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을 구성하고 있는 타이족은 중국 남부 지금의 운남성에 살던 민족으로 13세기경 본격적으로 짜오프라야 강변에 이주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태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가) 쑤코타이 시대(1238- 1378년) 1219년: 징기스칸의 정복 전쟁 시작
1231년: 고려에 몽고 침입 시작
1299년: 오스만 터키 제국 일어남
크메르 제국이 쇠태하면서 태국의 두 장관, 쿤 방끌랑타오와 쿤 빠므망은 1238년 크메르 제국의 북부를 점령하여 태국 민족 최초로 독립 왕국을 건설했다. 이것이 쑤코타이 왕조다.
왕조는 3대 왕 람캄행 대왕 때 전성기를 맞이하여 영토가 현재의 태국과 거의 같은 크기까지 확대되었다. 1292년 크메르 문자를 개량하여 독특한 태국 문자를 만들어 냈고 스리랑카로부터 처음으로 불교를 받아들여 국교로 삼았다.
나) 아유타야 시대(1350-1767년) 1393년: 이성계 조선 왕조 개국
1398년: 티무르 인도 침입
1453년: 오스만터키제국 비잔틴멸함
1517년: 오스만터키 이집트 정복
1592년: 임진왜란 일어남
1687년: 오스만터키제국 쇠락함
쑤코타이 남쪽의 아유타야에 새 왕조를 건설했다. 쑤코타이 왕조의 세력이 약화되면서 라마타보디 1세가 태국 사상 처음으로 법전을 만들고 1378년 쑤코타이를 병합하여 태국 전국을 통일, 동남아시아 최고의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에 이웃 나라 버마(지금의 미얀마) 의 침략을 받게 되고 1569년 버마군에 항복하면서 이후 15년간 버마의 지배를 받았다.
다) 톤부리 시대(1767- 1782년)
아유타야 붕괴 후 태국 동부 해안에 피신해 있던 딱신이 아유타야를 탈환하고 1767년 톤부리(방콕의 건너편)에 수도를 정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딱신의 정신 이상으로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고 1대 왕 겨우 15년만에 톤부리 왕조는 끝나고 말았다.
라) 방콕 시대(1782년- 현재, 짜끄리 왕조)
1794년: 이란 통일
1804년: 러시아, 터키 전쟁
1829년: 그리스 터키서 독립
1839년: 1차 아프칸 전쟁
1782년 수도를 톤부리에서 짜오프라야강 건너편, 현재의 방콕으로 옮기고 새 왕조를 열었다. 이 때부터 왕을 라마라 칭하고 현재까지 이르게 되었다.
현재 태국의 국왕은 1946년 등극한 라마 9세 푸마폰 아둔야뎃이다. 1996년은 푸마폰 국왕 즉위 50주년이 되던 해로 현존하는 전 세계 국가 지도자 중 최장기 재임이다.
태국의 왕궁
"그랜드 팔래스"를 가봤다면 에메랄드 사원(왓 프라깨우)가 있는 본당을 둘러
싼 회랑에 화려한 벽화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 벽화는 라마키안이라고 불리는 태국의
전통 서사시를 그림으로 구성하여 제작한 것으로 총170면 8칸으로 나누어 그려져 있다.
라마키안은 총 116권의 방대한 서사시로 전체가 연결 된 8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라마키안을 바르게 이해할면 인도의 라마야나를 먼저 살펴 보아야 한다.
두 작품 모두 총 116권에 달하는 장편이고, 팔리, 싼쓰크릿어가 80%를 넘는 고어(古語)로 된 서사시이다.
대략 5 세기 B.C에 Valmiki(인도 시인)는 Ramayana을 창작한다. 이 서사시는 오늘날까지도 매우 인기가 있다. 이 라마야나는 태국의 라마키안의 원작이 된다. 라마야나의 태국 버전의 메인 줄거리는 라마키안은 악마의 왕인 토사간(라마야나의 라바나)이 라마(태국의 왕)의 아내 시타를 납치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이야기 속의 라마는 흰두교의 신 비쉬누의 인간으로 현신이다. 그는 납치된 그의 아내 시타를 구출하기 위해 원숭이 군대의 지원을 받는다. 인도의 서사시 라마야나를 창작할때 시인 발미키는 두가지 전설을 조합하였다. 한가지는 북부 지방에서 뿌리를 두고 내려오는 아리아인의 전설이다. 대 서사시는 야유타야의 왕자 라마의 이야기를 첫번째 장으로 다룬다.
