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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정리

 

 

 

말레이시아또는 말련 동남아시아에 있는 연방제 입헌 군주국이다. 말레이시아 13개의 주와 3개의 연방 직할구로 구성되어 있고, 남중국해로 나뉜 말레이 반도 지역과 보르네오 섬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타이, 인도네시아, 브루나이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해상국경은 싱가포르 베트남, 필리핀과 맞대고 있다. 연방정부는 푸트라자야에 있지만, 수도는 쿠알라룸푸르이다.


문화

말레이시아는 다민족국가이다. 주류 민족인 말레이족 뿐만 아니라,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도계 말레이시아도 거주한다.


역사

인도양과 남중국해 사이의 말레이 반도는 옛부터 동서양 무역상 및 여행객들의 장소였다. 5-6세기 유입된 힌두 문화와 불교 문화는 말레이시아 북서 지역에 빠르게 보급되었고, 14세기 무렵 아랍 상인들이 이슬람교를 소개하였다.말라카 해협을 중심으로 13세기까지 상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번성한 말레이시아는 식민 열강들이 향료가 풍부한 말라카에 침범하기 시작하면서 외세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다. 16세기 포르투갈의 침공 이후 네덜란드의 말라카 점령을 거쳐, 18세기 영국이 페낭(Penang)을 점령하면서 말레이시아 지역은 20세기 초까지 외세의 지배를 받았다. 바다 건너 보루네오 섬에 있는 사라왁주는 1841년 이후 영국 모험가인 제임스 브룩(James Brooke)과 후손들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1888년 사라왁주와 북 보루네오(추후 사바로 개칭됨)는 영국의 보호령이 되었다. 

1957년 8월 31일 말라야 연방(Malayan Union)이 대영제국에서 독립하였다. 이후 툰쿠 압둘 라만이 초대 총리가 되었으며, 투앙쿠 압둘 라만이 초대 국왕이 되었다. 사바 주사라왁 주는 싱가포르,브루나이와 함께 1961년 9월 16일에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여 현재의 말레이시아 연방을 성립하였다.[4] 1962년에 브루나이가 독립하였다. 1965년에 싱가포르가 독립하였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지배계층이며, 말레이시아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말레이인들을 우대했다. 인민행동당을 이끌었던 중국계 정치가 리콴유는 이를 비판하였다. 그는 "중국계도 말레이 원주민과 같은, 엄연한 말레이인이다"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민족 간의 불화로 인한 폭동은 종종 일어났고, 말레이시아 정부는 싱가포르가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며 자국에서 추방하였다(싱가포르 입장에서 보면, 원치 않은 독립이다).

라만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1969년에 민족 간에 일어난 불화로 폭동이 일어나자(일명 5·13 사건), 인기를 잃게 된다. 라만은 사건이 터진 그 이듬해에 사임하였고, 대신에 부총리 압둘 라작이 신임 총리로 임명되었다. 라작은 민족 간의 불화를 막고 빈곤을 뿌리뽑고자 했으나 재임 중 급사하고 만다. 후임 총리 후세인 온은 단결을 강조하였으며, 민족 간의 불화를 막고자 했다.

후세인 온도 건강이 악화되었고, 5년만에 중도 사임했다. 이후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가 후임 총리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경제 발전을 위해 한국과 일본으로부터 본받고자 했다. 그는 여러 차례의 총선에서 승리하여 장기 집권에 성공한다.

2003년 압둘라 아마드 바다위가 신임 총리로 임명되었다. 2009년 압둘 라작의 아들인 나집 라작이 신임 총리로 임명되었다.

2011년 현재 말레이시아는 싱가포르,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필리핀,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으로 구성된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 10개 회원국 중 하나로 활동하고 있다.

 

수도인 콸라룸푸르를 비롯 왼쪽의 지방들은 1957년 8월 31일 영국으로 부터 독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측 지방이 1963년 9월 16일 역시 영국으로 부터 독립하고요. 두지방이 독립기념일이 다르지만 정부에서는 8월 31일을 기본적인 독립기념일로 제정하고 있습니다.

 

 

 이슬람을 믿는 자들을 무슬림이라고 하지요. 이슬람교가 돼지고기를 금하는 이유는 여러가지 설들이 있어서 어느 한가지가 정답이다라고 확신하기는 어렵습니다. 대강의 이유들을 나열하면

 

1. 중동의 환경에서 돼지는 정말 키우기 힘든 가축이기 때문에 많은 돈과 시간이 낭비된다.

2. 소, 말과 달리 노동력을 제공하지 않는다.

3. 젖을 식용으로 사용할 수 없다.

 

이런 등등의 이유들입니다.

 

 

 다음으로 단식일에 관해서 설명을 드리자면 무슬림에게는 5가지 중요한 의무가 있습니다.

 

1. 샤하다 - 알라외에 다른 신은 없으며 알라는 마지막 예언자이다.

2. 살라 - 매일 5회의 기도

3. 사움 - 금식

4. 자카 - 부자들은 반드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눔을 베풀어야한다.

5. 핫즈 - 일생에 한번 경제적 신체적으로 능력이 된다면 반드시 이슬람교의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로 순례여행을 떠난다.

 

 이렇게 있습니다. 그 중 단식에 대해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흔히들 라마단으로 알려져 있는 이 금식기간은 이슬람달력으로 9번째달 1달동안 행해집니다. 2010년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달력으로 보자면 8월11일 부터 9월9일 까지 이므로 현재 라마단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금식기간에 외국인들은 자신이 무슬림이 아니면 비록 이슬람교 지역에 있다고 해도 지킬 필요가 없지만 왠만하면 그들 앞에서 먹는 행동은 자제하고 안보이는 곳에서 먹는게 좋습니다. 이 기간은 금식뿐만 아니라 금주, 금연까지 같이 행해집니다.

 

 다만 무슬림이라도 라마단에서 예외가 되는 사람들이 있는데요.

 

 전쟁중인 군인, 다른지역에 있는 무슬림,  어린이, 노약자, 건강에 이상이 있는 사람, 임산부

 

 이렇게는 라마단에서 면제가 됩니다. 다만 라마단 기간이 지난 후 나중에라도 자신이 라마단을 행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면 반드시 행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코란에는 금식은 인내와 자제력을 가르치고 소외된 사람들을 되돌아보게 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신에 대한 순종을 나타내는 행위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금식의 계율을 지킴으로써 개인적인 과실과 악행을 속죄하고 천국에 이르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라고 해놓았습니다.

세계역사이야기

 

 

 

뉴칼레도니아는 남반구의 서경 158도와 172도 사이, 남위 19도와 23도 사이에 위치합니다. 호주 동쪽에서 1,200km, 뉴질랜드의 북쪽으로 1,500km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대한민국으로부터의 거리는 약 7,300km입니다.



 

총 면적은 18,575 km2으로 남태평양에서는 파푸아뉴기니, 뉴질랜드에 이어 3번 째로 큰 섬입니다. 프랑스의 바게뜨 빵처럼 길쭉한 형태로 생긴 길이 약 400km, 폭 50km의 그랑드 떼르(Grande Terre) 섬이 본섬입니다.
본섬에서 비행기로 20분 정도 소요되는 곳에 아름다운 소나무 숲으로 유명한 일데뺑(Ile des Pins)이 있습니다. 그 외에 로열티 군도라 불리는 리푸섬(Lifou), 마레섬(Maré), 우베아섬(Ouvéa)을 비롯한 수많은 작은 섬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며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본섬의 중앙에는 약 1,000m 길이의 척추 모양 산맥이 각기 다른 풍경과 기후의 동,서를 구분 짓습니다.
동쪽은 풍부한 강수량과 무역풍으로 숲이 우거지고 토양이 비옥합니다. 서쪽은 건조하여 곳곳에 적토가 펼쳐져 있으며, 이 지역 특유의 식물군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전체 길이 약 1,600km에 걸친 암초에 둘러싸여 형성된 지상 최대의 석호와 24,000km2에 달하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산호초도 자랑하고 있습니다. 뉴칼레도니아는 또한 매장량 세계 1위의 니켈 산지로도 유명합니다.



