 남쪽의 가장 넓은 지역이 18.55 km으로 우리나라의 거제도와 비슷한 크기다.

수도 : 아가나

정치형태 : 미합중국 영토의 일부로 되어 있는 까닭에 주민은 미국 시민권과 자치권을 갖는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에서는 투표권을 행사 할 수 없음) 정부는 선거에 의해 선출된 지사(임기 4년)가 통치를 하며,의회는 일원제이며 섬의 각지에서 선출된 21명의 의원에 의해 구성된다.

종교 : 17세기에 스페인의 예수회 선교사인 산 비토레스에 의해 카톨릭교가 전파 되어 주민의 약75%가 독실한 카톨릭을 믿고 있다. 각 성당은 마을의 수호 성인을 모시고 있으며 매년 기념 축제(피에스타)가 벌어지고 있다.

주요도시 : 아가나, 투몬

주요민족 : 주요 인종은 원주민인 차모로족이 대부분이나 그외 필리핀 등지 에서 온 동남아 인과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에서 온 아시아계 주민들도 많다. 그외 마이크로네시안, 인도, 유럽인들도 살고 있다.

주요언어 : 미국령이므로 섬전체에서 영어가 공용어로 사용되고 있지만 차모로인들은 고유의 언어인 차모로어를 사용한다. 은 일본인 관광객이 가장 많이 입국하는데 덕분에 관광지에서는 일본어가 쉽게 통용되기도 한다.

경제
경제에 효과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관광 산업으로 현재 에는 일본, 대만, 한국 관광객 등 무사증 입국으로 에 찾는 여행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노동 인구의 약 50% 정도가 관광 산업에 종사하고 있을 만큼 경제적 그리고 고용효과면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은 지하자원이 없는 대신 소량의 열대성 과일과 채소가 생산되고 있으며, 생필품이나 건축 자재, 자동차 등 모든 물건들을 외부에서 수입해서 사용하고 있다.

기후
열대성 해양기후에 속하는 의 기후는 연중 온화한 편이다. 크게 1월에서 5월까지 7월 - 11월 사이의 우기로 구분할 수 있다. 우기에도 짧은 시간 소나기처럼 내리고 마는 스콜성 강우가 많다. 은 또한 태풍이 지나가는 경로에 있어 영향을 받는 일이 많다.
해변의 연평균 기온은 약 27.2도 1년 내내 수영등의 해양 스포츠를 즐길 수 있으며 햇살이 강하므로 썬크림이나 모자와 같은 것을 준비하는 게 좋다. 밤에는 일교차가 있을 수 있고 실내에서는 냉방장치로 온도가 내려갈 수 있으므로 얇은 긴소매 옷이 필요할 수 도 있다.

사회문화
의 문화는 한마디로 복합적이라 할 수 있다. 애초의 주인인 원주민 문화와 열강의 침략시기에 겪은 스페인의 역사와 문화, 일본의 점령, 다시 미국으로 이어지는 다양하고 바쁜 역사가 그들의 생활에 고스란히 녹아있다고 볼 수 있다.


간단한 현지어
안녕! Hafa Adai! (하파 데이!)
안녕 친구!(가까운사이) Hafa lai! (하파 라이!)
안녕하세요?(격식차릴 때) Hafa tatatmanu hao? (하파 타탓마누 하우?)
무슨 일이세요? Hafa? (하파)
이름이 무엇입니까? Hayi naan-mu? (하이 나안-무?)
어디에 있습니까? (미누 나이 가이기?)
아침인사 Buenas dihas (부에나스 디하스)
저녁인사 Buenas noches (부에나스 노체스)
매우 좋습니다 Gof maolek (고프 마올렉)
내일 뵙겠습니다,또 만나요 Esta agupa(에스타 아구파)
안녕 (헤어질 때) Adios (아디오스)
감사합니다 Si Yu'os Maase(시 쥬스 마아세)
부탁합니다 (풋 파봇)
어디에 사십니까? (아마누 나 수마사가 하우?)
여기에 있습니다 (에스타 귀)
어디로 가십니까? (파라 마누 하우?)
동,서,남,북 (카탄,루찬,하야,라구)
일,월,화,수,목,금,토 (다멩구,루니스,마티스,미엣콜리스,후에비스,비엣니스,사발루)
1~12월 (이네루,피브레루,맛수,아브릿,마유,훈주,훌주,아구스투,셉티엠브리,옥투브리,노비엠브리,다시엠브리)