두번째 전설은 남부 지방에서 내려오는 전설로 이 전설은 드라비디안(남인도계인) 사람들 사이에서 매우 인기가 있는 이야기로 굉장한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 악마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발미키는 라마와 악마의의 모든 이야기를 이 서사시에 포함시키지는 않았다. 후대 다른 작가들은 이 서사시에 다른 이야기를 섞어 새로운 버전을 창조해 낸다. 그러나 발미키의 라마야나는 현재까지 인도에서 가장 유명한 라마야나의 대서사시로 기억되고 있다.
어떻게 라마야나가 태국에 전파가 된 것인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죽음 후 세기초 동안 동남아시아 전역에 인도의 종교와 정치가 전파되기 시작한다. 이시기에 태국 뿐만이 아니라 동남아시아 대륙의 많은 나라들이 라마야나를 차용했다. 발마키의 저작 외에 다른 작가들에 의한 라마야나 역시 인도에서 주변국으로 퍼지게 된다.
태국의 라마키안은 라마야나의 몇가지 버전을 혼합한 것으로 보이는데 몇몇 남부인도 버전처럼 악마의 왕 "토사칸"이 등장한다. 태국의 라마키안의 악마 토사칸은 나쁜일을 저지르지만 절대악의 존재는 아니다. 행동은 나쁘지만 라마의 아내 "시타"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은 순수해 보인다.
라마키안은 또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서 전승되고 있는 라마야나와도 비슷한데(Bridhyakorn, and Yupho 1962, P.5 and Desai 1969, p.165) 이렇게 여러 나라의 이야기를 차용해서 조합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태국의 "라마키안"은 매우 태국적인 이야기로 변형 되었다.
인도의 라마야나의 라마는 힌두교의 신인 비쉬누(Vishnu)의 화신으로 표현된다. 이것은 매우 힌두교적인 관점에서 쓰여진 종교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태국사람들이 전통적으로 믿는 종교는 불교로 태국인들은 라마야나의 힌두교적인 요소들을 벗겨내었다.
라마키안에 등장하는 라마는 "붓다"의 전생으로 묘사된다.
첫째로 라마는 모든 태국의 관습을 따르는 태국의 왕자이다. 인도의 버전과 같이 태국의 라마키안도 여러 가지 버전이 있는데 가장 인기있는 것 중 하나는 18세기에 짜끄리 왕조의 창시자인 라마 1세가 만든 것이다.
다른 것으로는 그의 아들인 라마2세에 의해 쓰여진 것이 있다.
이후 라마키안은 가면극과 인형극, 그림자 놀이 고전적인 무용극 등 다양한 공연의 소재로 이용되었고 많은 화가들이 사원을 장식하는 그림의 주제로 삼아 왔다.
왜 인도의 종교적인 서사시가 불교국가인 태국에서 인기를 얻게 되었을까?
이 질문의 대답은 콘(Khon)의 기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태국이 캄보디아의 수도 앙코르를 점령한 시기에 크메르 왕실 무용단(Brandon 1967)을 태국으로 데려간다. 그러나 이 시대의 역사 기록들은 모두 유실되어 정확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1767년의 방콕에 "콘(Khon)"이 존재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이 시대 이전에 이미 태국에서 이 무용극이 보급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확실한 것은 콘(Khon)과 낭 야이(작은 인형으로 진행되는 인형극)는 라마키안의 이야기를 기초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시대의 동남아시아 지역의 왕국의 왕들은 인도의 사상과 정치, 종교에서 자신들의 통치법을 빌려 오게 되는데 이유는 왕권 강화를 위해 자신을 신격화하고 자신들의 통치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인도의 라마야나의 등장 인물인 "라마"는 신의 현신인 왕자로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콘 무용극과 낭 야이(인형극)의 공연은 결국 이 창조된 이야기를 사실인 것처럼 사람들에 인식시키기 위한 왕의 요구로 만들어 진 것이다.