 

총 인구는 약 23만 명. 2005년 인구조사에서는 232,258명 이었습니다.
인종별 구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멜라네시아계 44.1%, 유럽계 34.2%, 그 외 21.7% (폴리네시안, 타히티인, 베트남인, 일본인 등)



뉴칼레도니아는 아열대 기후에 속해 연평균 기온 24℃ 전후로 초여름의 상쾌함이 연중 계속 됩니다. 기온의 변화는 비교적 적고, 가장 더운 2월의 평균 기온이 27℃, 가장 시원한 7월이 20℃정도 입니다.
남국의 강한 햇볕을 받아 땀이 솟더라도 그늘 진 곳에서 잠시 쉰다면 이내 상쾌해지는, 기분 좋은 더위가 뉴칼레도니아 기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행 떠나기 전 항상 궁금한 현지의 날씨. 지금 뉴칼레도니아의 날씨는 과연 어떨까? 현지의 날씨를 아는 방법은 없을까? 하지만 날씨에만 너무 신경 쓰다 보면 여행 전의 두근거림이 반감될 수 있으므로 유용한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프랑스 기상청 METEO-FRANCE의 뉴칼레도니아 기상 사이트 “www.meteo.nc” 입니다. 각국의 기상 정보를 모은 포털 사이트도 있지만, 현지의 기상 사이트만한 곳이 없을 듯 합니다.

오른쪽 그림을 클릭해 보세요. 실시간으로 오늘 오후 혹은 내일의 날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날씨를 나타내는 기호는 만국공통이므로 보기에 어렵지 않을 듯 합니다. 그래도 아래 위에 쓰여진 불어를 알고 싶어하시는 분들을 위해 간단한 불어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덧붙여 뉴칼레도니아는 작은 섬들, 본섬의 서해안, 동해안에서 날씨가 아주 다른 일이 종종 있습니다.
여행 출발 전에 참고하세요.
하지만 뉴칼레도니아에 도착한 후에는 현지 사람이 주는 날씨에 관한 정보에 귀 기울이세요.

 

뉴칼레도니아는 빙하기 이전에 대륙에 붙어 있었으나, 빙하기가 끝나면서 해수면이 상승해 바다에 고립된 그랑드 떼르섬이 탄생했습니다.(약 1만 년 전) 고고학적으로 가장 오래된 인류의 흔적은 암각화, 라피타식 토기(BC 2000년) 등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현재의 멜라네시아계 사람들은 동남아시아에서 카누(Pirogue, 피로그)를 타고 섬에서 섬으로 이주해 온 것 같습니다. 각 부락 마다 자급자족 경제가 이뤄졌고, 곧이어 서방에서 폴리네시아인도 이주해 왔습니다. 따라서 관습도 다양하고 언어 또한 약 27가지 이상의 방언이 있다고 합니다.



 

1774년,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쿡 선장이 서양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뉴칼레도니아를 발견했습니다. 원래 뉴칼레도니아라는 이름은 제임스 쿡이 그랑드 떼르섬의 산맥을 보고, 영국 북부의 스코틀랜드 지방의 풍경과 닮았다고 하여 붙인 것입니다.(스코틀랜드의 로마 시대 이름이 칼레도니아였다고 합니다.) “일데뺑”도 제임스 쿡 선장이 소나무가 많은 쿠니에(Kunié)섬에 붙인 이름입니다. 다음에 방문한 것이 루이 16세의 명을 받은 라뻬루즈 백작(La comte de Lapérouse)이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카톨릭 선교사가 뉴칼레도니아를 방문했습니다.
1853년, 나폴레옹 3세가 뉴칼레도니아는 프랑스령이라고 선언하여 같은 해 9월 24일에 페브리에 데포앵뜨(Febvrier Despointes) 해군 대장이 그랑드 떼르 북부의 발라드(Balade)에 3색기를 세웠습니다. 이를 기념하여 현재 9월 24일은 뉴칼레도니아의 국경일입니다.



 

프랑스는 식민지가 된 뉴칼레도니아에 정치범들을 보냈습니다. 당시 프랑스에서 배를 타고 4개월 넘게 항해해야 했으므로, 뉴칼레도니아는 세계의 끝으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1871년, 파리 꼬뮌이 발발했을 때는 약 4천명이 유배되어 대부분이 일데뺑에 유형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에는 약 3만명 정도가 국외 추방 및 유형자로 뉴칼레도니아에 송환되었습니다. 1887년 이 처벌 제도가 폐지된 후에 유형자는 없습니다.



 

1946년, 뉴칼레도니아는 식민지에서 프랑스 해외 영토로 인정됩니다. 그 결과 인종에 관계없이 뉴칼레도니아 주민은 본국과 동등한 프랑스 국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뉴칼레도니아는 니켈 광업과 관광업, 남태평양이라고 하는 특수한 지방 풍습을 가진 프랑스 공화국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특정 영역의 자치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공용어는 프랑스어입니다. 일부 호텔, 레스토랑, 면세점 등에서는 영어도 통용됩니다. 현재 많은 누메아의 호텔·면세점 등 한국인 직원을 채용 중입니다. 멜라네시아어나 폴리네시아어가 사용되는 곳도 있는데, 예를 들면 일데뺑에서는 쿠니에어를 쓰기도 합니다.

뉴칼레도니아 여행 중에 불어를 써보고 싶은 분은 이 카드를 활용해 보세요.
조금 서투른 불어라도 뉴칼레도니아인들은 반드시 웃는 얼굴로 화답할 것입니다.



* 왼쪽의 배너를 클릭하시면 Acrobat Reader를 다운로드 하실 수 있습니다.


이 중 60%는 가톨릭, 30%는 개신교입니다. 1843년 그랑드 떼르 북부에 최초의 가톨릭 선교사가 상륙했다고 합니다. 개신교 선교사는 1841년에 포교 활동을 시작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일데뺑 주민의 대부분은 가톨릭 신자이고, 마레섬, 리푸섬에는 개신교도가 많아 지역적 차이가 있습니다. 이는 역사적으로 영국인 선교사(개신교)와 프랑스 선교사(가톨릭)가 서로 보다 많은 신자를 확보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며 기독교를 포교하였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누메아(뉴칼레도니아의 수도)나 웨(로열티 군도의 리푸섬에 소재) 등 인구가 많은 마을에서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교회가 가깝게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두 개의 종파가 서로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멜라네시아계 주민이 기독교로 개종 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퍼지기 이전의 전통이나 의식도 숨쉬고 있습니다. 마을의 추장이나 섬의 대추장은 세습제로 선택됩니다. 꺄즈(La case, 전통 가옥의 이름)의 지붕을 새로 바꿀 때나 작물을 수확할 때 마을사람들이 상부상조하는 전통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섬사람들은 숲이나 동굴을 신성한 영혼이나 성령이 머무는 장소로 생각합니다. 또한 특정 장소를 신성시하는 관습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특정 장소에 외부 사람의 출입을 금지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보통은 관광객이 여행하기 부적합한 곳에 위치해 있으므로 별다른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뉴칼레도니아는 일반적으로는 치안 상태가 좋은 곳입니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
지갑이나 현금, 고가의 물건 등 귀중품은 객실에 두지 마시고 세이프티 박스 등 안전한 방법을 이용해 보관해 주세요.



뉴칼레도니아는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곳입니다. 현지의 관습을 존중해 주는 것은 여행자에게 있어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누메아 같은 도시에서는 특별히 조심할 것은 없습니다만, 카지노나 몇몇 레스토랑 등은 지나치게 캐주얼한 복장이나 샌들로는 입장하실 수 없습니다.
작은 섬에서 지켜야 할 에티켓으로는 원주민이나 원주민 가옥 사진을 찍을 때 허락을 구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신성한 장소로 여겨지는 곳에 출입할 때에도 원주민의 허락을 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보통 이러한 곳은 관광객이 별로 가지 않는 곳이므로 과도하게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연 보호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부상을 막기 위해서 산호는 직접 건드리지 않도록 합시다.



뉴칼레도니아에는 팁 문화가 없습니다.
미소와 함께 “Merci!(메르씨)”라는 한 마디를 팁 대신 전해주세요.



타인을 촬영할 때, 상대방에게 승낙을 구하는 것은 당연히 지켜야 할 매너입니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지만 뉴칼레도니아인은 친절하기 때문에 미소나 손짓, 몸짓만으로도 얼마든지 촬영허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외에 몇몇 건물이나 원주민 가옥 등은 촬영 금지인 곳도 있기 때문에 사진 찍기 전에 한 번 확인해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뉴칼레도니아 국가번호 : 687
뉴칼레도니아 국내 전화번호 및 핸드폰 번호 : 6자릿수
공중 전화의 대부분이 카드식으로 1,000 XFP, 3,000 XFP, 5,000 XFP 3종류가 있습니다.
전화 카드는 우체국, 서점, 담배·잡화점 등에서 판매합니다.