관광제안
에서의 즐길거리는 무엇보다도 해양 스포츠를 꼽고있다. 잔잔한 해면과 해안에 위험한 해류가 흐르는 일이 없고 조수 간만의 차이가 느린 속도로 진행 되고 수심이 평탄해서 어린이들이나 수영을 못하는 사람들도 카약이나, 제트 스키, 바나나 보트, 그리고 스노클링등을 즐길 수 있다.

에서 이동하기
은 미국령으로 웬만한 것들은 미국의 구조를 따르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대중교통이 불편한 의 교통사정이다. 개별적으로 여행 온 것이라면 렌트카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다. 국제운전면허증을 준비해가서 현지에서 차를 임대할 수 있으며 운전이 미숙하다면 추가요금을 내고 현지인 운전수도 고용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쇼핑센터에서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이용해 이동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쇼핑
작은 섬이지만 에서는 전세계 유명브랜드를 다 만나 볼 수 있다. 고급스런 쇼핑몰들이 투몬, 아가나, 타우닝 지역에 몰려 있으며 호텔도 쇼핑 아케이드를 별도로 갖고 있어 쇼핑하기는 편리하다. 또한 많은 한국인 관광객이 다녀간 덕에 한국어가 가능한 상점도 있다. 쇼핑센터에서 운행하는 셔틀버스가 편리한 쇼핑을 도와주며 쇼핑이 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간단하게나마 알 수 있다.

▣ 수퍼마켓
할인매장 처럼 운영되는데 가격은 저렴한 편이고 우리나라 음식이나 재료드을 팔아 이용하기에 좋다. 주로 미국제품을 구비하고 있다.

▣ 벼룩시장
매주말 아침 일찍 열리는 벼룩시장은 에서 활기찬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무언가를 팔고 사기 위해 몰려든 현지인들로 인해 거리에 인파와 차량이 가득하고 천막으로 만든 상가가 금방금방 만들어 진다. 진열되는 상품은 종류도 다양하고 새것, 헌것 가릴 것이 없다. 입던 옷, 신던 신발, 낡은 군복, 자동차 부품, 농산물, 생선, 악세사리등 서민적인 모습을 볼 수 있어 많은 여행객들이 찾는 곳이다. 벼룩시장은 오전 9시면 대강 정리가 되기때문에 아침 일찍 가는것이 좋다.
벼룩시장은 3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데 주변에 쇼핑센터와 슈퍼마켓등의 현대적인 상점들이 들어서면서 그 규모가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지금은 사실 관광지 같은 역할을 해 사소한 생활용품이나 기념품 정도를 구입하기에 좋다.

▣ 토산품
의 태양아래 자란 코코넛을 이용한 토산품이 많은 편이다. 이 기념품들을 보면 코코넛 하나로 만들수 있는 종류가 다양한 것에 새삼 놀란다. 비누, 오일, 시럽, 사탕류는 물론이고 원주민 여자 댄서가 입은 속옷까지 각양각색이다. 차로모 빌리지에서는 원주민들이 이러한 것들을 만드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역사



의 문화가 복합적인 것은 그들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태평양에서 한가롭게 살고 있던 이들에게 차례로 여러나라들이 들어와 차모로인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이들의 사회, 문화, 역사에 새로운 면을 장식하게 된다.