라마키안의 저작 시기로 보여지는 1782년 라타나꼬신 왕국(씨암-지금의 태국)을 설립한 짜끄리 라마티보티왕 즉 라마1세(텅 두엉) 즉위 당시 시대적 상황은 여러 가지로 어려운 시기였다.
아유타야의 멸망을 후 텅두엉은 톤부리에 나라를 세운 탁신 왕의 가장 신뢰하는 장수의 한 사람으로 잃어 버렸던 아유타야 왕국의 땅을 탈환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이후 탁신 왕이 재위 15년 만에 석연치 않은 이유로 처형(기록에는 정신 이상으로 폭정을 행했다고 한다.)을 당하자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 왕위에 오르게 된다. 라마1세는 새왕조의 정당성을 세워야 할 필요를 느낀다. 아유타야 시대 말기와 톤부리 시대의 혼란기를 직접 겪은 라마1세는 불교를 국가 안정과 번영의 한 기본적인 요인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따라서 등위 후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이 불교의 개혁이었다. 국가의 도덕적 기강과 질서의 회복에 우선적인 비중을 두었기 때문에 혼란에 빠져있던 승가(僧家)를 정비하여 승가의 권위를 회복 시켰다.
전통적인 불교 후원자 및 통제자로서의 역할에 대해 분명한 인식을 갖고 있었던 그는 불교적 가치관에 입각한 새로운 타이왕국을 건설하는 탐마라차로서 전통적인 왕권의 역할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는 종래의 역사 해석의 관점이었던 아유타야 전통의 복원이 아니라 아유타야 전통의 개혁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라마키안은 라마야나와 달리 제1장에서 국가탄생의 유래를 불교의 우주론인 삼계론(三界論)에 바탕을 두고 건국 신화의 형태로 저작하였다. 이제까지는 삼계(三界)의 존재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지옥 세계로부터 시작하여 인간 세계 그리고 신의 세계를 포함하는 색계(色界)와 인식의 세계인 무색계(無色界)를 거쳐 니르바나의 순서로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라마키안에서는 천상의 세계에서 시조(始祖)가 탄생하여 인간계로 내려와 나라를 건국하는 구성을 통해 의도적으로 우주의 존재론적 결정의 축에 있는 인간 세계를 강조하였다고 보여진다. 뿐만 아니라 업(業)사상(일상 행위에 따라 내세에서의 존재가 결정 된다)을 도입하여 국민들이 선업(善業)을 축적할 수 있는 사회적 사상을 제공하고 왕권을 정당화한 것으로 보여 진다.
라마키안 줄거리
제1장 : 최초의 왕국과 왕의 출현
수미산(짝끄라완) 꼭대기에 살고있던 히란이라는 나찰(히란약)이 이쑤언 신의 은총으로 얻은 법력을 이용하여 천지를 진동시키며 천계(天界), 인간계(人間界), 그리고 지하계(地下界) 세 부분으로 나누었다. 이쑤언 신은 히란약의 횡포로 불안에 떨고있는 삼 세계의 주인들을 구하기 위해 프라나라이(나라야나=비슈누신)를 파견하였다. 즉시 땅의 세계로 내려와 멧돼지로 변신하여 히란약을 살해하고 지구를 평정한 프라나라이는 낙(용 또는 뱀)을 타고 유해의 바다에 이르러 베다 찬가를 불렀다. 그랬더니 아름다운 연꽃이 피어났고, 꽃 안에서 귀골의 동자가 나타났다. 나라이는 그 동자를 천에 싸서 이쑤언 신에게 헌상하였다. 이쑤언 신은 그 동자에게 아노마딴이라는 이름을 내리고 최초의 아요타야국의 왕으로 명하였다.
지상으로 내려가 왕국을 건설하라는 이쑤언 신의 명을 받은 프라나라이는 비슈누신의 권유로 네 명의 행자가 고행을 하고있는 타와라와디숲에 도시를 건설하고, 아짜하카위, 육아카라, 타하, 야카의 행자 네 사람 이름의 첫 글자를 딴 아·유·타·야와 숲의 이름을 합쳐 아유타야타와라와디라 지었다. 아유타야 왕에 즉위한 아노마딴은 프라나라이의 화신으로 여겨져, 악마를 퇴치하기 위한 법력과 네 가지 무기를 받았다.