직통 전화 :00 + 82(한국 국가번호) + (0을 뺀 지역번호 + 걸고자 하는 전화번호)



뉴칼레도니아에서 한국에 우편을 보낼 경우, 그림 엽서(15cm × 10cm 이하)는 세계 어느 곳으로 보내도 110 XFP 입니다.
편지의 경우 20g까지 150 XFP, 50g까지 320 XFP, 100g까지 645 XFP입니다.
항공편은 통상 3일 ~ 1주일, 배편은 3주 ~ 4주 정도 소요됩니다.

주소 : 7 rue E. Porcheron, Quartier Latin
영업시간 : 월~금요일 - 7:45~15:30
                   토요일 - 7:30~11:00
                   일요일 - 휴무


누메아 시내에는 인터넷 카페도 있습니다만, 보통 한국어 폰트가 깔려 있지 않습니다. 인터넷 카페에 노트북을 반입하여 이용가능 하지만 랜포트로 연결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현재로써는 무선 인터넷이 되는 곳은 드뭅니다.

 

뉴칼레도니아 국가번호 : 687
뉴칼레도니아 국내 전화번호 및 핸드폰 번호 : 6자릿수
공중 전화의 대부분이 카드식으로 1,000 XFP, 3,000 XFP, 5,000 XFP 3종류가 있습니다.
전화 카드는 우체국, 서점, 담배·잡화점 등에서 판매합니다.



직통 전화 :00 + 82(한국 국가번호) + (0을 뺀 지역번호 + 걸고자 하는 전화번호)



뉴칼레도니아에서 한국에 우편을 보낼 경우, 그림 엽서(15cm × 10cm 이하)는 세계 어느 곳으로 보내도 110 XFP 입니다.
편지의 경우 20g까지 150 XFP, 50g까지 320 XFP, 100g까지 645 XFP입니다.
항공편은 통상 3일 ~ 1주일, 배편은 3주 ~ 4주 정도 소요됩니다.

주소 : 7 rue E. Porcheron, Quartier Latin
영업시간 : 월~금요일 - 7:45~15:30
                   토요일 - 7:30~11:00
                   일요일 - 휴무


누메아 시내에는 인터넷 카페도 있습니다만, 보통 한국어 폰트가 깔려 있지 않습니다. 인터넷 카페에 노트북을 반입하여 이용가능 하지만 랜포트로 연결하여 사용해야 합니다. 현재로써는 무선 인터넷이 되는 곳은 드뭅니다.

 

뉴칼레도니아의 통화는 퍼시픽프랑입니다.
기호는 CFP 또는 XFP로 표기되며 현지에서는 보통 “프랑”으로 부릅니다. 프랑스에서는 2002년부터 유로를 쓰지만, 뉴칼레도니아에서는 여전히 퍼시픽프랑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퍼시픽프랑과 유로는 고정 레이트로 약 1유로 = 119.77 XFP입니다.



현재 대한민국 내에서 퍼시픽프랑으로의 환전은 되지 않고 있으므로 국내에서 유로나 달러로 환전하신 후 뉴칼레도니아 현지 공항 내 환전소, 누메아 시내 은행, 호텔 등지에서 퍼시픽프랑으로 환전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대한민국 내에서 퍼시픽프랑을 원화로 환전하실 수 없기 때문에 남은 퍼시픽프랑은 귀국 시 통투타 공항에서 유로나 달러로 환전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뉴칼레도니아에서 VISA나 MASTER 신용카드는 외국인 관광객이 많은 곳(호텔이나 면세점, 레스토랑, 부띠끄 등)에서는 큰 불편 없이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현지에서 신용카드 사용 시, 지면에 서명 하는 방식이 아닌,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곳도 있으므로 출발 전 신용카드의 비밀번호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 ★표는 매년 바뀌는 휴일










뉴칼레도니아는 낮은 습도와 상쾌한 기후가 일년 내내 계속 되므로 스포츠 애호가들의 천국입니다. 따라서 국제적인 스포츠 행사도 많습니다. 관심 있으신 스포츠 애호가분들을 위해 2008년에 예정된 국제 스포츠 이벤트 일정을 싣습니다.



누메아 국제 철인 3종 경기 대회는 국제적인 수준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아 세계 각국의 철인들이 참가하고 있습니다.
(수영1.5km/자전거40km/런닝10km)

대회 공식 사이트 (불어사이트)http://www.lctri.org/
주최: LIGUE CALEDONIENNE DE TRIATHLON (LCTRI)
주소 : BP 328 - 98845 Noumea Cedex
Tel:(687)28.18.33   Fax:(687)28.18.33   Emaillctri@offratel.nc


COMINC 공식 사이트http://www.marathon-noumea.lagoon.nc/
주최: COMINC
주소 : BP 333-98845 Noumea Cedex
Tel:(687)28.10.57   Fax:(687)28.80.80   Emailcominc@lagoon.nc

 



꼬꼬띠에 광장내 오피스 (중심가)
꼬꼬띠에 광장 중앙의 분수의 서쪽에 위치

꼬꼬띠에 광장 내 오피스
월~금 8:00 ~17:30 / 토 9:00 ~12:00
주소 : 14, J. JAURES - SQUARE ORLY, PLCE DES COCOTIERS, BP. 2828-98846, Noumea
Tel : (687) 28.75.80 Fax:(687) 28.75.85
프리 다이얼 : 05.75.80(국내 전용)

앙스바타 해변의 중앙에 위치한 바다를 향해 있는 전통 지붕을 한 건물

앙스바타 오피스
월~금 8:30 ~18:30 / 토, 일 9:00 ~18:00
주소 : PROMENADE ROGER LAROQUE, NOUMEA



누메아 시내 쇼핑센터 「르 빌라쥬(Le Village)」내에 있습니다.

월 12:00 ~ 4:30 / 화·수·목·금 8:00 ~16:00 / 토 8:00 ~12:00
주소 : Le Village, BP 115-98800, NOUMEA
Tel : (687) 27.78.05 Fax:(687) 27.48.87
웹 사이트 : http://www.tourismeprovincenord.nc/



웹 사이트 : http://www.iles-loyaute.com/

위치 : 앙스바타 란타나 비치 호텔 입구 옆

주소 : 113, avenue R. Laroque, Anse Vata, 98800, Noumea
Tel : (687) 28.93.00 Fax:(687) 28.91.21
웹 사이트 : http://www.tourismeprovincenord.nc/

꼬꼬띠에 광장 옆의 SEBASTOPOL 대로에 접한 건물

Tel : (687) 27.66.27 Fax:(687) 27.48.27
주소 : 메인 오피스 27, rue Sebastopol, Central Bldg, 98800, Noumea



바오(Vao) 사무소
Tel : (687) 46.10.27

일데뺑 공항 안내소(AEROGARE DE L'ILE DES PINS)
Tel : (687) 46.14.00

리푸섬 관광 안내소
Tel : (687) 45.00.32 Fax : (687) 45.40.39

※ 이 외에 통투타 국제 공항, 마젠타 공항, 리푸섬 공항에도 관광 안내소가 있습니다.

뉴칼레도니아에서는 관광객을 위해 무료로 배포하는 관광 자료가 많이 있습니다. 위에 표기된 관광 오피스 외에도 통투타 공항 인포메이션, 누메아의 각호텔 로비나 면세점 등에도 놓여 있습니다.

 

경찰 17 / 소방차 18 / 구급차 15

뉴칼레도니아 의료 센터(CENTRE HOSPITALIER TERRITORIAL DE NOUVELLE-CALEDONIE) http://www.cht.nc/
누메아 시내에 위치한 종합병원

뉴칼레도니아에서 여권을 분실했을 경우, 현지에 한국 영사관이 없으므로 여권의 재발행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귀국을 위해서는 「출국 허가증」을 현지 경찰에 신청하셔야 합니다. 수속하는데 수일이 소요될 가능성이 있어 귀국 일정에 차질을 빚을 수도 있으므로 여권은 분실하지 않도록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만의 하나 여권을 분실할 경우에 대비하여 여권 사본, 국내 신분증(주민등록증이나 면허증), 여권용 사진 등을 준비하시는 것도 좋습니다. 이 서류들과 함께 여권을 분실한 장소의 관할 경찰서가 발행한 분실 신고 증명서를 지참하여 누메아 국제 경찰 본부에 「출국 허가증」을 신청하여야 합니다.