농경 위주의 평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던 이들이 서구에 알려진것은 1500년대 유럽의 탐험가, 상인등에 의해서다. 열강의 식민지 건설이 붐이 일던 시기, 스페인 세력이 점령하였고 그 후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에서 스페인이 패배해 잠시 미국이 점령하지만 2차대전 중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일본의 패망으로 다시 미국에 의한 정부가 세워지고, 1949년 트루먼 대통령에 의해 의 자치가 인정되는 미국영토에 포함되지 않은 새로운 영토로 선언되었다. 자치단체와 정부가 세워지고 주민들에게 미국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일반정보



공휴일/축제
1월 01일 설날
1월 21일 마틴루터킹 목사 생일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
2월 18일 대통령의 날
3월 06일 발견의 날
3월 29일 성금요일
3월 31일 부활절
5월 12일 어머니의 날
5월 18일 국군의 날
5월 27일 메모리얼 데이
6월 14일 국기의 날
7월 04일 독립기념일
7월 21일 해방 기념일
9월 02일 노동절
10월 07일 콜럼버스 기념일
10월 31일 만성절
11월 2일 위령의 날
11월 11일 제향군인의 날
11월 28일 추수감사절
12월 08일 성모수태제
12월 25일 크리스마스

국제전화
011-82-지역번호(0 제외)-전화번호 순이다. 저렴한 가격으로 국제 전화를 걸 수 있는 방법은 국내 통신 회사를 이용하면 된다. (전화비용은 한국시간에 맞춰 부과)

▣ 한국통신
1-888-655-5840 후에 한국인 교환원이 나온다. (국제전화 콜링 카드 문의 : 00794)

▣ 데이콤
1-888-907-8282 후에 0(안내 방송에 따라) 후에 한국인 교환원이 응대한다. (국제전화 콜링 카드 문의 : 082-100)

▣ 휴대폰 로밍 서비스
한국에서 사용하는 011/017 휴대폰, 휴대폰 번호를 에서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는 SK텔레콤의 자동로밍 서비스가 있다. 현재 출시되어 있는 대부분의 휴대폰으로 사용이 가능한 자동로밍 서비스를 이용하면 의 대부분 지역(Tumon,Tamuning,Sinajana,Hagatna,Cocos Island 등) 에서 매우 편리하게 전화를 걸고 받을 수 있다. 휴대폰의 간단한 메뉴 선택 변경으로 가능하며 출국하기전에 인천공항 3층에 있는 SK 공항로밍센터를 방문하면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기본료없이 사용한 통화료만 낸다.

유용한전화번호
응급환자 앰블란스 : 911
의료 : 649-8147(Micronesian Assit.)
범죄신고 : 911
경찰서 : 472-8911
종합병원 : 646-5801
소방서 : 477-2615
한국 영사관 : 전화 649-5232 팩스 649-1336
한인회 : 649-0070
전화번호 안내 : 411

의료시설
을 여행하는 여행자는 누구든지 자유롭게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으며, 간단한 의약품은 백화점이나 수퍼마켓,그리고 호텔 숍 등에서 구입할 수 있다. 응급 사고는 911로 전화를 하면 앰블런스가 병원까지 수송해준다.

전압 및 주파수
120V, 60 사이클을 사용한다. (220 V 제품은 어댑터 필요)

치안
치안 문제는 안심해도 된다. 세계 어느 곳이든 어두운 밤에 인적 드문 곳을 여자 혼자 걸어가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만 주의한다면 여자들끼리 여행을 가도 별 어려움이 없는 곳이다.

통화
은 미국령이므로 통용 화폐는 미국 달러이다.
신용카드로 현금을 인출 할때는 국제적인 관례에 따라 수수료가 붙는데 그날의 환율에 따라 차이가 있다.

한국으로 전화
시내전화의 요금은 25¢로서 정액제이나, 주유소, 슈퍼 등에서 쉽게 시내전화를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호텔에서의 시내 전화는 50센트, 1달러정도를 지불해야 한다. 국제전화를 할 경우에는 전화카드를 한국에서 준비하여 가져가면 더욱 효율적이다. 011+82(국가번호)+0을 뺀 지역번호+전화번호


현지로 전화
001+1(국가번호)+지역번호+상대방전화번호 전지역이 671을 사용하고 있다.