이후의 이야기는 아노마딴의 아들 아차반의 탄생과 왕위계승, 이 이야기의 중요 등장인물의 탄생과 환생 그리고 소 왕국들의 설립과정이 상세하고 장황하게 묘사되어 있다.
제2장 : 프라람의 탄생
아요타야 왕국의 톳싸롯왕이 신에게 자식을 구하는 제의를 거행한다. 네 덩어리의 밥을 만들어 신에게 바쳤는데, 그 향기가 온 천지를 진동하여, 롱까국에 살고 있던 낭몬토가 그 냄새를 맡고 깍까나쑨신을 시켜 반 덩어리를 훔쳐오게 한다. 남은 세 덩어리 반을 부인 세 명이 나누어 먹은 후 정비인 낭까오쑤리야는 프라람을, 낭까이께씨는 프라프롯을 낭싸뭇테위는 프라락과 프라쌋따룯 등 네 명의 아들을 낳았다.
한편 피펙은 낭몬토가 훔쳐온 밥을 먹고 낳은 딸이 불행을 가져올 징조라며 물 속에다 버리라고 예언하자 아버지인 톳싸깐은 딸을 물에 띄워 버린다. 수도승 차녹과 나이쏨이 강에서 목욕을 하다가 연꽃 속에 유골 넣는 용기가 들어있는 것을 보고 주워다 뚜껑을 열었더니 작은 아기가 있었다. 아기는 미천한 출신이 아닌 왕가의 후손으로 여겨졌다. 나이쏨이 데려다 정성껏 키웠는데 아기가 왕가의 후손일 경우에 후일이 복잡해질 것을 우려한 수도승 차녹은 부모를 찾아 주기로 하였다. 아기를 전과 같이 용기에 담아 싸이나무 아래 구덩이를 파고 나무판 위에 용기를 놓은 후 흰색의 왕실용 우산을 씌워놓고 부모가 찾아가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차녹이 데려다 "시타"라 이름짓고 미티라 왕국으로 데려가 양육하였다. 시타는 아름다운 아가씨로 성장하고 결혼할 나이가 되자 마하타누모리라는 이쑤언 신의 활을 쏠 수 있는 사람을 사위로 삼겠다는 방을 내걸었고, 그 활쏘기 시합에서 프라람이 승리하였다. 차녹은 톳싸롯 왕을 초청하여 프라람과 시타의 결혼식을 성대히 치루어 주었고 프라람 일행은 아요타야로 돌아갔다.
제4장 : 시타를 사랑하게된 토사칸
롱까국의 치우하(혀, 설舌)는 토사칸 왕이 국외 순시를 떠나자 7일 동안 밤낮으로 자지 않고 나라를 지키다 마지막 7일째의 밤, 밀려오는 졸음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라가 염려되어 잘 수 없었던 치우하는 혀를 길게 내밀어 왕국을 통째로 덮은 뒤에 깊은 잠에 빠졌다. 7일만에 롱까로 돌아온 토사칸은 암흑에 쌓인 도시가 적의 소행으로 파괴된 것으로 착각하고 잠에 빠져있는 치우하가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것에 격분하여 짝이라는 톱니가 달린 원형의 무기를 던져 죽였다.
미안한 마음의 토사칸은 억울한 남편의 죽음으로 슬픔에 쌓인 낭쌈마낙카에게 도시를 구경 다니며 새 남편을 만나보라고 권하였다. 코타와리 강가에서 마침 그 곳에 당도한 프라람과 시타, 프라락을 우연히 만난 낭쌈마낙카는 프라람을 보고 반해 인간으로 변신하여 프라람을 유혹하였으나 거절 당한다. 화가나 시타에게 달려들어 때리려 하자 프라락이 낭쌈마낙카의 손과 발을 잘라 버렸다. 아픔과 분을 참지 못한 그녀가 오빠 프라야컨에게 고해 바치자 프라야컨과 그의 부하 뜨리씨안은 차례로 프라람을 죽이러 갔다가 도리어 죽임을 당했다. 그녀는 롱까의 토사칸을 찾아가 시타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면서 같이 가보자고 토사칸을 충동질했다. 시타를 보고 반해버린 토사칸은 마릿에게 사슴으로 변하여 시타를 유혹하도록 하였다.