뉴칼레도니아 국제 경찰 본부(POLICE NATIONALE)
Tel : (687) 24.33.00 Fax : (687) 27.12.22

 



일데뺑의 왕새우, 로열티 제도의 킹크랩 등 뉴칼레도니아는 해산물의 천국이기도 합니다. 특히 현재 가까운 일본에서는 일명 “천사의 새우”라는 왕새우가 대인기입니다. “천국”인 뉴칼레도니아에서 나기 때문에 「천사의 새우」로 불리는 이 새우는 살짝 달콤한 맛이 나는 통통한 몸통을 가진 고급 식재료입니다. 화학 약품이나 사료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산에 가깝게 양식하고 있기 때문에 회로 먹어도, 데쳐 먹어도 안정성에서나 맛에서나 최고의 품질을 자랑합니다.

사슴고기는 뉴칼레도니아의 대표적 특산품 중 하나입니다. 주로 육회나 스테이크로 먹습니다. 뉴칼레도니아의 사슴은 “루사”라 불리는 품종으로 본래 인도네시아가 원산지이지만 뉴칼레도니아의 기후 및 풍토에 잘 맞아 목축이 발달하였고, 북부에서는 야생화되어 야산에서 생활하는 사슴을 흔치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또 누메아 교외로 나가면 시골 요리로 사슴 스테이크를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씹는 맛이 좋고 신선한 청정 사슴 요리를 뉴칼레도니아에서 맛보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입니다.

달팽이 요리의 본고장인 프랑스에서 뿐만 아니라 뉴칼레도니아에서도 달팽이 요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일데뺑 산 달팽이는 프랑스 산 달팽이 보다 훨씬 크고 씹는 맛도 좋아 훨씬 더 맛이 좋다는 평도 있습니다. 현재 개체 감소 방지를 위해 포획이 제한되어 있어, 일데뺑의 레스토랑, 호텔 내에서만 맛볼 수 있습니다.

누메아에서 디저트를 드실 때 바닐라 향을 느끼셨다면 이는 리푸섬의 바닐라 농원에서 수확된 천연 바닐라로 만든 것일 확률이 높습니다. 기생 식물인 바닐라는 재배에 시간이 많이 걸려 대량생산을 할 수 없습니다. 그윽한 향기를 뽐내는 손수 만든 바닐라를 뉴칼레도니아에서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뉴칼레도니아에서는 과일도 많이 재배되고 있습니다. 바나나, 파인애플, 망고, 파파야 등 보기에도 아름답고 단맛이 풍부합니다. 11월 전후에는 리치가 제철입니다.

대부분의 레스토랑에서 수입 커피를 제공합니다만, 뉴칼레도니아 국내에서도 그 양은 적지만 커피가 생산되고 있습니다. 특히 본토인 그랑드 떼르의 산자락에서 재배되고 있는 Bourbon Pointu(부르봉 뽀앵뛰) 또는 Cafe Le Roy(카페 르호와)라 불리는 향기가 풍부한 품종은 커피 매니아들이 인정하는 세계적으로 드문 커피입니다.

「새우나 게를 비롯해 가리비 등 어패류 종류가 풍부하고 신선합니다. 또한 기후가 온난하고 연간 해수온이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굴 양식에는 최적의 조건입니다. 일 년 내내 생굴을 먹을 수 있습니다. 쇠고기나 기타 육류도 깨끗한 자연의 풀만 먹고 있기 때문에 아주 양질의 고기라 할 수 있지요. 사슴, 양, 비둘기 등 그 종류에 있어서도 다양합니다. 그야말로 식도락에 있어서도 뉴칼레도니아는 천국일 수 밖에 없습니다.」

 

 

 

 

 

 

 

 

 

 

프랑스 각 지방의 요리를 자랑으로 여기는 레스토랑도 많이 있으므로 남태평양의 프렌치 파라다이스 뉴칼레도니아에서 “음식”의 프랑스 일주를 즐길 수 있습니다. 프랑스 요리라 하면 약간 무거운 것을 상상하기가 쉽지만, 누메아의 요리는 소재를 살린 시원스러운 맛내기가 기본입니다. 한국인에게도 적당하고 양도 적당합니다.


뻬리고르 지방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랑스 요리의 진미 푸아그라의 특산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최고급 요리라고 생각해 맛 볼 기회가 적었던 분은 꼭 누메아에서 이 지방 요리를 맛 보시기 바랍니다. 프랑스에서도 뻬리고르 지방은 미식의 지방으로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맛있는 치즈 퐁뒤를 뉴칼레도니아에서 맛 볼 수 있습니다. 퐁뒤는 본래 높은 산악 지방의 요리입니다. 누메아에서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덤베아는 뉴칼레도니아 중앙 산맥의 일부로 저녁이면 꽤 선선합니다. 이 곳의 레스토랑에서는 프랑스 직송의 맛있는 치즈를 이용한 요리가 명물입니다. 퐁뒤 외에 녹은 치즈를 감자에 얹어 구워먹는 라끌렛뜨도 추천합니다.

유명한 프로방스의 요리로 Bouillabaisse(부야베스)가 있습니다. 각종 신선한 해산물을 넣어 만든 해산물 수프로 양 또한 푸짐합니다. 가볍게 드시고 싶다면 숲드뿌와쏭(생선수프)을 맛보시는 것도 좋습니다.

크레쁘는 원래 프랑스 북서부에 위치하는 브르타뉴의 요리입니다. 본래는 사과주를 곁들여 먹는 요리입니다. 다양한 바리에이션의 크레쁘는 한끼 식사로도, 디저트로도 손색이 없습니다.

벨기에와의 국경에 접하는 이 지방의 명물 요리는 홍합 요리입니다. 화이트 와인으로 익힌 홍합 요리가 보기만 해도 흐뭇한 큰 그릇에 담겨 나옵니다.

독일과의 국경에 접한 알자스 지방의 요리는 돼지고기를 주로 사용합니다. 식초에 절인 양배추와 소세지, 감자 등을 화이트 와인으로 쪄낸 슈크루트가 대표 요리입니다. 알자스산 화이트 와인 리슬링, 뮈스꺄, 게부르쯔라이너 또한 한국인의 입맛에 잘 맞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뉴칼레도니아의 향토 요리는 프랑스 요리와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지의 신선한 식재로 한 요리는 새로운 미식의 즐거움을 가르쳐 줍니다.


“부냐”란 뉴칼레도니아의 멜라네시안들이 결혼식과 같은 큰 행사날에 먹는 전통 요리입니다. 고구마나 감자, 토란, 닭고기나 생선 등을 넣고 코코넛 밀크로 맛을내어 바나나 잎으로 싸서 가열한 돌멩이로 찐 특이한 요리입니다. 작은 섬 등지에서 쉽게 맛 볼 수 있으나 시간이 걸리는 요리이므로 사전 예약이 필수입니다.





프랑스 풍이면서 현지에서 나는 최고의 식재를 도입한 소박한 시골 요리. 뉴칼레도니아화한 프랑스 요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슴고기 카르파치오는 물론이거니와 새우, 슈크루트 등 프랑스 본토에 뒤지지 않는 훌륭한 요리들을 맛 볼 수 있습니다.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뉴칼레도니아에서 해산물을 먹지 않는다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현지 산 왕새우나 작은 새우, 각종 어패류, 생선 등 언제나 신선한 해산물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습니다.

 

 

 

 

 

프랑스 산 와인이 주를 이룹니다. 저렴한 하우스와인 테이블 와인이라면 한 병에 2,000 XFP 정도부터 레스토랑에서 주문할 수 있으므로 한국에서 마시는 것 보다 훨씬 저렴합니다. 또한 누메아의 고급 레스토랑에서는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귀한 와인을 맛 볼 수 있습니다.



뉴칼레도니아에서 가장 인기있는 맥주는 바로 “NO. 1 (넘버원)” 맥주. 가볍고 상쾌한 맛이 특징으로 언제라도 부담없이 마시고 싶어지는 맥주입니다.



현지에서 시판되고 있는 「Mt. Dore(몽도르)」라고 하는 물은 누메아 교외의 몽도르산에서 나는 내츄럴 워터입니다. 뉴칼레도니아에서는 수도물도 안심하고 마실 수 있습니다.



맥주를 레모네이드 같은 소다수와 섞은 칵테일입니다. 뉴칼레도니아에서는 알코올 도수 1% 미만의 논알콜 맥주로 제조되고 있고 카페 등에서 많이 마시는 상쾌한 맛의 칵테일입니다.