세계사 정리

 

 

 

서인도제도에서 2번째로 큰 히스파니올라섬의 동반부를 차지하는 나라.

위치 : 아메리카 카리브해
면적 : 4만 8671㎢
인구 : 883만 3000명(2002)
인구밀도 : 181.5명/㎢(2002)
수도 : 산토 도밍고
정체 : 공화제
공용어 : 에스파냐어
통화 : 도미니카 페소(RD$)
환율 : 17.10RD$ = 1달러(2002.9)
1인당 국민총생산 : 2,130달러(2000)


면적은 4만 8671㎢, 인구는 883만 3000명(2002)이다. 인구밀도는 181.5명/㎢(2002)이다. 정식명칭은 도미니카공화국(Repblica Dominicana)이다. 카리브해에 있는 국가로 수도는 산토 도밍고이고, 언어는 에스파냐어를 사용한다. 서부의 아이티와는 같은 섬을 이분하고 있으나, 면적은 아이티의 약 4배이다. 콜럼버스가 제1차 항해 때 발견한 이래 정복·점령·독재·내란 등 고난의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1. 자연

도미니카는 아이티와의 국경 북쪽에서부터 남안 중앙부에 걸쳐서 중앙산맥(최고봉은 3,175m의 두아르테산)이 뻗어 있어 국토를 북동부와 남서부로, 2대 1의 비율로 이분하고 있다. 중앙산맥의 북쪽 북부산맥과의 사이에 전개된 베이가레이알계곡(시바오 지방)은 옥토를 이루고 있어, 주요도시도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길이 400km의 북(北)야퀘강은 북서쪽으로 흘러 대서양으로 유입되고, 오사마강(江)은 남쪽으로 흘러 산토도밍고에서 카리브해(海)로 유입된다. 남서부에는 남(南)야퀘강과 해면보다 낮은 엔리키요호(湖)가 있으나, 해안을 따라 뻗은 남부산맥으로 남쪽이 막혀서 산지성(山地性)을 이루고 있다.

기후는 열대권에 속하여, 저지에서는 연중 30℃ 내외의 기온을 이루나 카리브해로 불어오는 북동무역풍의 영향으로 견디기가 쉽고 고지에서는 연평균 10℃ 내외를 이루고 있다. 연강우량은 북부가 2,000mm 이하, 남부가 1,500mm 이하이다. 영구경지 9%, 경작 가능한 땅 21%, 초원43% , 산림 12%로 이루어져 있다. 가끔 열대성 폭풍과 허리케인이 발생하여 큰 재해를 일으키곤 한다.

2. 주민

도미니카의 2000년 인구증가율은 1.64%, 출생률은 1,000명당 25.15명, 사망률은 4.72명, 영아사망률은 35.93명이다. 평균수명은 73.2세로 남자는 71.12세, 여자는 75.38세이다. 인구의 34%가 15세 이하로 유소년층(幼少年層)이 많다. 인종구성은 백인과 흑인과의 혼혈인 물라토가 73%, 백인이 16%, 흑인이 11%이다. 공용어는 에스파냐어(語)이다. 종교는 가톨릭이 94%, 신교 3% 그리고 나머지는 여러 종교를 믿고 있다.



3. 역사

도미니카는 1492년에 콜럼버스에 의해 발견되어 에스파냐의 식민지가 되었다. 16세기 중에 원주민은 전멸하였고 아프리카 흑인노예가 대량으로 수입되어 사탕수수 재배에 혹사되었다. 1795년 바젤조약에 의하여 프랑스에 이양된 이래 아이티군(軍)에 의한 점령·독립, 에스파냐통치, 재독립, 아이티에 의한 재점령 등으로 고난의 역사를 거쳤으나 1844년 드와르테의 지도하에 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고 현재의 국가기초를 다졌다. 그러나 그후에도 군벌과 결탁한 토지귀족의 배신행위 때문에 1862∼1865년의 에스파냐 지배를 비롯하여 반란·독재의 반복으로 정치정세는 문란해지고 결국 19세기 말 이후에는 미국의 지배하에 놓였다. 미국은 1917∼1924년 ‘권익의 보호와 질서유지를 위하여’ 해군을 파견하여 1941년까지 세관을 관리하였다.