예쁜 사슴을 본 시타가 프라람에게 사슴을 잡아 달라고 하자 동생에게 아내를 부탁하고 사슴을 잡으러 숲 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나타난 사슴이 프라람의 목소리로 프라락을 유인해간 후, 이상하게 여긴 시타가 프라락을 돕기 위해 집밖으로 나왔다. 이때를 틈타 시타를 유괴하여 롱까국으로 가던 토사칸을 싸다유가 공격하였고 시타는 반지를 떨어뜨려 자신의 행방을 알린다. 사슴을 잡으러 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온 프라람은 시타가 없어진 것을 발견하고, 때마침 시타의 반지를 가지고 달려온 싸다유를 통해 그간의 경위를 듣는다. 시타를 구하는데 도움을 청하기 위하여 형제는 숲으로 하누만과 쑤크립을 찾아간다.
제5장 : 시타를 찾아서
프라람을 만난 하누만은 쑤크립을 데리고 와 팔리에게 추방당한 경위를 들려 준다. 프라람은 쑤크립이 팔리를 쳐부수는데 도움을 주고, 쑤크립은 시타를 찾는 일을 돕기로 약속하였다. 프라람은 활을 쏴 팔리를 제거하고 킫킨으로 들어가 나라를 세우고 쑤크립에게 통치하도록 한다. 칸타맛 산으로 가는 도중 금 공작은 시타의 소식을 전해 주었고 원숭이로부터는 시타의 싸바이( 어깨에 두르는 띠)를 건네 받았다.
하누만은 시타를 구하기 위해 군대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롱까로 간다.
제6장 : 하누만의 활약
하누만이 롱까에 당도하여 모든 성을 돌아다녔으나 시타의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토사칸의 정원에서 시타를 발견하였으나 프라람이 보낸 것을 알리 없는 시타 앞에 선뜻 나설 수가 없어 작은 원숭이로 변하여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이때 토사칸은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시타를 괴롭히기 위해 낭약(여자귀신)을 시켜 시타를 비난하게 하였다. 비난을 들은 시타가 목을 매어 죽으려 하자 하누만은 프라람의 반지를 내어주며 프라람이 찾으러 온 사실을 알려준다. 그런 후 정원을 부수고 화가 나서 달려온 토사칸의 아들 싸핫꾸만을 죽였다. 토사칸이 길길이 날뛰며 싸우려하자 일부러 져주어 잡힌다. 화가 난 토사칸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하여 하누만을 죽이려 했으나 아무리 해도 죽일 수가 없었다. 하누만이 자기를 태워 죽여 달라고 청하니, 토사칸은 죽일 요량으로 하누만의 몸에 불을 붙였고 꼬리에 불을 달은 하누만은 롱까국 사방을 뛰어 다니며 불을 내 롱까국을 태워 없애 버렸다.
제7장 : 프라람과 토사칸의 전쟁
하누만으로부터 시타의 소식을 들은 프라람은 칸타끼라산의 바닷가에 진을 쳤다. 한편 토사칸은 흉몽을 꾼다. 불안한 토사칸은 예언자 피펙에게 해몽을 의뢰했는데, 흉몽이라며 시타를 돌려보내 주어야 한다고 말하자 토사칸은 피펙이 프라람과 한편이라며 쫓아냈다. 혼자가 된 피펙은 프라람의 휘하로 들어가 프라람의 군대를 교란하려던 토사칸의 온갖 술수를 간파하여 프라람에게 알려 주었다.