역사교육

 

 

 

 

인도양 중북부 몰디브제도(諸島)로 구성된 나라.
위치 : 서남 아시아 인도 서남방 인도양상
면적 : 298㎢
인구 : 28만 1000명(2002)
인구밀도 : 943명/㎢(2002)
수도 : 말레(Male)
정체 : 공화제
공용어 : 디베히어
통화 : 루피(Rufiyaa)
환율 : 11.77루피 = 1달러(2002.9)
1인당 국민총생산 : 1,960달러(2000)



자세히

면적은 298㎢, 인구는 28만 1000명(2002)이다. 인구밀도는 943명/㎢(2002)이다. 몰디브의 정식명칭은 몰디브공화국(Republic of Maldives)이다. 수도는 말레이며, 디베히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다. 스리랑카의 남서 약 650km에 있으며, 8°선해협(Eight Degree Channel)에서 동경 73°선을 따라 적도 남쪽까지 남북으로 약 760km, 동서 128km의 해역에 산재하는 섬들로 구성되어 있다.


1. 자연
몰디브는 인도령 래카다이브제도의 남쪽에 있는 도서군으로, 섬의 수는 2,000여 개에 이른다고 하나 산호초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산호충의 번식 상태에 따라 항상 변동하므로 정확한 수는 정부에서조차 알 수 없다고 한다. 따라서
육지면적도 불분명하다. 제도는 켈라이·틸라둠마티·물라쿠·말로스마둘루·아두·말레 등 19개의 산호초·환초로 대별되며 2,000여 개의 섬들 중 220개 섬에 주민이 거주한다. 섬의 고도(高度)는 낮아 어느 곳이나 6m에 미치지 못한다. 기후는 고온다습한 열대성기후로 1년은 남서몬순계(5~10월)와 북동몬순계(11∼4월)로 나뉜다. 남서몬순계에는 강한 바람이 불고 강우량이 많으나, 북동몬순계에는 공기가 건조한 데다가 바람이 잔잔하여 비교적 견디기가 쉽다. 우계의 변절기에 해당하는 3∼5월은 1년을 통해서 가장 더운 시기이다. 연평균기온은 24∼30℃이고. 연평균강우량은 1869m㎜이다.


2. 주민
몰디브의 인종구성은 싱할라계(Sinhalese), 드라비드계(Dravidian), 아랍인(人), 아프리카인으로 이루어져 있다. 몰디브제도에는 북부에 인도(드라비다)계, 중부에 아랍계가 많으며 남부는 스리랑카계가 분포한다. 공용어인 몰다비안 드히베히(Maldivian Dhivehi)어는 인도-유럽 언어군에 속하며, 대부분의 정부 문서는 영어를 사용한다. 종교는 대부분이 수니파 이슬람교이다. 2000년 인구증가율은 3.06%, 출생률은 1,000명당 38.96명, 사망률은 8.32명, 영아사망률은 65.52명이다. 평균수명은 62.2세로 남자는 61.05세, 여자는 63.4세이다. 15세 이상 문맹률은 6.8%이다(1995). 의무교육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3. 역사
몰디브제도에는 BC 1세기경 스리랑카와 인도로부터 싱할리인(人)이 건너와서 살았다고 한다. 따라서 북부는 인도(드라비다)계, 중부는 아랍계가 많으며 남부는 스리랑카계가 분포한다. 그들은 처음에는 불교를 신봉하였으나, 12세기 중엽부터 아랍인과의 교역이 활발해짐에 따라 아랍인에 의한 이슬람교 포교활동의 영향을 많이 받아 전 주민이 이슬람교도가 되었다. 1887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고 스리랑카에 식민지로 편입되었으나, 1948년 스리랑카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것과 아울러 영국 직할의 보호국이 되었다. 그후 일시적인 공화제를 거쳐 1965년 7월 영국과의 손을 끊고 완전 독립을 달성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UN(United Nations:국제연합)에 가맹하고 1968년 11월 신헌법을 시행하여 공화국이 되었다. 1985년 7월에 영국연방에 정식 가맹하였다.


4. 정치
몰디브는 원래 이슬람교의 술탄에 의한 세습왕제였으나, 1965년 독립 후 1968년 11월 공화제 이행(移行)을 발표하고 이브라힘 나시르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2001년 현재의 대통령 마우문 압둘 가윰(Maumoon Abdul Gayoom)은 1978년 7월의 선거로 임기 5년의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1988년에 쿠데타 미수 사건이 있었으나 1998년 11월 선거에서 5선에 성공하였다. 의회는 일원제이며 임기 5년의 의원 5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각은 10명의 각료로 되어 있고, 정당은 없다. 이슬람 종교법을 기반으로 독립적인 사법기관을 운용한다.

몰디브의 섬은 행정상 19개의 환초(環礁)로 구분되며, 각 환초에는 정부에서 임명한 환초장이 있다. 또 이 나라의 특징은 모든 구조가 섬 단위로 되어 있는 점으로 비행장 섬, 도시 섬, 병원 섬, 교도소 섬, 농장 섬 등 각 섬이 기능적으로 결정되어 있다. 수도가 있는 말레섬은 이 나라 유일의 도시 섬이다. 외교면에서는 비동맹중립을 기본방침으로 하고 있다. 병역은 지원제이며, 정규군이 약 1,500명 있다.


5. 경제
몰디브는 1970년대에는 경제성장률이 저조하였으나 1978~1982년 사이에는 평균 경제성장률 9.5%를 유지하였고 1985~1992년 사이에는 1인당 국내총생산이 매년 8.5%씩 늘어나는 호조를 보였다. 국내총생산의 산업별 비율은 관광업 17%, 어업 12.5%, 나머지는 농업·가내수공업·농수산물 가공업 등의 순이다.

몰디브의 주산업은 관광업, 가다랭이잡이 중심의 어업과 코코야자·빵나무·과실 등의 재배이다. 산호초로 구성된 섬이므로 흙과 물이 적어 국민의 주식인 쌀과 야채 재배가 곤란하여 쌀은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야채는 귀중품에 속한다. 따라서 몰디브 경제는 어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으나, 조용하고 깨끗한 환경과 다양한 해양 생태계를 바탕으로 최근 관광개발이 순조롭게 추진되어 어업에 이은 외화 획득의 근원으로서 주목되고 있다. 관광객수도 꾸준히 증가하여 2000년에는 46만 명이 몰디브를 방문하였고, 1972년 최초의 휴양시설이 개설된 이래 2000년에는 총 86개소로 증가하였다.

무역은 미국, 스리랑카, 타이, 독일, 싱가포르를 주요 대상국으로 하고 수산물이 수출의 95%를 차지하고 있다. 1999년 경제성장률은 8.5%이고 수출은 6400만 달러, 수입은 4억 210만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생선, 의복류, 수입품은 소비재, 석유이다.


6. 사회
몰디브는 인종·언어면으로 보면 싱할리인(人)과 관계가 깊다. 그러나 전 주민이 이슬람교로 개종한 이래 이슬람문화권에 속하게 되었고, 현 정부도 이슬람문화의 육성을 목적으로 한 문화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교육은 널리 보급되어 있으며, 공립교육기관은 3가지로, 《코란》을 가르치는 전통적인 학교, 디베히어(語) 학교, 영어로 가르치는 학교가 있다.

섬은 산호초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가옥의 벽이나 도로도 흰색이어서 적도의 강한 햇볕이 눈부실 정도이며 일견 평화로운 낙원을 이룬다. 그러나 영국 통치하에 놓였던 옛날에는 말라리아의 만연으로 인구의 반수를 잃은 일도 있었다. 독립 후 UN(United Nations:국제연합)의 원조로 열대 전염병 구제정책이 철저히 취해져서 말라리아는 전멸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의료시설은 불충분하고 그밖에 통신·운수 등의 정비도 미비한 상태이다.


7. 문화
몰디브에서는 특별한 행사를 제외하고는 전통음악과 춤을 쉽게 구경할 수 없고, 대신 유럽 등 외국문화 영향을 받은 현대 디베히문화를 접할 수 있다. 도시에서는 흔히 서구문명을 볼 수 있으나 라마단의 시작과 끝 무렵에는 몰디브인만의 독특한 문화를 느낄 수 있다. '큰 북'이라는 뜻의 보루베루(bodu beru)는 잘 알려진 전통음악과 춤이며, 그밖에 디베히 노래를 부르는 록밴드 등도 있다. 몰디브인의 주요 식량은 생선과 쌀로 육류와 닭고기는 아주 특별한 때에만 먹을 수 있다.