미국의 동의를 얻어 1930년에 정권을 장악한 라파엘 트루히요는 족벌정치로 민심을 상실하여 1961년에 암살되고, 1963년의 총선거로 발족했던 도미니카 혁명당의 보슈 정권도 7개월간의 집권으로 종말을 고했다. 1965년 4월 대령 카마뇨 등 청년장교들이 보슈의 복귀를 요구하는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미국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실패로 끝나고, 1966년 6월의 선거에서 호아킨 발라게르가 보슈를 누르고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3기에 걸친 대통령 임기 중 정계부패와 인플레의 증대로 1978년 5월의 대통령선거에서 처음으로 야당인 혁명당의 안토니오 구스만 페르난데스에게 패하였고, 8월에는 구스만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처음으로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이룩하였다.

1982년의 대통령·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도미니카 혁명당의 살바도르 호르헤 블랑코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986년의 선거에서 호아킨 발라게르가 재선되었다. 이후 기독교 사회개혁당과 도미니카 혁명당 2개당이 번갈아 정권을 장악하는 양당정치의 형태를 띠어왔다. 그러나 1996년 5월 선거에서 전 대통령이자 도미니카 해방당에 속한 페르난데스가 승리함으로써 다당정치가 시작되었다.

4. 정치
도미니카는 1966년 11월에 제정된 현행헌법에 의하면, 원수는 국민투표에 의하여 선출되는 대통령으로 임기는 4년이다. 국회는 양원제이며 상원은 26주와 수도권에서 한 사람씩 선출되는 의원을 합쳐 40명으로 구성되며 임기는 4년이다. 하원은 인구 5만 명에 한 사람의 비율로 뽑히는 의원 149명으로 구성되며 임기는 역시 4년이다. 2000년 5월의 대통령선거에서는 도미니카 혁명당의 히폴리토 메자(Hipolito Mejia)가 승리하여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주요정당은 도미니카 혁명당(PRD)과 개혁당(PR)이 있다.

도미니카 혁명당은 안토니오 구스만 페르난데스가 1939년에 망명처에서 결성한 것으로서 소자본가·일부의 농민·지식인을 모아 결성한 정당이며, 반제국주의·반과두제(反寡頭制)의 입장을 취했으나, 기반이 안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개혁당은 트루히요 사후의 체제유지를 목적으로 1964년에 결성된 보수정당이다. 그밖에 예전의 혁명당 당수 보슈가 1973년 말에 만든 도미니카 해방당, 1970년에 개혁당에서 이탈한 극우분자를 규합하는 민중통합운동 등의 소회파(小會派)가 있다. 도미니카 공산당은 1944년에 창립되어 도미니카 혁명민주당(1946년까지), 도미니카 인민사회당(1965년까지)의 명칭으로 거의 비합법상태로 활동해왔으나, 구스만 정권 성립 후 합법화되었다.

외교적으로는 대미(對美) 협력과 OAS(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미주기구)를 존중하고 있고, NAFTA(North American Free Trade Agreement:북미자유무역협정) 및 기타 지역의 경제 통합 움직임과 관련 중남미와 카리브해(海) 연안 국가들의 지역통합을 위한 교량역할을 담당하고 있으며, 공산권과는 국교(國交)가 없다. 군사력은 총 2만 3400명으로 육군(1만 3000명)·공군(4,800명)·해군(5,600명)으로 이루어지고 수도경찰대 1만 2000명이 있으며, 군복무는 지원병제이다.