그 동안 시타를 돌려보내 주라는 주위의 권유를 듣지 않은 토사칸은 전쟁을 하게 된다. 아들 인트라칟이 7년 동안 아키(불의 신)에게 드린 기도 끝에 삼신으로부터 받은 세 개의 활을 가지고 프라락과 네 번의 싸움을 벌이다 프라락의 마법의 화살을 맞고 죽음을 당한다. 아들의 죽음에 토사칸이 직접 전쟁에 나서자 열 명의 아들이 따라 나서고 네 차례에 걸쳐 전쟁을 하다가 마침내 죽임을 당한다.
( 이 전쟁 장면이 가장 재미있고 널리 알려져 있어 때로는 이야기 전체가 영웅신화로 알려질 정도로 독자들에게 인기가 있다. 가면극에서 변사의 입담에 따라 여러 가지 이야기가 가감되기도 한다.)피펙은 시타가 프라람에게 돌아가도록 도와주었고, 시타는 적군에 잡혀갔었던 자신의 순결함을 모든 사람들에게 증명하기 위하여 전통적으로순결을 증명하는 의식인 루이파이(불에 달군 숯 위를 맨발로 걷는 시험)를 행한다. 프라람은 피펙을 롱까왕으로 추대하고 시타와 함께 아요타야 왕국으로 돌아갔다. 아요타야 왕국으로 돌아온 프라람은 하누만의 공적을 기려 아요타야 왕국을 통치하도록 하였으나 하누만이 하루 만에 나라를 반환하자 "롭부리"라는 나라를 만들어 통치하도록 하고, 그 밖의 장수들에게 높은 지위의 포상을 하였다.
제8장 : 아요타야의 평화
토사칸이 죽은 후 그의 아내 낭몬토는 임신 일 개월의 몸으로 피펙의 아내가 되었다. 낭몬토의 아들 파이나쑤리웡이 이 사실을 알 게 되어 피펙을 증오하여 싸움을 벌이게 된다. 이 소식을 들은 프라람은 동생 프라프룻과 프라쌋따룯을 보내 피펙을 도와준다.
한편 토사칸의 유모인 마녀 삐쌋아둔이 복수를 하기 위해 시타를 찾아간다. 이십개의 얼굴을 가진 토사칸의 모습이 어떻게 생겼나 그려 보여 주라고 유혹한다. 토사칸의 모습을 그리자 때마침 프라람이 숲을 순시하고 돌아온 것을 안 삐쌋아둔이 그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시타가 아무리 그림을 없애려 해도 찢어지지도 불에 타지도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침대 밑에 숨겨 두었으나 프라람이 이것을 발견하게 된다. 시타를 의심하게 된 프라람은 시타를 죽이라고 프라락에게 명하고, 프라락은 형수가 숲으로 도망가도록 내 버려 두었다. 시타는 숲 속에서 도인의 도움을 받고 지내면서 아들을 낳아 프라몽꿋이라 이름 짓고, 도인은 프라몽꿋의 안전을 위해 똑같이 생긴 아들 한 명을 더 만들어 프라롭이라 불렀다. 두 아이는 도인으로부터 배운 여러 학문과 활 솜씨가 탁월하여 그 명성을 아요타야 왕국에까지 떨치게 되었다.
프라람이 말 축제에서 "누구든지 이 말을 만나는 사람은 말에게 경의를 표하라. 복종하지 않는 자는 반역에 처한다."는 글귀를 말의 목에 달아 숲 속에 놓아주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달려온 말을 타고 놀던 두 아들은 명령을 어긴 죄로 프라람의 군대에 잡혀간다. 프라람은 진지에 도착한 두 명의 사내아이가 자신의 아들 임을 알게되고 그들을 데리고 시타를 찾아가 왕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였으나 시타는 거절한다. 프라람은 하누만을 시켜 프라람이 죽어 장례식을 치를 예정이니 참석해 달라는 계책을 꾸미는데, 장례식에 참석하러 왕국으로 돌아 온 시타는 그 말이 거짓임을 알고 지하 세계로 들어가 용과 함께 지낸다. 프라람은 잘못을 뉘우치기 위해 숲으로 들어가 1년을 지내면서 많은 도깨비들을 평정하였다. 이쑤언 신은 프라람과 시타가 아직도 헤어져 있는 것을 보고 두 사람을 불러 천계에서 다시 결혼식을 올리게 하여 행복하게 살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 후 아요타야 왕국은 평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