8. 대한관계
몰디브는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다. 한국과는 1967년 11월, 북한과는 1970년 6월에 수교하였으며, 1970년 이후 한국은 물자의 원조·기증을 계속하고 있다. 1993년 외무장관 자밀이 비공식 방한하였다. 양국간에는 문화협정(1984), 경제·기술협력협정(1984), 항공협정(1990)이 체결되었다. 1999년 현재 대(對) 한국 수입은 101만 7000달러이다. 주요 수입품은 섬유류, 기계류, 전기기기, 플라스틱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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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역사이야기

 

 

 

 

1)고대 스위스 역사
스위스 땅에 인류가 살기 시작한 것은 후기 구석기시대부터이며, 알프스의 빙하지대에 있는 동굴과 바위에는 그들의 자취가 남아 있다. 신석기시대에는 취리히호(湖), 뇌샤텔호 등의 주변에 정착한 호상(湖上) 생활인이 있었으며, 그 항상(杭上) 가옥 유적이 1853년부터 발견되었다. 이들 취락은 그 후 청동기시대·철기시대까지 계속되며 후기 철기시대의 라텐기(期)는 뇌샤텔 호반의 지명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BC 5세기경 켈트인이 정착하였는데, 가장 강력한 헬베티족(族)은 스위스 서부를 차지하고 라인강 북쪽의 게르만인과 대립하였다. 이 부족명에서 스위스의 옛 이름 헬베티아가 생긴 것이다. 헬베티족은 BC 107년 로마의 집정관 카시우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BC 59년에 론강을 따라 갈리아의 평원에 나가려 했으나 카이사르의 군대를 만나 패배했다. 그 다음부터 급속히 로마화되었으며, 4세기에는 그리스도교가 전해졌다. 5세기의 민족 대이동 때에는 서부에 부르군트족, 동부에 알라만족이 정착하였으며, 부르군트족은 라틴화되고 알라만족은 게르만색이 강하여 언어의 경계가 형성되었다.

2. 중세 스위스 역사
게르만인 중에서 프랑크족이 가장 강력한 왕국을 만들었으며, 5세기 말에는 스위스를 병합하였다. 그러나 게르만법에 의한 세습재산 분할제 때문에 국토의 분열과 항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이에 따라 스위스도 분할되었다. 특히 우리 지방은 중유럽과 이탈리아를 잇는 가도에 해당되며 경제적·군사적 요지였기 때문에 남북에서 모두 이를 노렸다. 10세기부터 11세기에 걸쳐 신성로마제국의 일부가 되었으며, 우리 지방을 중심으로 한 구역은 황제직할지가 되었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제후의 세력이 크고 황제의 힘이 약했기 때문에 스위스 지역도 독자성을 지키고 자주정신이 강해졌다. 11세기 말부터 13세기 초까지는 체링가가 지배하였으나 그 후 합스부르크가(家)가 동스위스를 중심으로 세력을 얻어 차츰 압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대공위시대(1256∼73)에는 자치의 자유를 얻었으나, 합스부르크가의 루돌프 1세가 황제가 되자 이 자치도 위태로워졌다.

3.독립
1291년 신성로마제국의 루돌프 1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스위스 지역의 우리·슈비츠의 공동자치체의 수장(首長)은 합스부르크가의 지배하에 들어간 운터발덴 지방의 수장과 만나 8월 1일 상호지지를 약속하는 영구동맹을 체결하였다. 이‘원시 3주(또는 森林諸州)’ 연합을 스위스의 기원으로 여겨 8월 1일을 국경일로 하며, 국명은 슈비츠에서 따왔다.

합스부르크가의 압제에 저항한 농민들의 활동은 후에 전설화되어 빌헬름 텔의 이야기가 되었으며, 이를 주제로 한 실러의 희곡으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에 대한 문제는 그 후에도 계속되었으며, 1315년에는 아인지델른의 수도원 보호를 구실로 침입해온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여 3주의 결속을 강화하고 특권을 재확인하였다. 또한 이 때 제국 귀족의 기병대를 격파한 스위스 농민의 장창대(長槍隊)는 그 명성을 떨쳤다. 1322년 루체른, 1351년 상업도시인 취리히, 1352년 글라루스·추크, 1353년 베른이 포함되어 8주 동맹이 성립되었다.

그 후 슈바벤과 라인 지방의 도시들과도 연합하여 합스부르크가에 대항한 동맹은 옛 영토를 회복하려는 레오폴트 3세의 군대를 젬파하(루체른주)에서, 알브레히트 3세의 군대를 네펠스(글라루스주)에서 격파하고 독립적 지위를 확보하였다. 1474년부터는 부르고뉴의 샤를 호담공의 침입을 막은 스위스 민병은 프랑스 루이 11세의 용병이 되어 더욱 용맹을 떨쳤다. 그러나 8주 동맹은 본래 국가를 형성할 의도가 없었고 각 주는 저마다의 이익을 지키기에 급급했기 때문에 도시적 성격의 주와 농촌공동체적 주 사이에 대립이 일어나 굳건한 조직을 가질 수 없었다.

그리하여 부르고뉴에 대한 승리도 영예와 전리품 분배를 둘러싼 분쟁의 원인이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 1세가 황제가 되어 부국강병을 꾀하고 이탈리아 정책을 추진, 스위스를 압박하기 시작하자 각 주는 단결하여 과세·병역 및 제국법정의 승인을 거부하였다. 막시밀리안은 1499년에 스위스를 공격하여 슈바벤전쟁이 시작되었다. 스위스는 9개월도 안 되어 각지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바젤화약의 결과에 따라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4.종교개혁
1481년 졸로투른과 프리부르를 참가시키고, 1501년 바젤과 샤프하우젠을 동맹원으로 만든 스위스는 장크트갈렌의 수도원령에서 해방된 아펜첼의 가입과 함께 13주 동맹이 되었다(1513). 당시는 이탈리아전쟁의 시대로 스위스는 루이 12세의 프랑스에 용병을 보냈으나(동부는 밀라노 쪽에 파병), 나중에는 교황 율리우스 2세 쪽에 접근하여 1512년에는 프랑스군을 북이탈리아에서 몰아내어 현재의 이탈리아 쪽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그러나 프랑수아 1세의 군대에 패배한 후부터는 프랑스가 용병 징모권(徵募權)을 쥐었다.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나자 취리히에서는 츠빙글리가 복음주의에 입각한 설교를 하기 시작했으며(1519), 용병제 배격, 우상폐지, 교회재산 매각에 의한 구빈법 실시 등 급진적 개혁이 이루어졌다. 이 움직임은 샤프하우젠·바젤·베른에도 미쳤으며, 신교의 8개주는 동맹하여 원시 3주를 비롯한 구교 여러 주와 대립하였다.

1528년 베른회의에서 각 주의 신앙의 자유가 일단 인정되었으나 2차례의 카펠전쟁 끝에 신교는 패배하고 츠빙글리도 전사하였다. 이 무렵 독자적인 발전을 해오던 서부의 제네바가 사보이가(家)의 압력에서 벗어나려고 스위스 연맹의 보호를 요청하였으며, 프리부르 및 베른과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신교사상이 급속히 퍼졌기 때문에 프리부르와는 단절하였으며, 베른의 원조하에서 1536년에 독립공화국이 되었다.

제네바는 이리하여 신교운동의 중심이 되었으며, 파렐과 칼뱅의 힘으로 개혁이 추진되어 신정정치(神政政治)의 도시가 되었다. 또한 베른은 보 지방을 얻어 강대해졌다. 17세기에도 2차례의 빌메르겐전쟁 등 종교상의 분쟁이 있었으나 파멸적인 종교전쟁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으며, 30년전쟁 때에도 중립을 지켰다. 내부 불화가 있으면 용병공급이 중단되기 때문에 프랑스도 스위스의 중립을 원했다. 때문에 시계(서부)·직물(동부) 등의 공업이 크게 일어났고 포도주와 밀도 수출되었으며, 조세도 가벼워서 각 주는 번영을 누렸다. 그리하여 1648년의 30년전쟁을 종결시킨 베스트팔렌조약에 의해서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의 스위스 연맹의 독립을 열국(列國)으로부터 인정받았다.