5. 경제

도미니카는 외국자본, 특히 미국자본과 대지주세력의 지배하에서 농업을 주요산업으로 하며, 사탕수수를 비롯한 소수의 산물에 의존하는 모노컬처(단일재배)를 특징으로 한다. 노동인구의 절반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농업생산은 국민총생산(GNP)의 1/5 정도를 차지하나, 대토지소유제에서 사탕수수·담배·카카오·커피·바나나 등 수출작물을 주로 재배하고 있다. 쌀·옥수수 등 국내소비용 작물도 재배하나 부족분의 식료를 대량 수입하고 있다. 제조업은 자유무역지대 업체가 주류를 이루고 있어 2000년 말 현재 46개공단에 481개 업체가 입주하고 있으며, 약 19만 7000명의 현지인력이 고용되어 있다. 공업의 대부분은 제당업이 차지하고 있고 그밖에도 면직공업·시멘트 공업 등의 경공업이 있으나 미미하다. 제조업에서는, 기업수로는 국유(옛 트루히요家 소유)가 60%, 외국자본소유가 28%, 민족자본소유가 12%이나 자본총액의 약 반은 미국민간 직접투자에 의하고 있다.

광업도 미국자본의 원조에 의해서 수출용으로 생산되는 보크사이트를 주로 산출하고 있으며, 그 밖에 금과 구리의 자원을 비롯하여 철·은·납·석유가 매장되어 있다. 수출은 원료수출·제품수입의 후진적 무역구조를 이룬다. 최대의 주된 무역상대국은 미국으로 수출의 80%, 수입의 45% 정도를 차지한다. 무역수지의 적자, 더욱이 운임·차입금의 상환 등에 의한 적자와 경상수지(經常收支)의 적자 등은 차관(40%) 및 미국의 증여(60%)에 의하여 보충되고 있다. 주요 교통수단은 자동차이며, 자동차도로는 총연장 1만 7645km이고, 철도 총연장은 1,770km이며 대부분이 제당소 전용이다. 도미니카는 카리브지역 최고의 통신선진국으로 전화사정은 양호하다.

2000년 경제성장률은 7.8%이고 실업률은 13.9%이다. 수출은 57억 달러, 수입은 94억 달러이고 주요 수출품은 니켈, 설탕, 담배, 커피, 카카오, 수입품은 연료이다. 주요 수출국은 미국, 독일, 네덜란드, 한국, 영국, 수입국은 미국, 베네수엘라, 멕시코, 일본, 에스파냐 등이다.

6. 사회
국민들은 도미니카가 콜럼버스가 미주대륙을 발견한 이래 최초로 식민활동을 시작한 곳으로, 중남미의 원조라고 생각하여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도미니카는 초등 의무교육 6년간은 무상으로 실시하고 있으나 일반적으로 교육수준이 낮아 문맹률은 15세 이상에서 17.9%이다. 신문은 최대일간지 《리스틴 디아리오 Listin Diario》를 포함해 7종 이상이 있다. 라디오방송은 HJLB를 포함해 전국에 250개국 이상이 있으며, TV방송은 국영 TV와 미국 케이블 TV를 포함해 7개국이 있다.

1980년대 후반의 도미니카 사회는 도미니카의 스페인-카리브해의 혈통을 반영한다. 도미니카 사회는 인종과 계급으로 명백하게 나누어져 있으며 소수가 사회의 부를 장악하고 있는 반면 대다수 서민들은 생존하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중산층은 자신들의 정치적, 경제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한다. 일반적으로 도미니카 사회는 신분 상승의 길이 상대적으로 막혀 있는 편이며, 많은 수의 사람들은 현재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하거나 강화할 수 있을 뿐이다. 또 소수의 백인과 대다수의 물라토, 흑인 간에 이질적 요소가 내재되어 있어 사회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7. 문화
도미니카의 인디오 영웅을 묘사한 《엔리키요》의 자 가르방, 문예평론가 페드로 엔리케스 등 저명한 문학가가 있다. 독특한 문화적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메렝게라고 하는 색다른 무곡(舞曲)도 있으나 ‘미국식 생활양식’이 일반생활에 침투되어 가고 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최초로 식민활동을 시작한 곳으로, 당시의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다. 산토도밍고는 신대륙 최초의 도시이며 당시 신대륙 개척자들의 활동 본거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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