5. 18세기
스위스 17~18세기에는 각 주마다 각종 정치제도가 있고 법률도 달랐으며, 중앙의 의회는 공동관리지의 행정과 외교문제를 다룰 뿐이었다. 평원의 신교 6개주는 산촌의 구교 7개주보다 수는 적었으나 공업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경제적·군사적으로는 우세했다. 신교와 구교는 각각 아르가우와 루체른에 독립된 의회를 가졌다. 경제적·문화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프랑스이다. 낭트칙령의 폐지(1685)로 많은 신교도가 스위스에 유입하였으며, 계몽주의가 보급되어 볼테르 등의 피난처가 되었다. 또 루소, J.네케르, 크라비에르 등의 사상가·재정가도 18세기에 배출되어 프랑스에서 활약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절대주의의 영향으로 과두정치가 행해지는 주도 있었으며, 보수적·폐쇄적인 특권 시민계급도 성립하였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나자 자유를 찾아 폭동을 일으키는 지방도 있었으나, 그 반면에는 스위스 병정이 해고되거나 학살당한 일 때문에 혁명에 반감을 가지는 사람들도 많았다. 프랑스-오스트리아전쟁 중에는 중립을 지켰으나 바젤의 개혁자 페터 오크스와 파리의 망명 스위스인 클럽의 조직자 라 하르프 등이 집정관 정부에 출병을 요구했으며, 나폴레옹은 이를 이용하여 젝스·보 지방에 침입하고 밀라노 침입을 위한 길을 확보하였다. 프랑스군은 다시 베른에 진주하여 13주 연맹을 굴복시켰으며, 아르가우에서 헬베티아 공화국의 성립이 선언되었다(1798). 오크스는 프랑스식 공화국 헌법을 기초하였고, 제1회 입법회의도 열렸으나 1803년까지는 거의 무정부상태였다.

6.19세기
나폴레옹은 1803년 파리에서 스위스와의 조정법(調停法)을 발표하였으며, 이것이 스위스의 헌장이 되었다. 이 때 새로이 6주를 더하여 19주가 되었으며, ‘슈비첼란트’라는 정식명칭도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또 각 주의 경계선도 정해지고 주 헌법의 우선도 인정되었으나 프랑스와의 군사협정에서는 병원(兵員)파견의 의무가 생겼다. 그러나 이 조정법도 나폴레옹이 라이프치히에서 패전한 후에는 폐지되었고(1813), 옛 정부가 부활하였으며, 대륙봉쇄령의 영향으로 원료가 들어오지 않아 실업상태였던 동부의 직물업도 다시 활기를 찾았다.

1815년에 개최된 빈회의에서 스위스는 영세중립을 인정받고 새로이 발레·뇌샤텔·제네바를 포함하여 22개주가 되었으며, 연방협약이 스위스의 기본법으로 선언되었다. 이에 따라 각 주는 평등해지고 귀족의 특권도 줄었으나 연방의회의 힘은 아직 미약했다. 보수적인 빈 체제에 대항하여 각국에서 자유주의 운동이 일어나자 스위스는 정치망명자의 피난처가 되었지만 스위스 내부에도 보수와 자유 간의 투쟁이 일어났다. 한편 기계의 도입으로 산업이 발달하고 금속공업이 발생하였으며 관광업도 시작되었다. 그 동안 통일정부를 요구하는 소리가 높아졌으며, 진보적인 7개주와 반대파의 5개주 사이에는 지방전이 일어나기도 했다.

또한 종교문제가 얽혀서 1844년 카톨릭 7개주는 존더분트를 결성, 1847년 내전에 돌입하였으나 여러 자유주가 다수를 차지한 의회가 파병하여 카톨릭 세력을 격파하고 존더분트를 해산시켰다. 1848년 2월혁명의 영향 등으로 새 헌법이 채택되었으며, 그 때까지의 ‘수개국의 연맹’ 형태에서 ‘연방제의 한 국가’로 바뀌었고 연방정부가 만들어졌다. 프로이센-프랑스전쟁(1870~71) 때에는 중립을 지켰으나, 열강의 재편성과 실업계의 복잡화에 따라 각 주의 서로 다른 법률과 군사제도를 통일해야 할 필요성이 생김에 따라 1874년 연방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는 헌법개정이 단행되었다. 또 수시로 국민투표를 하는 제도도 만들어졌으나, 국민은 보수적이어서 제안은 번번히 부결되는 일이 많았고 정치는 안정되었다.

8.20세기
제1차 세계대전 때에도 중립을 지킨 스위스는 전후에 그 입장을 유지한 채로 국제연맹 가입이 승인되었으며, 국제연맹 본부도 제네바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스위스는 연맹의 ‘군사제재’에는 참가하지 않는다는 점을 에티오피아전쟁 때 표명하였으며, 1938년 국제연맹에서 사실상 탈퇴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UN(United Nations:국제연합)에는 처음부터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제적십자사 본부를 비롯하여 많은 국제기관의 중심이 스위스에 있으며, 전시(戰時)에는 교전 각국의 이익대표국이 되었고 전후에는 교전 각국의 국제회의의 무대가 되어 인도적인 역할을 다하고 있다. 1986년 UN에 가입하기 위해 국민투표에 부쳤으나 75%의 반대로 모든 주에서 부결되었고, 2002년 3월 3일 이에 관한 국민투표를 다시 실시한다.

세계사 정리

 

 

 

공식국가명은 "미얀마연방(Union of Myanmar)"으로 인도차이나 반도의 서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불교국가인 미얀마는 동쪽으로 라오스와 태국, 남쪽으로 벵갈만, 안다만해과 접하고 있다. 국토면적이 한반도의 약 3.5배에 달하며, 삼림면적이 전국토의 57%에 달하는 약390,000㎢로 티크목재와 광물등의 풍부한 천연자원을 가지고 있다.

◈ 수 도 : 양곤(Yangon)
◈ 인 구 : 약 5,052만명(2005년 기준)
◈ 면 적 : 678,528㎢(한반도의 3.5배)
◈ 민 족 : 버마족(70%), 카렌족(7%), 카친족(2%) 등
◈ 언 어 : 미얀마어(공용어), 영어, 힌두어, 광동어
◈ 종 교 : 불교(89.5%), 정령숭배(1.5%), 회교(4%), 힌두교(1% 미만), 기독교(5%)
◈ 주요도시 : 만다레이(Mandalay), 몰멩(Moulmein)
   바쎈(Bassein),페구(Pegu)
◈ 행정구분 : 총 14개 주로 구성된 연방형태
   7개의 자치주(State): 소수종족이 거주
   7개의 행정주(Division) : 다수종족인 미얀마족이 거주


언 어
미얀마어가 공식공용어로, 대도시에서는 영어가 가능하고, 중국, 태국 등 국경접경지역에서는 중국어와 태국어가 가능하다.

기 후
열대성 몬순기후로 연평균기온이 27.4℃이며, 연평균 강우량은 2,812㎜이다. 5월하순부터 10월말까지 이어지는 우기때는 거의 매일 비가 내린다. 2월말부터 5월 중순까지 여름이고, 겨울은 11월초부터 시작하여 2월 중순까지 이른다. 미얀마의 겨울날씨는 한국의 가을날씨와 유사하다.

◈ 시 차
한국시각과 비교하여 2시간 30분이 늦다.

◈ 통 화
공식 화폐단위는 짜트(Kyat)로 지폐로 되어 있고, 짜트이하 단위는 "퍄(Pya)"라는 화폐단위가 있는데, 1짜트에 100퍄로 동전으로 되어있으나, 년 25%의 인플레이션이 지속되면서 지금은 거의 사용이 되지 않고 있다.
지폐는 1000, 500, 200, 100, 50, 20, 10, 5, 1짜트가 있고, 동전은 1짜트와 50, 25, 10, 5, 1퍄 가 있다. 특히, 1000짜트는 고액권으로 현지인들도 보기가 드물다.

◈ 전원 & 통신
미얀마 전역은 220-230 볼트, AC 전원을 사용한다.
양곤의 국제수준의 호텔에서는 자체발전기를 보유하고 있어, 호텔내 전력은 안정적으로 공급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지역은 전압의 불안정과 단전이 종종 일어나는 등 불안한 전력공급이 이뤄지고 있다. 컴퓨터와 스테레오 라디오 등의 전압에 민감한 전자제품사용하려면 전압안정장치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국제전화와 팩스사용은 용이하나, 비용이 비싸다.

◈의 류
양곤에서는 짧은 소매의 셔트나 블라우스등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미얀마 북부지역, 특히 샨지역과 같은 고산지역을 방문할때는 가벼운 자켓이나 스웨터를 준비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불교문화권에 있는 미얀마에서는 너무 짧은 셔츠나 속이 들여다 보이는 옷은 가급적이면 피하는 것이 좋다.

◈국 경 일
- 1월4일 : 독립기념일(Independence day)
- 2월12일 : 국가 연합 기념일(Union day)
- 3월2일 : 농민의 날(Peasant's day)
- 3월27일 : 국군의 날(Armed Forces day)
- 5월1일 : 노동절( May day)
- 7월19일 : 순교자의 날(Martyrs day)
- 12월25일 : 크리스마스(Christmas)

 

미얀마역사
미얀마지역에서의 인류문명의 흔적은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몇세기전부터 중앙아시아로부터 내려온 '몬족'이 딴륀(Thanlwin)과 씻또웅(Sittoung)강변에 생활의 터를 잡았다. 그들은 몬-크메르계 언어를 사용하였으며, 지금의 미얀마에 거주한 최초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몬족은 이곳을 "황금의 땅"으로 칭하여, 불교와 인도의 아쇼카왕과의 무역을 시작하였다.

오랜기간동안 미얀마에는 몬족만이 살았던 것은 아니다. 몇세기가 지나, 티벳에서 온 퓨(Pyu)족은 바마르족 휘하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는 풍요로운 이라와디강변을 따라 정착했던 바마르족(Bamar)의 지배를 강화시키면서 파간일대의 지배권 바마르족이 가지게 된다. 바마르족으로부터 버마왕국의 기원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아나와라타(Anawrata)왕 은 몬의 수도인 타톤(Thaton)을 정복하고, 3만명의 죄수를 파간으로 쫏아내는 역사적인 일을 감행하게 된다. 바마르의 아나와라타(Anawrata)왕은 몬족의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던 근간이 되었던 불교에 귀의하고 몬족어를 수용하는 등 다양하게 몬족을 흡수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온순한 민족이 아닌 몬족은 훗날 반란을 꾀하여 아난와라타왕의 아들을 죽이게 된다. 몬족의 반란을 평정한 키안지타(Kyanzitta)은 지배권을 갖게 된다.

키안지타(Kyanzitta)의 출현은 미얀마 역사에 있어 황금시대의 서막을 예고한다. 이라와디강변에서 농작물을 경작함으로써, 이라와디강 주변에 새로운 문명의 태동을 가능케 하였다. 그는 이곳에 수천개의 사원을 만들고, 문화와 예술을 꽃피우게 된다. 왕조은 1세기정도 이곳을 지배한 후, 인류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대였던 칸이 이끄는 몽골군에 의해 망하게 된다. 1287년 보찬(Vochan)전쟁의 폐전으로 왕권자체가 몽골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서쪽으로 쫓겨난 몬족과 바마르족은 다시 바고(Bago)에 터를 잡고, 도시를 건설하게 하였다. 북쪽에서는 타이족의 후예인 "샨(Shan)"이 인화(Innwa)왕조를 세운다. 곧이어 벌어진 몬족과 샨족간의 전쟁은 유럽인들의 아시아 이동과 시기를 같이 하게 됨으로써, 인도차이나반도의 유럽인의 식민지정책에 불을 붙이게 되었다.

미얀마에 가장 먼저 들어온 유럽인, 베네치아의 '니코토 디 콘티(Nicoto di Conti)'는 1435년 바고에 들어와 4개월간 머물게 된다. 1498년 포르투칼의 '바스코 디 가마(Portugeuse Vasco de Gama)'는 인도에서 해상로를 개척함으로써, 아시아로 이어지는 새로운 길을 열었다. 이윽고, 포르투칼은 동양의 무역 교두보로 사용하기 위해 인도의 고아(Goa)를 정복하였다. 이후 포르투칼의 '안토니 코리(Anthony Correa)'는 1519년 마타반(Martaban)의 총독과 미얀마에서 최초 무역 협정을 맺는다. 총독의 왕인 타빈쉬웨티(Tabinshweti)은 그의 동의 없이 이뤄진 협정에 인정하지 않았다. 1541년 타빈쉬웨티은 마타반을 공격하게 되고, 포프투칼인은 또다른 정복지인 라카인(Rahkin)로 퇴각하여 '미옹후앙(Myohuang)'과 연합하게 된다.

1600년, 포르투칼의 '필립 드 브리토 이 니코트(Philip de Brito y Nicote)'가 미얀마를 찾게 되는데, 이는 미얀마역사상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의 시발점이 된다. 드 브리토는 바고를 정복하여 라카인왕으로 등극하고, 도시의 요새 건설를 시작한다. 드 브리토는 곧 고아로 가서 부왕의 딸과 정략결혼한 후, 군대와 무기를 가지고 바고로 되돌아 왔다. 결혼 선물로 받은 미얀마에서 그는 자신을 왕으로 군립하였고 불교 사원을 파괴한다. 드 브리토의 통치는 13년간 이어지다, 몰락하게 되었으나, 영국인을 중심으로 한 유럽인인은 미얀마에 계속 머무렀다.
17세기중엽까지 미얀마는 프랑스와 독일, 영국의 식민지로 있었다. 바마르의 아라웅파야왕은 라칸을 정복하고 벵갈국경지역, 인도부근 영국령 라진(Rajin)까지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1819년 영국이 버마를 침공하여, 라칸, 타닌타이(Tanintharyi), 아쌈(Assam), 마니푸르(Manipur)등지를 빼았고, 1852년 버마남부까지 확대해 갔다. 급기야 1886년에는 인도국경지역까지 이르는 미얀마 전국토를 점령하게 되었다.

아시아의 독립운동의 시작은 영국 점령군의 퇴각할때 미얀마에 자치권을 인정하면서부터 기인된다. 사야 산(Saya San)이 이끄는 버마군은 영국군을 공격하게 되고, 이는 영국군으로하여금 버마를 독립된 식민지로 만드는 계기가 된다. 이후, 학생지도자,'타킨 아웅산(Thakin Aung San)'이 독립을 외치는 시위를 주동한다. 산은 그의 독립 시위로 인해 결국 체포되었지만, 중국으로 도망 가 일본인과 공조하여 독립을 향한 노력을 하게 된다. 일본인으로부터 미얀마의 독립을 약속받고, 영국을 몰아내는 데에 적극 지원 받은 산은 1941년 뜻을 이루게 된다. 수천명의 목숨을 잃은 영국군은 퇴각을 선언하게 되고, 4년이 지난후에야 일본과 산의 동맹군은 결국 버마를 되돌려 받게 되었다. 결국 1947년 영국은 국지전에 대한 부담감으로 버마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새로운 지도자로 등극한 아웅산은 사실상 실권을 쥐지 못한채, 그 해에 암살당하게 된다. 그의 동료인 탄킨 누(Thankin Nu)이 그를 이어 대통령이 되었고, 그는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1958년, 시민소요가 터지자, 탄킨누는 네윈(NE Win)에게 소요진압을 지원해주기를 요청한다. 결국 누는 1960년 몬족과 라카인족의 자치권을 인정하는 조건으로 다시 권력을 되찾게 된다. 누의 자치권인정이 제대로 이행되지않자, 1962년 샨과 카인족은 폭동을 일으켜 새로운 세력으로 나타나게 된다. 당시 요청이 없었지만, 급진 공산주의자였던 네윈 장군은 폭동을 진압하고, 또한 누를 체포 감금한 후, 군부정치를 선언하게 된다.

1966년 풀려난 누는 지방으로 숨어들어가, 폭동세력 조직하여, 1971년 폭동을 일으켰으나, 곧바로 진압되고 만다. 네윈의 군부 독재가 막을 내린 1981년, 누는 석방되어 고향을로 돌아가, 생을 마감하였다. 1988년 타트마도(Tatmadaw)의 탄압에 대항한 학생들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결국 타트마도는 그 이듬해 민주선거에 동의하게 된다. 선거에서 민족 민주연합(NLD)가 60%를 얻게 되었으나, 타트마도는 새로운 지도자의 동의가 없었다는 이유로 선거무효를 선언한다.
군사정권의 폭정하에 비폭력 투쟁을 전개한 민주운동의 지도자였던, 아웅산 수지(Aung San Suu Kyi ; 아웅산의 딸)는 자택에 감금당한 1991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여받았다. 오늘날에도 수지의 평화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미얀마의 문화
▶건축 예술
미얀마의 건축물은 종교와 왕권에 의해 강한 영향을 받았다. 사원, 파고다, 왕궁은 그림, 목각, 조각등의 뛰어난 예술적 스킬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수많은 사원과 파고다는 전통적인 방식인 벽돌로 지어졌다. 그러나, 왕궁은 이와 달리 목재로 지어졌으며, 아름다운 조각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은 현재에도 잘 보존되어 있다.

▶음 식
미얀마의 음식문화는 중국과 인도식의 음식문화가 혼합된 것으로서, 미얀마의 카레와 수프는 대표적인 전통음식이다. 서양의 접시보다 중국 접시가 더 잘 맞으므로, 중국식 접시에 카레와 수프가 담겨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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